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佛敎 美術 建築

韓國 傳統 寺刹 建築 鑑賞 方法 硏究

초암 정만순 2018. 2. 25. 12:35




韓國 傳統 寺刹 建築 鑑賞 方法 硏究


이 성 도*


차 례


Ⅰ. 서 론
Ⅱ. 사찰건축의 이해
   1. 사찰건축의 개념
   2. 가람배치
   3. 종파와 전각
   4. 종파에 따른 사찰의 유형
   5. 전각의 구성


Ⅲ. 사찰건축 감상의 실제와 특징
   1. 사찰 건축의 특징
   2. 사찰건축감상의 방법
   3. 사찰건축감상의 실제
Ⅳ. 결 론
참고문헌
Abstract



Ⅰ. 서 론


사찰건축은 우리 나라 전통 건축에서 양으로 가장 많은 수와 질로도 가장 뛰어날 뿐만 아니 라 오늘에도 새롭게 변화하면서 전통문화를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다.


조선조 오백년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修己治人”의 유교적 이념을 실천하였지만, 근대 백 년 동안 사회문화 격변의 한 세기를 보내면서 생활과 유리되고 그 중심이었던 선비문화는 단절되었다. 유교를 상징하던 향교나 서원은 그 유형적 형태만 남아있을 뿐이지 그 본래의 기능이었던 “講學과 享祀” 중 강학 기능은 사라지고 향사 기능만 그 지역의 유생들에 의해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서원이나 향교는 더 이상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가지 못한 채 썰렁한 건물만 외롭게 서 있다. 이에 반해 사찰은 과거의 전통을 바탕으로 나날이 변화하면서 기존의 건물이 일신되거나 새롭게 신축되면서 사람들의 쉼 없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사찰은 전통미술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학교 교육에서 보편성 있는 관심을 보이지 아니한다. 사찰건축은 종교의례와 신앙의 공간으로 불교신자들이 건축적 공간에 대한 의미를 밝힐 뿐이고, 일반인들은 자주 사찰을 찾지만 그 의미에 대해 무관심하다. 사찰을 포함한 전통건축은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형의식을 잘 간직하고 있기에 우리 전통문화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 교육에서 건축영역은 어느 교과에서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삶 또한 전통건축과 유리된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전통건축은 우리와 동떨어진 별개의 섬처럼 남 아있다. 보통사람들이 여가가 있을 때 호젓이 찾아가는 산사이지만 사찰이 갖는 자연환경과 고요한 분위기에는 매료당하면서도 그 속에 깃든 문화와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어느 전통 사찰의 유명한 전각 앞에 서서 그 건물을 설명하는 문화재 안내판을 온전하게 이해 할 수 없음은 기성세대나 신세대이거나 별차이 없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우리 나라 사찰건축은 1600여년의 불교사와 함께 수많은 불교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우리 전통건축은 미술의 여러 장르 중 우리의 미의식과 조형정신이 잘 깃들여져 있으면서 당시 신앙의 체계나 사상 그리고 삶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우리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필수적인 미의 여정이 되고 있다.



본 연구는 우리 전통건축으로 오늘에도 온전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사찰건축을 어떻게 이해하고 감상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고자 한다. 건축을 통하여 인간과 역사를 만나 고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건축감상 목적의 하나라면 본 연구는 기존의 전통 사찰건축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사찰 건축 감상의 그 기초적 시각과 방법론을 제공하고자 한다.



* 한국교원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Ⅱ. 사찰 건축의 이해


1. 사찰건축의 개념


사찰?절은 불교의 상징인 불상이나 탑을 봉안하여 수행자들이 머물면서 수행하고, 전법 하는 곳으로 불교 신자가 예배하고 수행하는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공간이다. 절은 불교라는 종교 건축이기에 불교가 갖는 종교적 세계와 역사의 흐름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사찰은 가람, 절, 사원, 정사(精舍), 사(寺), 암자 등으로 불리거나, 본사, 말사 등 지역 단위 등의 교구행정단위로 불리기도 한다. 크게는 백 동이 넘는 건물군으로 하나의 촌락을 이루는 듯 한 대규모의 사찰에서 오두막을 연상시키는 한 두 동의 작은 건물로 조촐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암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가람은 석가모니가 살아 있을때(佛在世時) 중인도의 마가다(Magadha)국빔비사라(Bimbis?ra)왕이 기증한 원림(竹林園)에 신심 있는 장자가 작은 집-오두막 60동을 건축함으로 ‘죽림정사’가 이루어 졌다. 죽림정사는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구조와 기능을 가진 건축이 아니라 겨우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아주 원시적인 조촐한 건물이었다. 그 후 사찰은 보다 큰 규모와 격식 있는 주거용 건물로 지어졌다.



사찰의 어원은 상가람마(Sa?gh?r?ma)로 수행자들의 모임을 뜻하는 상가(Sa?gha)와 거주처를 뜻하는 아라마(ar?ma, 園林)가 합쳐진 용어로 교단을 구성하는 사부대중(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니)이 모여 사는 곳을 의미한다. 불교가 중국에 수용되어지면서 상가라마를 승가람마(僧伽藍摩)로 표기하였고 나중에는 가람(伽藍)으로 단축하여 불렀다.


오늘날 한국의 전통사찰들은 대부분 산 속에 위치한다. 이것은 선불교 전래이후부터 점차적으로 산지가람이 조영되다가 조선시대 숭유 배불 정책에 의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석가모니가 살아 있을 때 절 또한 대도시 주변의 숲이 있는 동산(園林)에 위치하였다.


원림은 원래 ‘휴식처’나 ‘과일이 있는 동산’을 뜻한다(김현준,1991, p.14). 원림에 대한 이해는 인도라는 열대지방의 자연 조건 중에 우기(雨期)에 수행자들이 탁발과 유행(遊行)을 할 수 없을 때 수행을 위한 안거제도가 정착하면서 정진의 공간으로 조성되어졌고, 점차적으로 1년 내내 상주하는 주거 공간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 동안 불교의 변천에 따른 역사와 지역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지만 사찰은 ‘진리를 찾아가는 수행의 공간’, ‘예배공간’이라는 본래의 의미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인도에서 수행자들의 공동거주지로 불렀던 ‘상가라마’, ‘비하라(Vih?ra)’가 중국에서는 寺, 寺院, 院, 寺刹등으로 번안하여 불렀다. 초기에 사(寺)로 호칭되어지고 다르게는 사원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원(院)은 주위에 회랑이나 담장을 두른 집을 의미한다. 또 다르게는 상가라마의 본래 뜻을 살린 寺園으로 부르기도 하고 園을 院으로 바꾸어 쓰기도 하였다. 당나라 시대에는 寺와 院을 같은 의미로 사용(상게서 p.19)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寺는 사찰 전체를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쓰였고 원(院)은 사찰 속에 특정한 기능을 가진 특별한 건물(別舍)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하였다. 그리고 조촐한 수행공간을 암(庵)이라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의 개념과 용어를 그대로 수용하여 사용하였고 순수한 우리말인 ‘절’을 함께 사용하는데, 이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阿道)스님이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포교를 하였는데 모례의 모(毛)자가 우리말 ‘털’이므로 ‘털례의 집’이라 하였다가 ‘털’이 ‘덜’로 ‘덜’이 다시 ‘절’로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르게는 사찰은 불상이나 탑을 향해 절을 하는 공간이기에 ‘절’이라 불러졌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사찰과 절은 불상이나 탑을 중심으로 예배 공경하는 수행으로 자신의 본성과 진리를 향한 순례의 공간으로 건축되어진 것이다.


우리 나라는 불교를 4세기말인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가 거의 동시적으로 받아들였고 신라는 6세기초가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초창기 중국의 사찰 그대로 닮았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중국의 가람배치는 중국의 궁전건축과 인도의 불탑을 중심으로 한 가람형식이 복합적으로 구성되면서 특히 불탑이 강조되는 가람배치였으리라 추정한다. 이는 양연지(陽衍之)가 찬한 『낙양가람기』를 통해 북위의 胡太后에 의해 건립된 영녕사(永寧寺)의 가람배치를 더듬어 보면, 사찰의 중앙에 9층 목탑이 있고 북쪽에 불전을 두어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홍윤식, 1997, p. 46).


중국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우리 나라 가람배치도 대체적으로 이 영녕사와 같은 형태를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우리 나라 초기의 가람에서도 이와 같은 목탑을 수용하고 있으며, 이후 삼국 통일 직전에 백제에서 석탑이 발생하게 되면서 이후 가람에 목탑대신 석탑을 수용하여 석탑의 나라라고 할만큼 많은 석탑이 불교가람에 세워졌다(상게서, pp. 46-47).



2. 가람배치


우리 나라의 고대 사원의 가람배치의 양식을 밝히는 노력은 광복 전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몇 사원지가 발굴되면서 시작되었다(상게서, p.47). 그러나 그 연구 결과가 제대로 보고된 예는 소수에 불과하다. 가람배치에 대한 대부분의 보고서는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조사 연구되어 보고되었다. 초기 가람배치는 대체적으로 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질서 있는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가람배치는 지형적인 조건에 따라 평지형, 산지형, 구릉형, 또는 평지 가람형, 산지가람형, 석굴가람형 등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평지가람과 산지가람으로 구분하고 구릉형은 산지 가람 속에 포함시키기도 하다. 우리 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으로 구성되고 그 산은 험준한 산악이라기보다 노년기 준평원으로 이루어지면서 원만한 볼륨을 지닌 구릉지대가 많고 그 아래 촌락을 구성하면서 삶을 꾸려 왔다. 사찰 역시 초기에는 도성이나 성읍 등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평지 중심으로 건축이 되어졌는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예는 경주 황룡사지, 분황사, 부여의 정림사지 같은 예를 볼 수 있다. 삼국 모두 초창기에는 불교 자체가 민중에 기반을 두지 못하고 왕실의 비호 속에 국가 주도의 국찰이나 왕실의 원찰로 만들어지면서 그 규모가 궁궐에 버금갈 정도로 장엄하였다. 당시의 모습을 삼국유사에는 “절은 별처럼 늘어서고 탑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있다(寺寺星張塔塔雁行)”고 기록하고 있다.


산지가람은 통일신라말기에 들어 선종과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깊은 산 속에 가람을 개척하면서 수행중심의 가람을 조영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배불숭유정책에 따라 도시에는 수행과 전법의 공간을 용납하지 않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사찰들은 산 속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었고 중기 이후에는 무종파의 통불교계의 사찰들이 더욱 깊숙한 산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산지가람의 대부분은 지형에 따라 자유로운 가람배치를 이루면서 평지가람에 비해 소박하고 자유로운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적 교리에 의한 상단, 중단, 하단의 엄격한 격을 가지면서 신앙의 체계가 드러나는 위계성을 가지기에 마냥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평지가람에 비해 그 엄격성이 덜하고 기본적 지형이나 자연의 조건을 고려하여 건축되었다. 오늘날 구산 선문의 선종가람이나 그 폐사지 그리고 조선시대로 이어온 통불교 중심의 여러 산지 가람을 통해서 그 면목을 볼 수 있다.


