文化 遺跡 /한옥 건축

韓國의 建築

초암 정만순 2018. 2. 28. 19:44



韓國의 建築

                       

    숭례문

    서울 숭례문의 전경, 조선 시대 한양의 성문으로 남대문이라고도 함, 국보 제1호



    공주 석장리와 두만강 하구 굴포리 등에서 발견된 유적에 의하면 구석기시대부터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는 건축이라 부를 만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본격적인 유적이 발굴된 신석기시대부터 한국의 건축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사시대의 한국 건축

    신석기시대는 민무늬토기와 빗살무늬토기 등을 제작·사용하던 시기로 서울 암사동, 온천 운하리(옛 지명은 용강군 궁산리), 지탑리 등에서 발견되었다(→ 지탑리유적).

    유적

    암사동 유적(신석기시대), 사적 제267호, 서울 강동구 암사동


    이들 주거지는 원형 또는 사각형의 평면으로 땅을 파고 기둥과 도리, 서까래 등으로 결구하여 경사진 지붕을 만든 움집[竪穴住居]이다. 움의 한쪽에는 토기의 밑을 잘라 거꾸로 박은 토기공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저장공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지탑리주거지에서는 탄화된 피·조 등 곡물이 발견되었으며, 남녀의 도구가 다른 위치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남녀 또는 기능에 따른 공간분화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청동기시대(BC 1000~300)는 농경생활을 영위하면서 정착생활을 시작한 시기로 나지막한 구릉지대의 경사면에 취락을 형성했다. 주거지는 대부분 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수혈주거였으며 황해도 봉산군 신흥동 제2호 주거지에서는 칸막이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파주시 월룡면 덕은리(사적 제148호)는 길이 15.7m, 남북 너비 3.7m의 대형 주거지이므로 공동가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청동기시대에 이루어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계급분화는 건축에도 영향을 미쳐 분묘건축, 즉 지석묘·입석·돌널무덤[石箱墳]·돌무지무덤[積石塚]·토광목곽분 등의 다양한 분묘건축이 조성되었다.

    철기시대(BC 300~AD 1)의 주거도 청동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수혈주거가 주류를 이루었다. 변한·진한 등에서는 귀틀집구조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고상 주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시기 지배계급의 주택은 한(漢)나라의 발달된 건축술의 영향으로 진일보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시대의 한국 건축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은 〈삼국사기〉 잡지 옥사조 등의 기록을 통하여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며, 안압지에서 출토된 공포부재를 통하여 당시 공포의 세부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감은사지


    이들 공포부재 가운데 첨차는 단부를 직절하고 그 아래를 4단 접은 것으로, 윗면에는 소로 놓일 자리에 소로와의 결구를 위한 쐐기홈이 패어 있다.

    소로는 굽받침이 없고 굽은 곡면으로 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건축양식은 삼국시대와 거의 같은 양식이었다고 생각되나 점차 당(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사찰건축으로는 사천왕사지(679)·감은사지(682)·천군리사지·보문사지 등의 절터가 남아 있으며, 배치형식은 금당과 금당 전면 좌우에 2개의 탑을 세우는 이탑식으로 변했다.

    한편 밀교가 전래되고 선종이 유행하면서 사찰이 심산유곡으로 들어가 조영됨으로써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산지가람으로는 부석사(676)·해인사(803)·범어사(834) 등이 있으며, 이들은 전체적으로 좌우비대칭이고 자연의 지세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고려시대의 한국 건축

    고려시대에는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전래된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이 도읍·택지·묘지의 선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도경〉이나 만월대 유적지 등을 통하여 궁궐건축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데, 만월대의 궁궐배치 역시 좌우비대칭으로 자연의 지세와 조화를 꾀하려고 한 조형의식을 엿볼 수 있다. 사찰건축은 일탑식과 이탑식(흥왕사)이 병존했으며, 개성의 연복사는 동전서탑식이었는데 일본 호류 사가 이와 같은 배치방식이다. 이외에 남원 만복사지와 같은 일탑삼금당식이 변형된 배치방식도 있는 등 다양한 배치유형이 혼재했다. 특히 고려 중기 이후에 금당은 대웅전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이외에 사찰 내에 나한보전·칠성각·응진전·영산전·산신각 등 다양한 용도의 건물이 건립되었다.


    부석사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13세기경), 국보 제18호,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


    고려시대 목조건축양식은 고려 말기에 다포계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대부분 주심포계였다(주심포양식).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주심포계 건물로는 봉정사 극락전(12세기말에서 13세기초), 부석사 무량수전(13세기), 수덕사 대웅전(1308) 등이 있다. 이들 건축물의 건축양식을 보면 기둥은 배흘림이며, 주두와 소로는 굽면이 곡면이고 굽받침이 없다. 첨차의 밑면은 연화두형(쌍S자각)으로 초각했으며, 주두와 소로로 굽받침이 없는 것(봉정사 극락전)과 있는 것(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의 2종류가 있다. 종도리는 곡선적인 소슬합장이나 소슬대공으로 결구되어 있다. 다포계 건축은 고려 말기에 원(元)나라로부터 도입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다포계 건축으로는 심원사 보광전(1347)이 대표적이다. 심원사 보광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팔작지붕으로 공포는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이며 주두와 소로는 굽받침이 없고 굽면을 사면으로 한 평굽으로 되어 있다. 첨차의 밑면에는 연화두형의 초각이 없이 단부 하단을 원호로 굴린 교두형이다.