석굴사원은 우리 나라에서 별로 발달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국인이 갖는 의식에는 건축은 자연재로 조화롭게 지어지면서 숨쉬는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하였다. 건물은 외계를 차단하는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를 연결하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는 인식이다. 또 하나는 우리 나라 전역에 분포하는 견고한 화강암으로 인해 석굴 조성의 어려움으로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대규모의 석굴조성은 출발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정한 한 시대와 일부 지역에서 석굴사원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당시 국제적 흐름을 쫓아 애쓴 모습의 하나로 보여진다. 암벽 개착이 어려운 조건으로 인공석굴을 만들어 사원을 조성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경주 토함산 석굴암이다. 석굴암은 우리 나라 전시대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하이테크 건축으로 동아시아 석굴사원의 정점이다. 그러나 석굴암의 앞 시대나 그 뒤를 잇는 약간의 석굴사원조성이 있었으나 그 온전한 모습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지 않고 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도입된 이후 국가와 시대마다 가람배치가 달라졌는데 그 완전한 모습은 드물다. 이는 처음 창건했을 때 그 모습으로 천 육 백년 이상 지속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변동과 함께 교계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불교사상의 수용과 시대적 요구로 끊임없이 변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초창기의 가람은 그 원형적인 모습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고 초기연구의 발굴 보고서 마저 제대로 발표되지 않아 오리무중에 빠져 있지만, 근 현대의 발굴성과와 그 동안의 연구가 그런대로 윤곽을 제시해 주고 있다.



1) 고구려 가람배치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도입된 이래 곧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寺)를 건립하였다. 광개토왕 2년에는 평양에 9사(九寺)의 창건을 위시하여 그 후 계속적으로 여러 사찰들을 창건하였다. 당시의 불교의 성질로 보아 도성 가까이 불사가 건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삼국유사에 쓰여 있는 영탑사는 8면 7층의 석탑이 있었고 요동성 육왕탑은 7층 목조탑이었다고 하니 단편적이나마 당탑의 장엄함을 추측할 수가 있다(윤장섭, 1983, p. 46, 고유섭, 1999, p. 38).


고구려 사찰 건축을 알 수 있는 사찰 건축지는 원오리사지, 상오리사지, 정릉사지, 금강사지이다(주남철, 1999, p. 248). 그러나 이때 창건한 사찰들은 역사의 뒤편에 사라져 그 원형을 확인할 길이 없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한 평양 일대의 사지가 발굴되었으나 제대로 된 보고서가 발표되지 아니하였다. 그 중 청암리사지만 문자왕 때 창건된 금강사지로 추정할 뿐이다. 광복 후 평양의 정릉사지가 보고되었는데 1탑3금당 배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즉 중앙에 목탑지가 있고 동서북편에 금당을 배치하고 목탑 남쪽에는 중문이 있는 형식이다(그림1. 참조). 고구려 가람배치는 연구 보고서가 빈약하여 단정하기 어렵지만 앞서 기술한 청암리사지나 정릉사지 등에서 보는 것처럼 8각 목탑을 중심으로 3금당을 구성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의 예는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우며 다만 고려시대에 건립된 남원의 만복사지(그림6.참조)가 유사한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다. 주변국의 경우는 일본 나라의 비조사지(飛鳥寺址)가 동일한 배치 방법을 하고 있어 고구려와 일본간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주남철,1999, p. 249).



2) 백제의 가람배치


백제가 불교를 침류왕 원년(384년)에 공식적으로 수용하고 그 다음해 한산주에 불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그 모습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 후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밀려 공주, 부여로 천도하면서 사찰 또한 새롭게 창건되었으리라 추측되어진다. 당시 백제는 중국의 양나라와 교류가 활발한 점으로 미루어 중국 양나라 불교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으리라 짐작이 된다. 백제는 공주, 부여 그리고 익산 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사찰들이 창건되었는데 일부 사찰을 제외하고 대다수 사찰들은 평지가람으로 경영되었다고 보여진다. 백제의 평지가람으로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정림사지, 금강사지, 미륵사지가 발굴조사 되었는데 대체적으로 일탑 일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백제 가람 배치는 탑을 중심으로 하여 중문, 탑, 금당, 강당의 건물 중심이 자오(子午)선상에 놓이도록 좌우대칭으로 배치하고 회랑을 돌린 것으로 그 예로서는 부여 정림사지와 백제 장인들에 의하여 지어진 신라 황룡사지및 일본의 사천왕사를 들 수 있다(윤장섭, 1983, p. 68).


그 중 동남리사지는 탑이 존재하지 않고 미륵사지는 삼탑 삼금당의 형식(三院竝列式)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미륵삼존을 위해 금당을 세 개 둔 것으로 해석된다. 미륵사지의 가람배치(그림2. 참조)는 일본의 사천왕사 가람배치가 유사하여 고대 일본 불교문화에 끼친 백제의 불교 문화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 백제는 미륵사지 창건을 통하여 동?서에 화강암의 석탑을 건립함으로서 목탑에서 석탑으로 일대 전환을 유도하면서 후대에 사찰조영에 새로운 탑파의 이정표로서 석탑을 제시하였다.



3) 신라의 가람배치


삼국 중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하였고 문화의 계통적 흐름으로 보아도 백제나, 고구려와 다른 문화를 형성하면서 미술표현에 있어 보수적 성향과 추상주의를 지녔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의 수용 면에서도 매우 보수적 성향을 지니면서 불교 수용과정에서 내부적 갈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신라에서 불교의 전래는 공식적인 수용이전에 상당기간 개인적인 포교활동을 가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5세기 중엽 묵호자에 의한 선산지역 모례(毛禮)의 집에 굴실(窟室)을 지어 개인적인 포교활동을 한 것이 신라불교의 초전(初傳)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불교는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국가 공인을 받으면서 흥륜사, 대통사, 영흥사, 신중사, 기원사, 황룡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 등이 창건되었다. 그 중 분황사는 지금까지 법등을 이어 오고 있다.


이 중 사지가 확인 발굴된 것은 흥륜사, 황룡사, 분황사 등이 있을 뿐이다. 가람의 배치구성은 불상과 사리를 안치하는 금당과 탑이 중심이 되었으며 평지사찰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중문, 탑,금당이 축선 상에 배치되며 주위를 담장이나 행랑으로 둘러싼 배치 형식을 취했다(대한 건축학회, 1996, p. 198). 당시 대표적인 사찰인 황룡사 가람배치는 3번의 큰 변화가 있었는데 처음 창건했을 때 일탑 일금당 가람배치 양식이었다가, 645년 9층 목탑을 건립하면서 일탑 삼금당을 배치하였는데 남북 중심 축에 남쪽으로부터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놓여 있고 중문에서 강당까지는 방형의 회랑을 둘렀다. 금당좌우로는 규모가 약간 작은 금당이 있다. 그후 통일신라시대에 목탑 전방 좌우에 종루와 경루를 설치하였다. 마지막으로 통일신라말기에 종루와 경루를 정방형으로 개조하고 동서 회랑을 복랑으로 개조하였으며 기본적으로 일탑 삼금당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그림3. 참조).



4) 통일신라 가람배치


신라가 삼국통일을 성취한 후 불교는 더욱 융성한 발전을 하였다. 경주를 중심으로 감은사, 고선사, 불국사, 원원사, 감산사 등 여러 사찰이 창건되었고 그 외 경주를 벗어나 전국에 부석사, 해인사, 범어사 등 화엄 십찰을 비롯한 후반 통일말기에는 선종가람으로 실상사 , 보림사 등의 구산선문의 선종사찰이 전국의 명산 깊숙한 곳에 조영이 되면서 가람의 형식면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통일신라로 접어들면서 가람 배치의 변화는 금당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탑이 서는 일금당 쌍탑식을 보여준다. 교리적인 면에서 법화경에 의한 법화 사상의 확장과 그 구현으로 대웅전을 중심으로 쌍탑의 배치가 일반화되면서 불사리를 모신 탑보다 금당에 모신 불상이 신앙의 대상으로 더 강조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는 수많은 탑이 만들어지면서 불사리(佛舍利)의 수적 한계와 추상된 조형물보다 구체적 형상을 가진 불타상에 더 큰 매료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 중심 된 하나의 탑에서 쌍탑으로 분화되면서 탑이 갖는 상징성이 남고 실제적인 신앙의 대상으로는 불상이 강조되었다. 통일 직후에 만들어진 사천왕사, 감은사, 불국사 등은 일금당 쌍탑식 가람배치를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사천왕사지를 들 수 있다.


사천왕사지(사적8호)를 보면 신라 문무왕19년(679년) 때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창건했는데 현재 중문지, 동서 쌍탑지, 금당지, 경루와 종루지가 남아 있다. 중심 축선을 따라 남쪽 중앙에 중문지가 있고 그 안의 양쪽에 동서 탑지가 좌우 대칭으로 있고 그 안쪽 중앙에 금당지가 있다. 금당지를 중심으로 좌우에 경루와 종루지가 있고 금당지 중심선 끝에 강당지가 있으며 그리고 중문지에서 시작된 회랑이 강당좌우까지 긴 장방형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일금당 쌍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배치 형식은 일탑식 가람배치에서 전형적인 이탑식 가람배치로 발전되기 전인 중간단계의 배치 형식으로 보기도 한다(윤장섭, 1983, p. 102).


또 하나의 예로서 감은사지를 보면 통일의 주역인 문무왕의 유지를 받들어 신문왕이 완공한 것으로 높은 석축을 쌓아 평지를 만든 후 중문, 금당, 강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금당 앞 좌우 동서에 3층 석탑이 마주하도록 배치한 전형적인 쌍탑(이탑)식 가람이다. 그리고 불국사는 3개 영역으로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의 구역으로 나뉘며 대웅전 영역은 석가여래의 피안의 세계, 극락전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그리고 비로전 영역은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를 나타낸다. 한 가람 안에 여러 불전이 함께 조영한 예가 처음으로 나타나 불교 교단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즉 여러 교파의 신앙체계가 종합화되어 있어 종합적 성격을 지니는데, 법화신앙의 석가모니불, 화엄종의 비로자나불, 정토신앙의 아미타불, 현세구복적 성격의 관세음보살이 함께 한다.


전체적으로는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인 佛國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 중 중심영역은 대웅전 영역으로 청운교, 백운교와 중문(자하문), 금당(대웅전), 강당에 이르는 일직선의 축과 이를 둘러싼 회랑으로 구성되며 금당 앞마당에는 석가, 다보, 쌍탑이 마주하고 있어 전형적인 이탑식 가람배치를 보인다(그림4. 참조).


삼국통일을 계기로 경주를 벗어나 조영되는 가람의 예로 화엄십찰을 들 수 있는데 그중 부석사는 화엄종찰로서 문무왕16년(676) 義湘스님(625~702)에 의해 창건되었다.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 봉황산 중턱에 자리한 부석사는 산지가람의 전형이다. 부석사는 경사가 급한 봉황산 기슭에 봉황이 다소곳이 알을 품은 듯한 봉황포란형(임학섭, 1995, p. 138)으로 9단의 석축을 쌓아 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전각을 세웠기에 동선의 변화가 많고 역동적인 공간을 연출한다(그림5.참조).


창건후 여러 차례 변화를 하였지만 현재 일주문, 천왕문, 범종루, 안양루, 무량수전으로 이어지는 중심 축선과 그 밖으로 배치된 요사채, 보장각 등 여러 건물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부석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대표적 산지가람이지만 오늘날의 가람배치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정립된 것으로 보여진다. 부석사는 화엄사상과 정토사상이 함께 하지만 가람배치에서는 정토사상을 구현하고 있으며 자연의 조건을 최대한 살리면서 종교적 이념을 승화시키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 중심 종파인 의상의 화엄종은 지방으로 확산되어 전국에 걸쳐 화엄십찰이 만들어지는데 대부분 산지 가람의 모습이다. 화엄십찰의 가람배치는 하나의 정형화된 모습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부석사와 유사한 산지가람의 종심형의 절선축(折線軸)을 갖으면서 역동적인 공간적 성격을 가진다. 8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통일신라는 급속히 균열을 보이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새로운 사상인 선불교가 지방 호족의 후원으로 九山禪門으로 개창된다. 구산 선문의 선종사찰들은 쌍탑식 가람에서 그 지형적인 특색을 살린 가람배치를 이룬다.


구산 선문 중 제일 먼저 만들어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3년(828) 실상산문 홍척(洪陟)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1980년대 부분 발굴 후 드러난 금당의 기단지와 석등과 쌍탑으로 볼 때 실상사는 일금당 쌍탑식의 평지가람의 배치를 하고 있으며 현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데 황룡사 9층탑보다 큰 목탑지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구산선문 중 가장 융성했다고 하는 성주사는 금당지 앞에 중심 축선에 오층석탑이 있고 그 앞에 석등이 있으며 그 앞에 중문지가 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금당지 뒷마당 강당지 앞에 중앙 3층석탑과 동서 3층 석탑이 한 줄로 서있다. 대웅전 동편에는 삼천불전지가 자리 잡고 있다. 성주사지는 기존 백제 법왕 때 초창된 오합사에 통일신라 문성왕 때 당에서 귀국한 낭혜화상에 의해 중창이 이루어지면서 선종사찰로서 특이한 가람배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5) 고려의 가람배치


조선왕조가 유교로서 건국의 이념을 삼았다면 고려는 불교를 적극 활용하면서 건국했고 또한 국교로서 기능을 발휘하면서 초기부터 많은 사찰들을 창건하였다. 또한 풍수지리설을 적극 수용하면서 자연환경을 거슬리지 아니하면서 건축을 하도록 국가적 차원에서 배려하였다. 풍수지리설의 영향은 모든 가람이 자연지세에 어울리는 입지와 배치를 이루게 되어 산지에 많은 사찰을 경영하였다. 한편 개성을 중심으로 일탑식 쌍탑식 가람도 함께 창건되었다(김원룡, 1994,p. 401).


고려는 10세기 중반까지 지방 각지 호족들의 독립적인 지배세력이 잔존하고 있었다. 또 불교 사원들 역시 신라 이래의 독자성을 잃지 않고 있었던 점(대한 건축학회, 1996, p. 367)을 미루어 고려시대의 가람의 모습을 일괄하여 말하기 어렵지만 개경을 중심으로 활발한 불사가 이루어졌다.


사찰의 배치는 삼국시대의 삼금당 일탑식 가람배치와 남북국시대의 신라 쌍탑식 가람배치가 계승되었다.


변화된 것은 지금까지 금당으로 부르는 것은 대웅전(大雄殿)이라 하였으며 만세루(萬世樓)나 보제루(普濟樓)와 같은 이름의 누(樓)를 건립하고, 또 영산전(靈山殿), 응진전(應眞殿)과 같은 전각들과 토속신앙을 수용하기 위한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등을 건립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기능의 전각들이 건축되는 사찰은 자연히 기존의 일금당 쌍탑식 가람이나 삼금당 일탑식 가람의 배치와 다른 배치를 이루게 되었다(주남철, 1999, p. 283).


대부분 남북으로 긴 터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조계문, 해탈문, 불이문, 만세루와 같은 건물을 세우고 다시 넓은 대웅전 앞마당이 마련되고 이 마당에 석탑을 세우기도 한다.


또 이 마당 좌우에는 승려들이 참선하는 심검당(尋劒堂)과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승방이 건립된다. 이 마당보다 좀더 높은 터에 대웅전을 세운다. 그리고 대웅전 뒤쪽 높은 터에 산신각과 칠성각을 세운다. 한편 사찰과 떨어진 산중 깊은 곳에 암자를 짓는다(주남철, 1999, p. 283). 그러나 토속신앙이 불교와 습합되어 나타나는 여러 전각이나 조형물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은 고려시대가 아닌 조선중기이후에 일반화되고 있다(김현준, 1991, pp. 302-319 참조)고 한다. 필자 또한 공감하지만 여기에서는 상론하지 않는다.


고려시대 창건된 사찰은 도성인 개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지역에 주로 건립되었고 현재 남한에는 그 당시에 창건되어 현존하는 사찰은 드물다. 단지 중원 미륵사지와 남원 만복사지 그리고 청평사지 등이 있다. 초기 개경 주변에 세웠던 사찰 중 그 유적이 알려진 곳은 불일사이다.
현재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통일신라이래 직선 축선상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전형화된 전각 구성에 불규칙적인 회랑과 건물군이 함께 하는 배치를 하고 있다(대한건축학회, 1996, p. 367 참조).


남원 만복사지는 고려 문종 때 창건되었으며 남북 자오선을 중심 축으로 하여 남쪽에 중문, 그 다음 목조탑을 중앙에 두고, 목탑 좌우로 동금당과 서금당을 배치하고, 목탑 북쪽에 금당을 배치하였다(그림6.참조).


북한 개풍군에 소재 한 흥왕사지는 고려 문종 때 창건된 사찰로 2800여 칸의 대찰이었다. 그 중심영역은 금당 앞에 동서에 각각 하나의 탑이 선 일금당 쌍탑식 가람이다. 안동의 봉정사는 신라 신문왕 2년(682) 의상의 제자 능인대덕이 창건하였다고 하는 고찰로 현재 가람배치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만세루와 축을 같이 하는 대웅전과 화엄강당, 무량해회와 요사채로 이루어지는 승방(요사채)영역, 만세루에서부터 이들 영역까지 공통으로 도입부로서 동서로 길게 열려진 영역으로 구분되어 독특한 공간구성을 이룬다. 중심 영역은 진입축과 일치하는 대웅전 영역으로 이를 중심으로 극락전 영역과 승방영역이 서로 대치하고 있으며 극락전 앞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3층석탑이 있다(김원룡, 1984, p. 404). 고려시대의 가람배치는 앞에서 언급하듯 자연지형지세와 풍수도참사상 그리고 중기 이후 도교를 비롯한 토속의 여러 신앙이 습합하면서 다양한 부속 전각이 부가되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변하였고 탑은 가람의 중심에서 벗어났다.


6) 조선시대의 가람배치


조선은 유교의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우면서 숭유억불의 정책을 표방하였기에 전시대의 기득권을 유지해왔던 불교는 위기를 맞았다. 개국 초기부터 유생들은 불교 탄압에 앞장 서왔고 태종은 종파를 11종에서 7종으로, 세종은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였다.


왕실로부터 지원을 받는 몇몇 사찰을 제외하고 사찰건립이나 중건은 매우 위축되었고 기존 도성 내 사찰은 철폐되어 향교나 서원 등의 유교건축을 지을 때 그 부재로 사용되었다.


선종의 산지가람들만 그 명맥을 유지하면서 사회적 온갖 핍박 속에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야 했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휴정을 비롯한 승군들의 활약으로 불교의 위상은 조금 나아졌으나,승려들을 각종 공사에 동원하거나 여러 공산품을 만들어 관가나 유생에게 공급케 하는 등 하층신분으로 핍박이 조선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사찰들이 불탔고 그 이후 광해군에서부터 영?정조 때에 계속적인 중창 및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산지사찰들은 조선후기에 중창 및 재건 공사가 이루어진 것이 많은 데 이는 고려시대이래 가람배치와 구조를 계승하면서 부분적으로 때로는 전면적 개?보수되어 새로운 양식의 가람으로 바뀌었다. 가람구성은 고려중기 이후 도교나 민간신앙의 예배대상이 부분적으로 불교와 습합하면서 부불전으로 부속전각이 조영되어 지면서 복잡한 배치 양상을 낳았다. 토속신앙과 불교와의 만남은 조선중기이후에 가속화되면서 더욱 복잡한 전각구성을 하게된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오늘날 우리가 전국의 어디를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보편적인 산지 가람의 한 전형으로 조선후기에 이루어진 것이 많다.


이들 사찰들은 주불전 앞의 중정을 중심으로 정면 좌우에 문루와 승방과 주불전 좌우 뒤쪽으로 여러 부속불전, 요사채들이 들어서는 전형적인 산지형 가람의 통불교 가람으로 전시대의 가람배치에 비해 폐쇄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시된 탑은 작은 규모로 축소되어 금당 앞에 장식적 조형물로 서 있거나 아예 없는 무탑형(無塔型)의 가람으로 조영되었다. 특히 산지 가람의 경우 무탑형의 가람으로 하나의 불전과 하나의 영역을 갖는 형식이 일반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존의 사찰 중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을 통해 소실된 가람을 새롭게 중창, 보수하여 오늘에까지도 그 법등을 이어오고 있는데, 대표적 사찰 등에는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법주사 등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통도사는 삼보사찰의 하나인 불보사찰로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불사리를 모시고 와 사리탑을 세우면서 창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건하면서 사역은 동으로 확대되면서 각 영역에 동서축과 남북축이 직교되는 공간구성을 이루었다. 그 대부분의 건물은 조선시대 건립된 것이다. 배치는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긴 시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천왕문, 불이문, 대웅전의 건물이 한 영역이 되며, 각 영역내의 건물들은 진입축과 직교하도록 배치되었다. 즉 사찰의 가장 중심이 되는 대웅전 영역은 북쪽 금강계단과 인접되어 있어 동서로 이어지는 진입축과 직교하도록 배치되었다. 이렇게 진입과 예불의 축이 직교하는 것을 건축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중심 건물의 대웅전의 정면을 남과 동의 두 면으로 구성하여 진입할 때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게 유도하는 한편, 조형적으로 지붕의 형태가 T자형을 이루도록 하였다(상게서, p. 405, 그림7.참조).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스님이 창건하였다. 지금은 창건 당시 모습과 다른 산지 가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금정산 기슭으로 오르면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그리고 보제루를 거쳐 대웅전에 이른다. 보제루 좌우에 부속건물이 배치되고, 일주문에서 보제루까지는 약간 휘어지는 동선을 이루지만 보제루에서 대웅전까지는 엄격한 일직선 축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보제루와 대웅전은 높은 석축으로 경계를 이루어 계단에 올라서면 그 아래를 모두 내려다 볼 수 있게 된다.