    근대의 한국 건축

    19세기말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오직 중국과의 사대교린으로 일관했던 조선은 서양열강과 일본에 의하여 문호개방에 대한 압력을 받다가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개방되었다. 그결과 각국의 공관과 종교건축물이 세워지면서 전통적인 건축양식과는 다른 새로운 건축양식이 도입되었다. 19세기말에 도입된 새로운 건축양식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도입된 양식, 서양열강제국에 의하여 도입된 전통적인 서양식, 이를 절충한 의양풍이 있다. 특히 이때는 민간양옥도 다수 건립되어 20세기 한옥개량운동 등 여러 측면에 영향을 끼쳤다.

    대한의원

    대한의원, 사적 제248호, 구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1890년 건립되어 현존하는 영국공사관은 벽돌조 2층집으로 박공부분과 1, 2층의 베란다, 아케이드 등이 있는 정교한 건축이다. 종교건축으로는 1898년 착공·준공된 정동교회 등이 있다. 이처럼 새로운 건축양식은 대부분 벽돌이나 석조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서양에서 유행하던 고전주의·낭만주의·절충주의적인 양식으로 르네상스·고딕 양식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19세기에 서양식 건축의 도입에 있어 그 특징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목수들이 양식건축의 공사를 전담할 수 없어 대부분 중국인 노무자들을 채용했다는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20세기초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더불어 스팀 난방 등의 새로운 설비체계가 도입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점차 서양식 건물의 건립이 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의 종교·주거·외교 계통 건물 외에 각종 상점·병원·호텔 등이 건립되었다. 예를 들면 천주교 원효로성당(1902), 벨기에 영사(1903~06) 등이 있다. 특히 20세기의 건축활동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평양 장로교회, 화산 천주교회 등과 같은 한양 절충양식 건물의 출현이다.

    1930년대에는 합리주의적인 근대건물들이 출현했는데 1929년에 준공된 경성상공장려관을 시작으로 신동아백화점(1931)·조선신문사(1933)·삼중정백화점(1933)·조선일보사(1935) 등이 이러한 계열에 속한다. 또한 1930년대부터는 한국인 건축가들이 전문적인 교육기관을 졸업하고, 건축계에 대두하여 많은 건축물들을 설계하는 한편, 8·15해방 이후 세대들에게 대를 물려주게 되었다. 이때 건립된 것으로 박길용의 경성제국대학본관(1931)·화신백화점(1935~37), 박동진의 보성전문학교 본관(1934) 및 도서관(1937), 강윤의 태화기독교사회관 등이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해방을 맞았으나 곧 6·25전쟁으로 큰 피해를 보게 되었고, 1959년까지는 전쟁 복구에 전념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명보극장(1957, 김중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사(1957, 김희춘), 국립중앙관상대(1959, 정인국), 동국대학교 본관(1959, 송민구), 정신여자고등학교 과학관(1958, 김정수), 혜화동성당(1958, 이희태) 등 국제주의적 경향을 띤 건물들이 건립되었다.

    1960년대에는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경제개발과 더불어 건설수요가 급증했다. 이때의 주요건축으로는 서울시민회관(1961, 이천승), 프랑스 대사관(1962, 김중업), 워커힐 본관(1962, 김희춘), 명동성모병원(1963, 김정수), 한양 컨트리 클럽(1964, 이광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회관(1964, 강명구), 자유 센터(1964, 김수근), 복자기념성당(1967, 이희태) 등이 있다. 이 시기를 윤일주는 '실험과 논재의 10년'이라고 정의했다. 1970, 1980년대의 20여 년 간은 그간의 국제주의적 경향을 벗어나 건축가들의 개성이 표출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건축

    삼국시대의 한국 건축

    삼국시대에는 한층 더 발달된 건축문화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건축문화는 고분과 그 벽면에 그려진 벽화 등을 통하여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안악 제3호분에 보이는 3개의 팔각석주(전실과 주실)의 주두, 동측실의 부엌칸·차고·외양간 등을 보면 이미 원시시대의 원시성을 탈피한 상당 수준의 건축문화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벽화고분을 통하여 고구려에서는 이미 기둥에 주두와 첨차를 얹은 가구식구조와 공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372년(소수림왕 2) 불교가 전래되면서 많은 사찰건축이 창건되었다. 청암리 금강사지의 가람배치는 중앙에 팔각형의 목조탑을 두고 동·서·북 3곳에 금당을 배치한 1탑3금당식(一塔三金堂式)인데, 이는 당시 왕궁과 사찰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던 배치방식으로 여겨진다. 평양의 안학궁지도 비록 좌우대칭은 아니지만 남북 자오선을 중심축으로 중앙에 중궁을 두고 동·서·북에 각각 동궁·서궁·북궁을 배치했다. 이러한 배치방식은 천문오행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당시의 일반 민가는 대부분 초가집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지안[輯安] 동대자 주거지에 보이는 'ㄱ'자형 구들[長坑]구조와 같은 난방법은 고구려 후기에는 상류층 주택에까지 보급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의 건축문화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동탑편을 통하여 그 일부를 알 수 있다. 이 동탑편은 목조가구식으로 일본 호류 사[法隆寺] 오중탑과 유사한 형태이며, 하앙계의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사찰은 대부분 일탑일금당식의 배치로 중문·탑·금당·강당을 남북 자오선을 중심축으로 하여 배치했다.