3. 종파와 전각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의 가르침 그대로가 불교의 교리로서 또한 승려들의 수행의 지침이었지만 석존의 열반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교단이 분열되면서 상좌부, 대중부로 분열되었다. 여러 부파로 이루어진 불교를 部派불교(아비달마불교)라 하며 이때 경, 율, 논 삼장이 성립되고 기원전 100년경에는 약 20부파로 분열된 교단이 존재하였다. 부파의 전문화된 학문적 불교로부터 재가신자들을 중심으로 실천적 신앙운동이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이다. 대승불교는 석존의 가르침에 새로운 해석과 함께 새로운 경전의 출현과 더불어 보다 실천적 신앙운동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시대와 지역 그리고 계층에 의한 새로운 요구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신앙체계가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부파형성과 대승불교의 흥기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상이한 지역으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또 다른 형태의 불교가 만들어졌다. 대승불교는 북쪽의 실크로드를 따라 한 역 불교권인 중국, 한국, 일본과 티벳불교권의 티벳(몽고)으로 전파되었다. 북방 불교권에서는 불타의 일대시교(一代示敎)를 교학적으로 달리 해석하면서 다양한 교학이 이루어지고, 여기에 중국에서 선불교와 염불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정토신앙와 관련된 다양한 수행의 문을 세우면서 여러 종파의 정립을 보게 된다.


불교사의 전개과정에서 종파의 분화는 필연적이지만, 이는 지역과 국가에 따라 달리하였고,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종파발생과 흥기가 한국, 일본에 그대로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 나라의 종파는 대부분 중국불교와 연계되어 있으며, 크게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지지만 고려, 통일 신라,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선종보다 교종이 중심이 된다.


특히 통일신라시대는 화엄학이 융성하지만 다른 교학도 백화난만하게 피어나 가히 교학의 황금시대를 연출한다. 고려조의 주류적 종파로는 선종의 조계종, 교종의 천태종과 유가종 그리고 화엄종을 들 수 있다. 고려의 불교 종파는 조선시대에 영향을 미치며 특히 선종 중심의 교학을 합일하는 통불교적 사상이 두드러진다. 선불교는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이념 아래 언어와 무관한 실천적 수행으로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는 주장을 하면서도 교학적 세계와 깊은 연계성을 갖고 있다. 즉 선종인 조계종은 선을 중심으로 화엄경을, 교종인 天台宗은 法華經(사상)중심에서 선을 포섭하고 있다.


불교 수용 직후의 초기 불교는 교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불교학 가운데도 戒律學, 三論學, 華嚴學으로 옮아가면 정치세력과 밀착하면서 주로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불교문화를 활성화하였는데 사찰의 조영에도 영향을 미쳐서 가람배치는 평지를 중심으로 정형화된 구성을 하게 된다.


미타신앙(미타사), 미륵신앙(미륵사) 그리고 戒律, 持戒신앙(戒律宗, 통도사)등은 또 다른 신앙체계와 연계되어지면서 가람배치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통일신라에 접어들어서 다양한 교학이 융성하면서 원효, 의상, 명랑, 경흥, 태현, 무상, 원측, 진표, 도의, 무염, 순지, 범일, 도선, 도윤 등 여러 고승 석덕들을 배출하면서 특색 있는 종파가 나타나고 학문적으로 성숙하였다. 불교학의 다양한 모습은 사찰의 배치에도 일금당 일탑식에서 일금당 쌍탑식이 유행하게 되고 변방에서 산지가람이 경영되기도 한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4대 종파인 화엄종, 유가종, 천태종, 조계종의 성립을 보게 된다. 이들 사대종파는 한국불교의 실질적인 내용을 모두 포함했으며, 종파의 구별이 없어진 조선 초에도 깊은 전통으로 남게 된다. 특히 종파별로 뚜렷이 구별되는 소속 사원을 갖게돼, 사찰건축도 종파별로 다른 형식을 갖게 된다 (김영태, 1986, pp. 64-65; 김봉렬, 1989, p. 13 재인용). 4대 종파의 성립은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 개창으로 시작됐지만 서로 간의 회통 노력도 있어 왔다. 義天의 天台宗은 法華사상을 교학적 바탕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止觀法을 실현하는 선종적 성격을 지닌 교종이다. 修禪社라는 신앙결사운동으로 조계종을 개창한 보조국사는 화엄학에 뿌리 두면서 선종과 교종의 합일을 주창했다.


신라시대에는 화엄?법상?계율?선종 등 많은 종파가 성립했고 고려시대에는 이를 계승했다. 그러나 ‘五敎兩宗’이라는 말이 고려중엽에서 이조초기에 걸쳐 ≪고려사≫나 ≪조선왕조 실록≫에서 볼 수 있지만, 이 말의 내용이 확실치 않다. ‘五敎’란 계율종, 법상종, 법성종, 원융종, 천태종이며, ‘兩宗’이란 禪寂宗?조계종이라고 하는 설이 있고 또한 조계종과 천태종이라고 하는 설이 있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 태종6년(1406) 폐불 이전에는 조계종, 총지종, 천태소지종, 천태법사종, 화엄종, 도문종, 자은종, 중도종, 신인종, 남산종, 시흥종등 11종이 있었다고 하며, 그것들을 모두 통합해서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남산종, 시흥종 등 7종으로 만들었다(태종실록)고 하는 기록에서, 조선의 7종을 고려시대의 5교 양종에 비교해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가마타 시게오, 1998, pp. 163-164).


가마타 시게오는 ‘오교양종은 당시 종파명칭이기보다, 당시 불교 전체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 것이며, 개별적 종파의 이름은 당시 불교학 분류라 한다(상게서, p. 164). 고려시대의 교종의 대표는 의천에 의해 확립된 천태종이며 선종의 대표는 지눌이 개창한 조계종이다. 천태사상은 신라시대 전해졌지만 종파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고려에 천태교학이 융성하게 된 것은 諦觀(~960~)때이며, 그후 대각국사 의천이 해동 천태종 개조라 할 수 있으며 그 뒤 천태종을 확산한 이는 백련 결사를 주도한 圓妙국사 了世(1163-1245)이다.


그리고 華嚴宗은 후백제 견휜의 지지를 받은 觀惠와 고려 태조의 지지를 받았던 希郞으로 전자를 남악 화엄사 관혜의 문하를 남악파, 북악 희랑의 계통을 북악파라 한다. 광종 때 均如가 나타나 양파의 모순을 통일하여 화엄종을 통일하였다. 고려의 법상종 계통은 그 계통이 불확실하다(상게서, p. 174). 한편 선종의 발달은 지눌에 의해 독자적 조선조의 방향을 결정하고 후일 조계종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기의 선교 양종 竝存期와 후기의 통불교로 나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조선조의 정치적 이념에 따라 철저하게 억압되었다. 몇 몇 왕의 개인적 호불이 있었지만 전 왕조에 걸쳐 제도적으로 억제되었다. 전국의 사찰은 통폐합되었고 승려에게 권한을 주어진 게 없고 갖가지 노력의 의무만 주어졌다.


조선조 초 11종이었던 종파는 1406년에 7종 242사로 축소 통합되며, 1424년에는 다시 禪宗과 敎宗의 양종으로 통합된다. 이때 전국 사찰은 공인된 36사만 남고 대부분 강제적으로 소멸하게 된다<표1. 조선 초 종파의 통폐합과정 참조>.


표1 조선 초 종파의 통폐합 과정

?宗派系列      ?11宗               ?7宗(1406)    ?兩宗(1424)    ?無宗(1507)

修禪社系      曹溪宗              曹溪宗

白蓮結社系   天台疏子宗

義天系         法事宗              天台宗           禪宗

眞言密敎      總持宗

戒律學         南山宗              總南宗                    兩宗폐지

華嚴學         華嚴宗              華嚴宗

  ?              道門宗                                  敎宗

瑜伽學         慈恩宗              慈恩宗

三論學         中道宗              中神宗

密敎系         神印綜

淨土系         始興宗              始興宗


(표출처:김봉렬, 1989, p. 18)



이와 같이 통폐합의 결과 형성된 通佛敎는 특정한 주도적 신앙에 의해 통일된 종파가 아니라 모든 신앙 형태와 종파가 뒤섞인 無宗派의 불교였다. 그러나 선종이 시대적 주류를 이루었고 교학적 배경은 화엄학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김영태, 1986, p. 167).


조선후기에는 특정한 종파나 사상의 흐름을 형성하기보다 지금까지의 종파가 회통하여 통합된 종합불교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1600년을 통한 우리 나라 불교의 역사적 전통의 특수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통불교라 할 수 있다. 선을 대표하는 실천행과 화엄이나 천태 등의 치밀한 교학이론의 종합과 조화를 추구하였던 한국 불교는 원효에 의해 통불교적 기틀이 마련되고 고려시대 보조 지눌의 ‘定慧雙修論’, 조선시대 휴정의 ‘敎禪一致’로 통불교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최남선은 ≪朝鮮佛敎≫에서 평하기를 “인도 및 서역의 서론적 불교와 지나의 각론적 불교에 대해 조선에서는 결론적 불교를 건립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특히 원효의 통불교적 사상에 입각하여 평한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 23권, 1991, p. 222).


원효의 통불교사상은 의천에게서 교에 의한 선을 포섭융합하고 그후 지눌은 선에 의한 교를 포섭하여 선교합일로 통불교 운동을 제시하였고, 조선 태종 때 11종을 7종으로 세종은 7종을 다시 선?교양종으로 만들고 휴정은 교종마저 선종으로 통합하면서 單一종파의 불교가 되 오늘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禪?敎의 모든 것이 응집되어 있어 계율신앙, 밀교, 정토신앙, 화엄신앙, 천태?법화신앙, 관음신앙, 약사신앙, 미륵신앙, 선불교 등 다양한 것이 그 복선에 깔려 있다. 이렇게 무종파의 통불교가 되기까지 강제적 통폐합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은 우리 고유의 회통하는 한국적 사유세계가 바탕에 있고 또한 건축을 중심으로 불교의 문화 속에 내면의 풍요로움을 간직하는 토양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 가람구조에서 화엄교학과 선불교(선종)를 중심으로 통불교의 가람배치와 전각구성 조형물이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통불교계 사찰의 신앙별 전각을 살펴보면 법화신앙의 전각으로 대웅전, 영산전, 팔상전, 나한전, 응진전, 관음전 등은 들 수 있는데 이중 관음전은 관음신앙으로 독립시켜 설명할 수 있지만 관음신앙은 법화경 보문품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에 마땅히 법화신앙으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화엄신앙의 전각으로는 대적광전, 화엄전, 비로전, 문수전 등을 들 수 있고 정토신앙의 전각으로는 극락전, 미타전, 명부전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관음전도 포함시킬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관음보살이 아미타불의 협시불이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은 인기가 있어 언제나 많은 사람이 따르고 또한 석가모니불의 협시를 하기도 한다. 다르게는 내세기복신앙의 전각으로 극락전, 명부전, 용화전 등을 들 수 있으며 반대로 현실구복신앙의 전각으로 약사전과 관음전 그리고 칠성각이나 삼성각, 산신각 등을 들 수 있고 토속신앙의 형태의 산신각, 칠성각, 삼성각 등도 포함될 수 있다. 그리고 조사(숭배)신앙으로 진영각(조사각, 영각)을 들 수 있다.


통불교계 사찰을 중심으로 신앙별로 관련전각을 정리해 <표2. 통불교계 사찰의 신앙별 전각의 구성. 참조>보았으나 관음전처럼 한 전각이 하나의 신앙만 갖는 것이 아닌 복합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표 2> 통불교계 사찰의 신앙별 전각구성



이것은 우리 불교가 갖는 이중적이고 통합적인 성격이라 하겠다. 불교에는 自力신앙과 他力신앙이 함께 하는데 예를 들어 통불교가 禪중심의 敎를 통합하였다. 통불교의 승려들은 선중심이 자력신앙 체계를 이루지만, 일반신자에겐 염불등 정토신앙, 관음신앙등 타력신앙이 보편화되어 있다. 한국불교에서는 하나의 신앙 안에 여러 성격이 공존하고 있으며 다양한 신앙형태를한 가람 속의 여러 전각을 통해서 볼 수 있다.



4. 종파에 따른 사찰유형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특정 종파의 색깔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점차적으로 교학의 발달과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경전과 종파가 소개되면서 새로운 종파가 형성되고 사원의 건립에 있어서도 그 宗旨를 구현하기 위한 가람배치나 조형물을 만들었으리라 추측이 된다. 그러나 초창 당시의 종파나 종지나 오랜 시간 속에 유지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역사적 변화과정에서 처음의 종지를 버리고 다른 종파로 옮아가는 경우도 있어 문헌적 기록과 현재 남아있는 건축과 조형물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 사찰건축을 비롯한 불교 미술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문헌적 기록 보다 오히려 건축과 조형물이 보다 정확한 진실을 보여준다. 즉 가람배치, 주불전과 부불전의 관계, 전각 내 불단설치와 존상, 탱화 불전의 편액 그리고 신앙의례문 등의 관계 등을 살피면서 한 사찰이 종파와 종지 등 신앙체계의 흐름을 살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속리산 법주사는 금산사와 더불어 우리 나라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가람배치(그림8. 참조)는 금강문에서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중심 축선과 주불은 비로자나불을 모시고도 대웅보전의 편액을 내세우거나 그 외의 여러 부불전을 모습 속에는 조선조 통불교 전통이 강화된 화엄교학의 색채를 많이 띄고 있다. 창건 이래 법상종 중심의 미륵신앙의 체계가 근대에 사찰정비과정에서 석연지, 가섭존자(희견보살), 팔상전, 석등, 미륵전(산호전)으로 이어졌던 용화세계의 중심 축선의 전통적 신앙체계가 큰 변화가 있었다. 즉 화엄신앙과 미륵신앙이 상즉상입하면서 원융무애함을 기저로 삼았던 가람배치가 청동대불의 건립으로 인하여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화엄신앙과 미륵하생신앙이 직교하던 균형 잡힌 질서가 무너지고 대웅보전, 팔상전, 천황문을 축으로 하는 화엄적 세계가 강화되었다. 전통적 기본축에서 벗어난 청동대불은 전체의 구조 속에 유기적 공간을 창출하지 못하고 하나의 거대한 기념 조형물로서 법주사의 상징으로 솟아 있을 뿐이다(최현각외. 1999, pp.44-55참조). 그리고 태백산(봉황산)부석사는 산지가람으로서 전체의 배치 축은 서남향을 하고 있으나 무량수전만은 방향을 바꾸어 남향을 하도록 하였다(장경호, 1992, p. 180). 중심축선은 일직선상에서 진입로와 범종루의 축이 꺾이는 절선축(折線軸)을 이루고 있다. 또한 화엄종 종찰이면서 전체적 가람구성은 화엄종이 갖는 신앙체계보다 정토계 아미타불의 法相宗을 따르고 있어 화엄종 사찰로서의 신앙체계의 일관성이 매우 의심스럽다. 물론 화엄사상으로 부석사의 공간구조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정토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에 비해 억지스럽다(김봉렬, 1995, pp.67-71 참조, 본 논문Ⅲ. 2.2,참조).


사찰 건축을 통한 신앙체계의 유형 파악은 창건당시의 종파, 가람배치, 전각구성, 신앙의례 등의 여러 부분을 전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탑제와 전각과의 관계, 주불전수와 위치,축성(軸性)의 성격과 동선의 변화, 현재 상황과 역사적 자료가 제시하는 문헌적, 도상적 자료와 신앙의례문등을 통하여 비교하여야 한다.


우리 나라 사찰건축의 구성형식은 탑제(塔制), 입지조건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탑의 수를 기준으로 단탑식, 쌍탑식, 이들 탑제에 맞지 않는 대상을 자유식으로 분류하고 또 입지조건에 따라 평지형, 산지형의 분류도 있고, 탑의 수와 존재유무에 따라 일탑식, 이탑식, 무탑식의 분류를 하기도 한다. 입지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直交型), 자유형 등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정인국,1978, p. 137, 일지사) 선축형(線軸型), 직교축형(直交軸型), 병렬축형(竝列軸型)으로 나누기도 한다(안영배, 1980, p. 71). 또한 금당수에 따른 단수금당제, 복수금당제로 분류하고 또한 전각의 구성 개념을 중심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건축을 공간적 관점에서 분류할 때 축선의 성질이다. 건축을 조직화하고 통일성과 질서를 유지하는 축은 진입축과 구성축의 두 범주로 나눈다.


진입축은 출입의 능선을 유도하는 행위적 축으로 종교 건축에 있어서 속계(俗界)와 성계(聖界)의 본질적 세계를 연결해 주고, 종교적 공간감을 고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진입축과 관련된 진입방식을 안영배는 점승(漸昇,gradual rising), 심공형(深攻型, through the long confined space), 문루 진입(門樓進入, through the confined space), 우각 진입(隅角進入, tangential), 도교(渡橋, over the bridge)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상게서, p. 75). 구성축은 건축의 여러 부분을 체계화하여 전각의 위치와 방향을 정하는 건물의 배치와 전체적 구성에 관계된다.


여러 동의 건물군으로 구성되는 사찰건축은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축에 의해 건물 상호간 연계성을 이루기에 축의 발견과 이해는 건축감상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보다 규모가 큰 사찰의 경우 하나의 축으로 보기보다 진입축과 구성축이 서로 보완적 작용을 하면서 전체를 완성한다. 사찰의 구성축은 건물간 공간의 구조와 동선의 이동을 통하여 건물간의 만남을 통하여 각 건물의 위계가 설정된다. 구성축을 안영배는 직선축형, 곡선축형, 단선(段線)축형, 직교축형, 병렬축형으로 분류하고(상게서, pp. 70-75, 그림 9. 참조) 김봉렬은 그 유형으로 重軸型, 交軸型, 竝列軸型으로 분류하는데 중축형은 사찰구성의 기본이며 단일불전- 단일영역에는 예외 없이 적용된다. 또 비록 그 영역형이라도 공주 신원사 같이 여러 영역이 떨어져 있는 경우에도 각 영역의 축성에 따라 중축형으로 분류 할 수 있다. 교축형은 백양사의 대웅전과 극락전같이 거의 대등한 2개의 불전을, 혹은 2개의 영역을 결합하는 방법이다. 병렬축형은 안성 칠장사, 공주 마곡사와 같이 다수의 영역이 각각 중심축에 의해 나란히 배열된 경우를 말하며 하나의 중축형보다는 대등한 영역성을 확보하지만 교축형 구성에 비해서는 영역 위계의 차등성이 생기게 된다.


금당의 수를 기준 삼을 수 있는 것은 사찰의 종교적 성격을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분류 기준이 될 수 있다. 단일 신앙체계를 가진 사찰은 단일불전형이고 종합적 신앙체계를 가진 사찰은 복수 금당제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금당의 수는 영역의 수나 축성(軸性)을 결정하는 변수이기 때문에 그 중요도는 더욱 높다(김봉렬, 1989, pp. 50-51).


탑에 대해서는 단탑(單塔), 쌍탑(?塔)이냐 그리고 전각과의 관계를 어떻게 갖느냐 불전의 종류와 수는 해당사찰의 신앙형태나 신앙체계를 엿볼 수 있으며 특히 조선 중기 이후의 무종파의 통불교 체제에서 개창 당시의 종지나 종파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도 있는 것이다. 불전중 주불전은 신앙적 위계뿐만 아니라, 건축적 위계도 최상, 최고이며 나머지 부불전의 위계도 건축규모, 공간적 위상을 중심 주불전과의 관계 속에서 그 위계가 결정된다.


김봉렬은 신앙의 체계별로 사찰 건축을 미타계, 미륵계, 화엄계, 법화계, 통불교계로 분류하고 각 형식별로 보편적 건축구성의 성격이 있으며 각 유형에서 특징적 경향성은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표3, 신앙체계와 사찰구성유형 참조>. 신앙체계에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분포하는 無塔型, 一殿型, 1영역형, 중축형의 유형을 제외한다면 사찰 형식의 특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미타계 사찰의 공간 성격은 무탑형, 二殿型, 2영역형, 병렬축형으로 특징지워지며, 무탑형은 구원의 부처인 아미타불이 열반에 들지 않아 舍利塔이 있을 수 없는 교리적 배경을 갖고 있다.