    미륵사지는 일탑일금당식의 배치가 3개 병렬되어 동원·중원·서원을 이룬 삼원형식으로 동원과 서원에는 석탑을, 중원에는 목탑을 세웠는데 서원의 석탑은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석조탑파이다. 백제의 분묘건축으로는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현실(玄室)을 벽돌로 쌓은 볼트 구조이다.

    신라의 건축문화는 〈삼국사기〉 등에 궁궐건축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흥륜사·황룡사·분황사 등의 절터가 남아 있어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 황룡사는 수차례에 걸쳐 중건되었으며 처음에는 일탑일금당식의 배치였으나 금당 좌우에 동·서 금당을 짓고, 금당 전면에 목탑(643)과 금당 후면에 강당을 배치하여 고구려 청암리 금강사지의 일탑삼금당식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분묘건축으로는 천마총(5~6세기)·98호고분(5~6세기) 등의 적석목곽분과 석곽분이 있다.

    이외의 건축으로 석빙고가 있는데 내부는 석조 볼트 구조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한국 건축

    조선시대는 건국초부터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국도의 선정문제로 많은 논란을 겪다가 1394년(태조 3)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도성·궁궐·종묘·사직 등을 조성했다.

    도성의 동서남북에 4대문(숭례문·숙청문·흥인문·돈의문)을 세우고, 사대문 사이사이에는 4소문(광희문·홍화문·창의문·소덕문)을 배치했다. 남대문에서 경복궁에 이르는 남북대로와 동대문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동서대로가 중심가였다. 조선시대 건축양식은 크게 포집과 민도리집으로 나뉘며, 포집은 다시 주심포계·다포계·익공계, 민도리집은 납도리집·굴도리집 양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주심포계 건축은 고려시대와는 다른 변화를 보이는데 주두와 소로는 굽면이 사면이 되고 굽받침이 없어지며, 초기에는 첨차에 연화두형이 보이나 점차 변형되어 없어진다(→ 주심포양식). 기둥은 주로 배흘림으로 되어 있다. 주심포계 건축은 다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이를 보이므로 초기·중기·말기로 구분할 수 있다. 초기의 건물로는 무위사 극락전(1476 이전), 강화 정수사 법당, 송광사 하사당, 도갑사 해탈문 등이 있으며, 중기의 건물로는 도동서원 중정당, 봉정사 화엄강당·고금당, 나주향교 대성전 등이 있고, 말기의 건물로는 전주 풍남문 등이 있다.

    다포계 건축은 기둥이 배흘림에서 민흘림으로 바뀌고, 주두·소로는 굽받침이 없고, 곡면이 사면으로 운두가 높아진다. 출목수가 점차 증가되고, 특히 외출목수보다 내출목수가 많아지면서 천장이 높아진다. 주간포작은 일구(一具) 내지 삼구(三具) 정도로 제공 끝은 앙서·수서 등의 쇠서형이며, 첨차 끝은 교두형이다.

    후기로 갈수록 제공들은 상하가 맞붙은 판형이 되며 내부는 운궁을 형성하고 화려한 초각을 하여 장식적으로 변했다. 다포계 건축 역시 시대에 따라 차이를 보이므로 초기·중기·말기로 구분할 수 있다. 초기의 건물은 서울 남대문, 신륵사 조사당(1469) 등이 있으며, 중기의 건물로는 창경궁 명정전(1616), 전등사 대웅전·약사전, 법주사 팔상전, 내소사 대웅전 등이 있고, 말기의 건물로는 불국사 극락전·대웅전, 해인사 대적광전, 창덕궁 인정전, 경복궁 근정전 등이 있다.

    익공계 건축은 익공이 1개 사용된 초익공, 2개 사용된 이익공, 3개 사용된 삼익공이 있으며, 그외에 익공의 단부를 수서형이 아닌 둥그스름하게 초각한 몰익공이 있다. 익공계 건축의 실례로는 강릉 해운정(초익공), 강릉 오죽헌(초익공), 강릉 칠사당(삼익공), 하회 충효당(몰익공) 등이 있다. 민도리집 양식은 기둥 위에 주두를 얹지 않고, 도리로 기둥 위에 직접 보와 도리를 결구하는 것으로, 도리의 단면형에 따라 굴도리와 납도리로 구분된다.

    또한 도리를 장여가 받고 이를 다시 소로로서 받치는 경우를 소로수장집이라고 한다. 서울의 많은 주택들이 이 양식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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