미륵계 사찰은 단탑-2전-1영역-교축형으로 특징 지울 수 있다. 미타계와 같은 법상종 (혹은 유가종)에 뿌리를 두지만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사리탑이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화엄계 사찰은 단탑형이 압도적이며 적어도 하나의 탑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소위 일탑 가람제이며 多領域型의 구성을 수반하게 된다.


법화계 사찰 특성은 쌍탑 가람제에서 두드러진다. 법화신앙의 소의 경전인 법화경에서 석가여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출현한 多?여래가 상주하는 다보탑의 존재가 석가탑과 함께 쌍탑 구성을 하게 된다. 이 계열의 사찰들이 多佛殿?多영역으로 구성되고, 나말 여초에 형성된 구산선문이래 주로 本山系의 대규모 사찰로 경영되어온 까닭이다.


통불교계 사찰의 유형은 무탑(無塔)-일전(一殿)-일영역(一領域)-중축형(重軸型)의 비교적 단순한 형식으로서 조선기 사찰의 대표적 유형이다. 여기에는 미타계열의 사찰과 같이 특정교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어려우며, 보다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상게서. P. 70).


 17세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은 종파계 사찰 구성 형식이 주류를 이루고 그 이후는 통불교계 구성 방식이 주도적이었다고 하나, 그 가운데 17세기 이전의 종파적 성격이 잠재하고 있어 당시 신앙체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사찰의 신앙체계를 분류하면 전반적으로 통불교적 구성체계를 갖는 것이 많고 그 다음이 미타신앙, 화엄신앙 등의 체계를 갖는다(상게서, pp. 71-74, 표 3-5사찰 구성형식의 분류 참조). 각 신앙 계열이나 체계마다 고유한 건축적 구성형식을 갖으면서 가람배치에서 나름의 독자적인 사상 배경을 형성하고 있다.


미타계 사찰에서의 독립적인 영역성은 미타신앙의 정토주의와 관계 있으며, 미륵계 사찰에서 강조되는 축성(軸性)은 유가학의 계율주의와, 화엄계 사찰의 단탑형 구성은 화엄사상의 핵심인 중심성과 법화계사찰의 쌍탑가람제는 법화경의 다보신앙과 각각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인다(상게서, p. 70).


교리적 차원에서 신앙 체계별 유형과 고유한 건축구성형식의 연계성을 밝히는 것은 사원 건축 연구에 중요한 과제이며, 사찰을 통한 불교문화와 건축이해?감상의 기저를 이룬다. 신앙체계에 따른 사찰의 유형을 사찰 건축의 여러 구성 요소, 예컨데 탑제, 주불전수, 영역수, 축성, 전각내의 불단 구성과 조형물들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고 그 신앙의 사상적 근거를 해석하는 것은 사찰건축의 이해와 감상에서 매우 중요하다.


17세기 이후 통불교적 사찰은 무탑-일불전-1영역-중축형의 건축적 특성을 갖는다<표3참조>. 또한 현존하는 사찰 중 종파적 구성형식이 대체로 다불전형 중-다영역형인 이유는 조선시대의 통불교적 성격을 수용해 타신앙체계를 습합한데 있다.



<표 3> 신앙체계와 사찰구성 유형

(표출처:김봉렬, 1989, p. 68)


조선조 사찰건축의 종파적 형식을 교리에 의해 구체적으로 건축적 특성을 기술하면 미륵신앙계 사찰은 극락 정토 신앙에 사상적 근거를 둔다. 통일신라초기 사찰인 부석사는 경전의 내용에 따라 극락의 형상을 건축적으로 재현하고 있으며, 정토의 개념이 건축적인 영역성으로 나타난다.


불국사, 봉정사 등에서는 현실 세계와 극락세계의 이원적 개념을 대웅전 영역과 극락전 영역의 병렬 배치로 표현했고, 조선후기의 미륵 사찰에도 이러한 종파적 전통은 잔존해서, 대웅-극락전의 두 영역을 별원방식으로 분리했다.


미륵신앙계 사찰의 사상적 근거는 계율주의와 미륵하생신앙에 있다. 초기 사찰인 익산 미륵사는 미륵하생신앙의 용화삼회설에 따라 삼원(三院)으로 구성했으며, 엄격한 계율주의는 당-탑의 중축형 구성이라는 고대 사찰의 규범화에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미륵대원, 관촉사는 석등-석탑-미륵불상으로 이루어지는 축을 중심으로 사찰이 구성되며, 금산사나 법주사와 같은 2불전형에서는 화엄신앙의 축과 미륵하생의 두 축이 직교하는 교축형의 구성을 이룬다. 계율주의는 강렬한 축성으로, 하생신앙은 시간적 차이를 내포하는 교축형으로 형상화되었다.


화엄신앙계 사찰은 전체와 부분의 결합, 전 우주적인 질서라는 화엄사상을 구현한다. 이 형식은 가람 내의 모든 전각을 조직화하고 통일화하려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다른 형식에 비해 건축적인 중심성이 강조된다.


화엄계 사찰은 조선 초까지 단탑제 형식을 고수해 탑이라는 강한 중심체를 설정했고, 화엄 선종의 사찰에는 법왕문(法王門)이라는 산문(山門)을, 조선중기의 다불전형 사찰은 대적광전이라는 전각의 위치를 중심으로 가람을 구성했다(상게서, p. 174).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면서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을 협시불로, 문수보살?보현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기에 그만큼 한 공간에 여러 성격의 불보살이 함께 자리하기에 종합적?통불교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현재 전통사찰이라 일컫는 사찰은 조선중기이후에 중창 내지 재건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전각의 배치는 불단, 보살단, 신중단으로 그 위계적 질서가 확립되어 있다.


조선시대 사찰의 보편형인 통불교계 사찰의 전각들은 불단-보살단-신중단의 삼단으로 뚜렷이 위계화 되며, 법화 신앙에 기반을 둔 대웅전과 영산전, 민간 신앙적인 명부전과 산신각이 특히 선호됐다. 중심 영역은 대웅전 앞 중정을 중심으로 좌측에 선방, 우측에 강당, 전면에 누각을 배치함으로써 불-법-승의 삼보가 하나로 통합되는 최고의 위계를 가진 공간으로 볼 수 있다.


통불교계 사찰은 조선후기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역사를 벌일 수밖에 없었고, 가장 먼저 중심 불단 영역을 조성한 후 순차적으로 보살단의 전각을 그후에 신중단의 전각을 이루어, 각 단 간의 신앙 건축적 위계가 뚜렷이 나타난다. 통불교계 사찰의 구성형식은 중심 불단을 보살단 영역과 신중단 영역이 겹으로 둘러싸는 개념적인 동심원상의 구조를 이룬다(그림 10. 참조). 각단의 영역은 중심에서의 상대적 거리, 지형적 높이차, 전각의 정면성 여부로 구획된다(그림 11.참조).


이러한 구성은 교리적 위계와 신앙 행위의 질서, 그리고 당시 불교세의 한계적 상황을 고려한 형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복합 신앙의 사찰마저도 종파적 형식이 아닌 통불교적 형식을 수용했고, 각 사찰의 개별적 신앙의 고유성은 약화된 부속전각의 존재로만 유지되어 통불교적 형식이 당시의 보편적인 형식임을 입증한다(상게서, p. 175). 통불교적 형식에서 개별 종파의 성격이 약화되었지만 그 속에 그 고유성이 잔존하고 있다. 이는 주불전을 중심으로 부속전각 속의 불단 구분에 의해 모셔진 존상과 탱화와 신앙의례 등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전체적인 신앙체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보편적인 통불교의 가람배치는 보편적인 3단 구성의 동심원 구조로 불교적 세계관과 교리체계에 맞추어진 구성형식으로 외부적으로는 당시 정치?사회적 체계와 자연환경에 순응하면서도 조형정신면에서는 불교의 신앙체계가 잘 표현되어 있다.



5. 전각의 구성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만든 이와 만든 시대의 정신이 깃들여져 있다. 그리고 건물이 갖는 성격에 따라 사상적 배경을 달리 한다. 사찰건축은 불교라는 종교 건축이기에 불교의 종교적 세계를 간직하고 있기에 불교의 교리 체계에 의하여 건축의 배치와 구조를 살펴보아야 한다.


불교는 그 교리적 사상체계로는 생명 있는 모든 존재를 평등으로 인식한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에서 일체중생본래불(一切衆生本來佛)이라는 말에 이르기까지 생명 가진 모든 존재는 모두 더없이 귀한 존재로서 그 근원에서는 차별이 없고 장중하기 그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성품상에서 본 일체 존재의 실상이고 현상계로는 귀하고 귀하지 않는 차별상이 존재하면서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의 다리는 짧은 개체의 고유성을 인정한다. 즉 부처는 깨달음을 얻어 미혹의 세계를 벗어나 中道實相의 세계로 보지만 중생은 집착과 편견에 사로잡혀 존재하는 실상을 왜곡시켜 본다. 스스로의 경험에 한정한 깜양대로의 지견과 앎의 세계 속에 보는 이마다 각양각색의 이미지를 만들고 해석한다.


불교의 세계는 10계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불에 이르는 그 위계를 설정하고 지옥에서 인간까지는 속계이며 여기 천상까지는 六道라 하여 업의 지배가 받는 윤회의 세계이며, 성문부터 불(佛)까지는 4성계(四聖界)로 이르는 願力往生하는 세계이다.


이것이 가람(사찰)에 적용되어 질때는 인간을 정점으로 하여 그 아래는 속세이고 천상에 불의 세계는 성계(聖界)로서 깨달음 세계로 볼 수 있다. 이는 사찰을 불교가 생각하는 이상세계를 실현한 곳으로 일주문에서 주불전(대웅전)에 이른 과정이 정각의 세계로 들어가 궁극에서는 부처가 되는 것을 전제하여 구성되어 있다. 불교신자가 대웅전에서 좌정한 불상을 예경할 때, 그 불상은 수미단이라는 불단에 모셔져 있다.


수미단은 수미산의 꼭대기로 도솔천이다. 이는 지상이 아닌 천상의 세계 그것을 욕계 육천의 하나로 칠보로된 궁전이 있고 그 중 내원에는 미륵보살의 정토이다. 즉 중심불전(대웅전)은 불교의 이상적 세계로 표현된 하늘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그 곳에 계신 부처님에게 예배하는 사람 또한 하늘나라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은 수행의 공간으로 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이상적 과정을 구현해 놓고 있다. 사찰은 불교 신자들의 정진을 위한 수행과 교화의 공간이기에 어디까지나 미혹의 중생분상에서 점진적인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건축적 구조로 계획하고 만들어진 것이다. 사찰공간구조와 전각의 배치 그리고 건물의 위상 등은 불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당시 신앙체계, 종파사상이나 사회적 상황이나 시대정신을 배려하여 해석하여야 한다.


오늘날 전통사찰로 알려진 대부분의 사찰들은 산지가람의 형태이며 시대적으로 조선시대 그것도 임진왜란이후에 중건한 건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전쟁 후 궁핍할 때도 궁핍한 사회적 상황에서 전시대 건축물은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은 큰 어려움이 따랐지만 당시 승려들은 가람수호의 열정과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위해 가일층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불교의 다양한 교파나 종파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 그 원형적 모습을 역사 속에 고스란히 유지 발전해온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역사의 변동기에 새로운 사상과 시대 상황으로 인해 초기창건 이념이 퇴색되거나 변색하면서 가람배치나 구조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조선조는 전시대 고려와 다른 儒敎를 통치이념으로 건국하였고 또한 불교가 가졌던 사상, 문화나 사회적 기득권을 부정하거나 빼앗고자 하면서 기존의 불교종파를 강제적으로 통폐합시키고 말살시키려는 정책을 진행시켜 왔다. 이런 까닭으로 전통가람의 종파적 색채를 찾아내고 그 계통적 흐름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기는 어렵다. 사찰의 종파적 색채는 16세기 이전이며, 17세기 이후에는 통불교적 색채가 강화되었다. 우리가 전통사찰에서 볼 수 있는 예들은 통불교 중심의 사찰이 대부분이면서 전시대의 종파적 색채가 잔존하고 있어 유심히 살펴보면 그 본래적 모습을 상상 복원해 볼 수 있다. 오늘날 불교의 현황은 선불교인 조계종과 태고종이 주류를 이루고 특히 전통가람은 전각과 조형물의 구성형식을 통하여 신앙 체계의 유형을 살필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사찰들은 똑같은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그러나 그 유형을 정리하면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입지 조건에 따라 산지형, 평지형, 구릉형등으로 분류한다. 탑을 중심으로는 일금당 단탑(一塔), 일금당 쌍탑(雙塔), 일금당 무탑(無塔), 다금당 다탑(多金堂, 多塔)의 분류와 불전을 중심으로 일불전(一佛殿), 이불전, 다불전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영역에 의한 분류는 1영역, 2영역 그리고 다영역이냐 종파에 의한 분류로 선종이냐 교종이냐 법화계, 화엄계, 미타계, 미륵계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축형(軸型)에 따라 병렬축형, 교축형, 중축형 등의 분류 등 여러 시각에 따라 그 유형을 앞에서 정리하였다.



먼저 사찰은 불교의 세계를 표현하였기에 여기에는 신앙의 위계가 존재한다.


즉 10계에서 불(佛)의 세계를 정상으로 하여 그 아래가 보살계 등 연이어 존재하는데 사찰의 구조에서도 속계, 천상계 깨달음의 세계로 구분하면서 속계는 일주문을 경계로 나뉘고, 천계는 천왕문을 경계로, 깨달음의 세계는 聖界로 불이문이나 누각을 경계로 불보살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그림 12,13 참조).


이것은 속계, 미혹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한 발심 수행자가 점점 그 중심부인 부처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그 속에 배치되어 있는 전각 구성은 가운데 중심 불전에서 동심원 구조로 점점 밖으로 확산되면서, 그 중요도는 약화되고 전각의 크기나 장엄의 정도도 점점 빈약하게 된다.


한국의 사찰은 한국불교가 갖는 통불교적 성격이 그러하듯 다양한 종류의 전각을 구성한다. 수행자들이나 불교신자들에게 신행 활동을 위한 예배용 전각, 修禪, 念佛, 참회, 설법을 위한 수행용 건물 그리고 승려나 신도의 주거를 위한 생활공간들로 이루어진다. 예배용 전각은 주신앙의 대상을 무엇으로 하느냐의 문제로 그 사찰의 성격 즉 종파와 연계된다. 그리고 수행용 건물은 수행자들이 어떤 수행의 방법을 택하느냐에 의해 성격을 달리한 건물이 지어지기에 이 역시 해당사찰의 종파와 이에 따른 수행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주거용 생활공간은 승려와 신도들의 주거 생활의 편의와 합리적 기능을 위해 구성되며 당시 시대적 상황과도 연계되어 진다.


신앙의 대상은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여러 불보살, 성문, 연각, 역대조사 선지식과 신중에 이르기까지 그 위계와 체계를 갖으면서 그에 따른 경전, 미륵 등 신앙체계가 있다. 거기에는 전통적 불교 본래의 모습에서 중국이나 한국에 이르는 특유한 지역성이 반영된 부분도 있다. 주불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체계는 엄격한 체계에 의하여 전체 가람의 전각이 구성되어 진다(그림 10. 참조).


그 신앙의 체계는 불교의 세계관에 의해 구성되어 지는데 육도(六道)의 윤회의 세계와 불보살의 깨달음의 세계로 대별되면서 모든 중생들이 불보살이 머무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길 바램 하는 구조로 짜여지게 된다(그림 12. 참조).


사찰은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저 언덕(피안)으로 나아가는 공간구조로 그 개념이 설정되기에 불보살을 위시한 성인들을 예배 공경하는 공간과 여러 선지식들과 함께 수행하는 수행공간이 필요하며 또한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는 주거공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여기에 직접적인 예배공경의 대상은 아니지만 수행자들이 의지하는 여러 신들을 사찰경내에 모시게 되는데 이는 불교의 핵심적 요소라기보다 주변적이고 종속적 요소로 자리한다. 이 신앙의 체계를 3단계로 구분하는데 분류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상단, 중단, 하단으로 구성한다.



전각구성은 상단, 중단, 하단으로 구분할 때


상단을 주요불전으로 대웅전, 대적광전, 극락전, 약사전, 보광전과 보살단의 원통전 등이며,


중단은 보살단으로 관음전, 문수전, 명부전 등과 영산전, 천불전, 나한전 등의 불전이 포함된다.


그리고 하단은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 천왕문 등 토속적 신앙과 신중단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보살전이면서 상단에 들어가는 원통전과 불전이면서 중단에 들어가는 영산전(팔상전)은 우리 나라 신앙체계상 그 중요도와 차이에 따라 그렇게 분류한다<표4. 전각과 조형물 참조>.


그리고 학자에 따라 상단, 중단, 하단의 분류는 그 견해를 달리한다. 여러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는 큰 사찰의 경우 전각마다 그 성격을 달리한다. 주불전내에서 또다시 상단, 중단, 하단으로 구분하여 그 위계를 정한다.


 일반적으로 중앙(남향)이 상단(불?보살단)이 되고 왼쪽 (동향)이 중단(신중단)이 되고 오른쪽 (서향)이 하단(영가단)이 된다.


표4 전각과 조형물에서 상단, 중단, 하단의 구분은 건축적 위계로 이어져 건물의 격과 구조, 형식, 규모 등에서 큰 차이를 보여 주기에 보다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상단의 주불전은 규모가 크고 다포식이나 주심포 등의 포작집인데 비해 중단하단의 보살전은 건물은 규모가 작거나 포집 이래도 단순한 포로서 익공계가 많다.


그리고 하단의 신중각은 더욱 규모가 작아지고 간촐한 형식을 취한다. 각 전각들은 위계의 엄연한 질서를 가지면서 하나의 가람 속에 제자리를 잡고 있다(상게서, p. 35). 상단 그 중 중심불전은 그 사찰의 성격을 대변해 주기에 주로 대웅전, 대적광전, 극락전, 용화전등에 한정된다. 때로는 낙산사처럼 원통전이 주불전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있지만 통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또한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면서 전각의 편액을 대웅보전이나 대웅전으로 한 경우가 더러 있어 17세기 이후 한국불교가 지향했던 신앙의 형태를 가늠하게 된다.


그리고 중단의 영산전, 팔상전, 응진전, 나한전 등은 석가모니불과 그의 제자를 위한 기념관같은 성격을 지니기에 불전과 나한전의 양면적 성격(승가전)을 가지고 있고 실제 사찰의 주불전이 아닌 부불전 기능을 한다.


그리고 원통전은 관음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으며 이는 관음보살이 보살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아 중생들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주는 현실구복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문수전은 지혜를 상징하는 대승 6대 보살의 한 분으로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 불을 협시하고 구도의 길에선 수행자들에게 인기가 높지만 독립된 전각으로 모셔지는 예는 매우 드물다.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명부의 시왕(十王)과 관련된 여러 신중을 모시는 토속적?민중적 성격의 보살전이면서 신중각의 이중적 모습을 을 지니면서 주불전보다 부불전으로 구성되어 진다.



조사당(전)은 전통적 교종사찰에서는 그리 중요한 전각이 아니지만 선종 사찰 그리고 후대에 내려올수록 그 위상이 강화된다. 이 역시 중심전각이라기 보다 중단이 나 하단에 속한다. 하단의 독성각, 산신각, 칠성각과 천왕문 등은 비불교적 요소 즉 토착신앙이 불교에 습합되거나 불교와 그 교단을 수호하는 수호신 같은 존재의 여러 신들을 모시기에 사찰의 부속적 기능을 가진 전각이나 문으로서 구성된다.


신앙체계로 본 사찰의 전각 구성은 불(佛)신앙, 보살신앙, 나한신앙, 신중신앙으로 구분하면서 명칭에서도 전(殿), 각(閣), 당(堂), 누(樓), 등으로 구분하면서 엄격한 격식의 차별을 갖는다. 물론 우리 건축 특히 궁궐이나 사원 건축에서 편액의 명칭에 따라 그 건물의 중요도가 표현되는데 궁궐의 경우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亭) 순에 의해서 국가나 국왕의 공식적인 건축에서 사적이고 휴식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그 격을 달리한다.


사찰의 경우 전, 각, 당, 누의 건물로 명명되는데 이는 예배를 위한 중요 불전에서 강학이나 휴식에 이르는 건물의 위계이다. 주불전에서 부불전, 수행공간, 생활공간에 이르기까지 그 위치와 건물의 규모, 장엄, 격등 여러 가지도 있어서 차별을 둔다. 앞으로 갈수록 중요성이 강조되고, 아래의 경우 예배공간이 아닌 수행이나 다목적인 성격의 공간이 된다.


즉 최소한 불보살이 모셔지는 전각을 殿, 예배공간으로 부불전으로 그 중요성이 약한 경우 閣이 있다.


수행의 공간으로 설법을 듣거나 강의 등 경전 공부나 선수행을 위한 공간은 주로 堂, 그리고 樓가 있다.


누는 2층의 구조로 위층은 마루를 깐 열린 공간이며 아래는 진입의 문으로 역할을 하거나 한 두 칸을 막아 창고나 방을 들여놓는 경우도 있다. 특히 조선시대 통불교의 가람구조가 중요불전 정면(남향)에 자리잡고 당의 경우 양 옆면(동, 서향)에 위치하면서 요사채와 겸하거나 연이어진 예가 많다. 즉 누로 인해 口字형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표 4> 전각과 조형물





<표 4> 상단, 하단의 구분에서 원통전(원통보전, 관음전)이 관음신앙이 강조되어지는 현실적 사정에 비추어 상단에 들어갈 수 있기도 하지만 주불전이 대웅전이나 대적광전이 있는 큰 사찰에서는 중단 즉 보살단에 들어가기도 한다. 또한 영산전, 응진전, 나한전의 천불전의 경우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하지만 대부분 한 사찰의 주불전이 아닌 부불전 이기에 중단으로 분류하였다.


중단에서 문수전의 경우 우리 나라에서는 독립된 전각으로 서있는 경우가 드물고 고창 문수사 문수전의 경우도 3칸 중 1칸은 산신각으로 하여 병용하여 쓰고 있다.


많은 사찰은 천왕문, 금강문을 전각으로 분류하지 않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천왕문에는 사천왕, 금강문에는 금강역사를 모시기에 문의 성격을 갖지만 전각으로 분류하였다.


하단의 경우 불교가 동으로 동으로 전해오면서 타종교의 신앙대상이나 여러 지역의 토착신앙이 불교에 습합이 된 경우가 많다. 사천왕, 인왕(금강역사), 범천, 제석천, 팔부중 등은 원래 인도의 外道(異敎)의 신들로 불교에 귀의하여 天界에 살면서 삼보(불?법?승)를 위해 헌신한다.


여러 신들을 신중(神衆)이라 일컬으며 서양의 유일신과는 상반된 개념을 갖는다. 칠성, 산신은 동아시아의 신으로 칠성은 도교의 칠성신앙이며 산신은 토속적인 신앙으로 불교 속에 습합된 예이다.


그런데 여기서 독성각의 나반존자는 석존출현이전에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성자로서 천태산에서 미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설화로 보아 대승불교의 성자는 아닐지라도 말세 중생에게 복밭이 되는 나한(아라한)으로 선호도가 높은 예배의 대상이다. 나반존자가 갖는 성격으로 보아 토속적 민중적 신앙인 칠성, 산신과 함께 한 공간 속에 모셔지는 것은 쉽게 납득이되지 않지만, 조선시대 이래로 함께 모셔지고 있다.


삼성각은 일반적으로 나반존자(독성), 산신,칠성을 모시는 것이 관례이나 통도사 등 몇몇 사찰에서는 고려말 세 분의 스님(삼성)인 지공, 나옹, 무학대사를 모시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인 전각의 성격은 전체적 신앙체계의 이해를 위하여 구체성 있는 기술을 하여야 하나 지면상 간단히 기술하였으며, 대신 표4 전각과 조형물은 전각의 위계(단)구분, 전각명, 본존, 좌우 협시, 후불탱화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우리 나라 사찰의 전각에 모셔지는 예배의 대상은 엄격한 주된 신앙의 대상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변천과정에서 확산되어 체계화된 여러 신앙 대상을 포괄하기에 유일신을 신앙하는 서구의 관점에서 본다면 범신론적 다양성을 가진다. 또 신앙체계면에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갖는다.




Ⅲ. 사찰 건축의 특징과 감상의 실제


1. 사찰건축의 특징


사찰건축은 종교건축이지만 전통건축의 주류로서 뛰어난 조형성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사찰건축의 특징을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 여러 시대의 양식적 특징, 지역적 특성 종파에 따른 구성형식의 특이성 그리고 조형의 특성을 비롯한 조형의식 등을 종합하여야 하나 여기서는 사찰건축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 유형-조선시대 통불교 계열의 사찰-을 중심으로 정리한다.


필자는 전통건축의 특색은 자연과 조화, 온돌과 마루가 공존하는 기능적 공간적 특징, 퍼지(fuzzy)한 공간구조, 열린 공간을 지향하는 숨쉬는 건축재와 유기체적인 공간 창조, 건축재의 뛰어난 조화와 건축재의 재질감의 강조 등 제시한 바가 있다(이성도, 1999, pp. 154 -158). 사찰건축 또한 전통 건축의 중심이 되고 질적으로 수위를 차지하므로 한국전통건축을 대표하면서 그 특색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찰건축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연주의 건축을 실현하였다. 가람 배치 면에서 지형지세를 훼손하지 아니하고 자연스럽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궁궐 건축에서도 경복궁의 인위적인 배치보다 창덕궁의 자연지세를 활용한 비대칭적 배치에서 한국적 궁궐 건축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지듯 대부분의 사찰들은 자연지세를 잘 활용하면서도 종교적인 특색이 잘 드러나는 건축을 하였다. 배치뿐만 아니라 건축의 형태에서 자연을 닮은 모습이 많다.


특히 지붕의 선에서 주변의 산세와 닮아 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돌이나 나무 등 재료를 다루는 방법과 기법 그리고 표현결과가 자연의 성질을 충분히 활용하고 닮아 있어 자연스럽다.


17세기 이후 통불교시대 이루어진 대부분의 사찰건축은 승려들 스스로 건축가이고 건축주가 되었기에 자연주의 실천이 더 가속화되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우리 전통건축의 최대 화두가 자연과 조화로서 탈인공적인 건축을 지향하면서 자연을 닮아가기라 할 수 있는데 사찰건축에서 배치, 형태, 재료 처리기법, 건물의 스케일 등에서 그러한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둘째, 사찰건축은 조선시대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종교적 이상을 잘 표현하였다. 자연에 순응하는 건축을 하다보면 건축주가 원하는 건축의 이념을 실현하기 어려운 가운데 조선후기에 중창된 대부분의 산지가람의 사찰건축은 불교의 종교적 이념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17세기 이후 조선시대 후기에는 종파가 없어진 무종파의 통불교시대이다. 임진왜란과 정묘재란을 겪고 폐허화된 사찰을 중창, 재건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신앙체계를 계승하면서 전각들을 불단, 보살단, 신중단의 3단으로 구분하면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선방, 우강당, 정면 누각을 배치하면서 불, 법, 승 삼보가 하나되는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사찰건축은 외면적으로는 자연의 지형지세에 순응하는 자연주의의 건축을 지향하면서도 전각의 배치나 구성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적 신앙체계를 잘 구현하고 있다. 즉 외면의 자연스러움 속에 내면의 견고한 이념적 구조를 지닌 건축을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셋째, 사찰건축은 열리고 닫히는 공간의 변화가 많고 공간이 퍼지(fuzzy)한 기능을 갖고 있다. 전통사찰은 대부분 산지에 위치하고 일주문에서 중심불전까지 긴 동선을 갖고 있으면 산신각등 부불전들이 외곽으로 확장되기에 공간의 변화가 많다. 변화가 많은 만큼 동선에 따라 공간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는 역동적 공간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공간을 다목적으로 사용하는 퍼지한 기능을 갖고 있다.


사찰의 누각이나 요사채와 마당은 민가의 정자나 마당의 처마 밑 툇마루처럼 외부공간과 같은 내부공간들이 많아 공간을 퍼지하게 활용하며 내외공간의 변화를 주면서 건축적 공간을 확장한다. 큰 사찰의 경우 각각의 전각마다 기능이 부여되어 독립된 공간의 성격을 갖지만 작은 사찰이나 암자의 경우 한 공간을 다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법당 속에 상단, 중단, 하단이 공존하면서 상단은 불?보살전의 기능, 중단은 신중단, 천왕문의 기능, 하단은 명부전, 영가단의 기능까지 한 공간에서 주불전과 부불전의 여러 역할까지 함께한다.


사찰건축의 공간은 유기체적인 공간의 성격을 갖으며, 다양한 기능의 열린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사찰건축은 입지조건, 전각의 구성과 배치유형, 건축의 스케일, 종파적 색채 형식과 양식의 특이성 등에서 매우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그 다양성을 몇 가지 특징으로 묶어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한국건축이 갖는 특성 그대로를 확인하는 수준에서 정리하였다. 앞으로 보다 세심한 관찰과 다양한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하면서 보다 치밀한 정리를 필요로 한다.



2. 사찰건축 감상의 방법


사찰건축 감상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필자의 답사경험을 중심으로 실제적인 기술을 하고자 한다.


필자는 졸고 ‘건축 감상론’에서 건축감상의 9가지 시각과 방법으로


첫째 많이 보려고 애를 써라,


둘째 열심히 보기 전에 전체의 기운을 느끼려고 노력하라,


셋째 전체 배치에 주목하라,


넷째 동선의 흐름에 따라 공간의 체험을 심화시켜 보라,


다섯째 건물을 구조적으로 주의 깊게 살펴 보라,


여섯째 건물의 조영배경을 이루는 사상이나 원리가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건축을 보라,


일곱째 건물은 주위 자연, 조영 그리고 건물과의 관계 속에 보고 이해하라,


여덟째 건축의 장식적 요소와 그 표현을 즐겨라,


아홉째 건축가나 건축주의 입장에서 건물을 보라(이성도, 1999, pp. 161-174)고 했다.


사찰건축 감상 또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몇 가지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첫째, 사찰건축 감상은 먼저 사찰이 갖는 특성을 고려하면서 종합적인 시각을 통한 사찰의 유형과 가람배치, 공간의 특성 등 구조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감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종합적인 시각은 건축이 종합 예술적 성격을 가지듯 건축조형, 종교, 인문, 사회 그리고 공학에 이르는 총체적 입장에서 건축을 바라보는 시각을 말한다. 구조적 이해는 중심축선에 따라 가람배치, 전각의 구성, 동선의 변화, 주불전과 부불전의 구성에 따른 전각의 위계성, 신앙체계 등을 파악하는 것으로 입지조건에 따른 유형, 종파와 역사 속의 유형 등 여러 시각에서 해당사찰이 갖는 유형 파악과 전체공간구조를 통한 사찰의 이해?감상을 말한다.


사찰은 역사?문화적 산물의 종교적 건축이며 또한 조형미술품을 간지하고 있기에 역사 속에서 변화를 겪으면서 지금에 이르렀으며 오늘의 건물구성과 신앙체계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속 조형물로서 갖는 구조와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살펴봐야 한다. 물론 사찰 건축뿐만 아니라 다른 조형물도 조형과 그 가치를 판단하기 위하여 작가의 조형의식과 시대 정신 등을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사찰건축을 순수 건축적 시각만으로 바라보기보다 종교사상, 역사, 미술조형, 환경, 시대정신, 사회사 등을 종합하여 바라봐야 한다. 여기에는 예비적 학습이 필요하며 보다 체계적인 지식을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에서 논리적, 분석적인 지적 이해나 감상 못지 않게 예술가적 직관이 더 중시되어야 하고 그렇게 바라볼 수도 있다. 바람직한 감상은 여러 시각이 함께 하는 종합적이고 통합적 감상 이다.



둘째, 전체의 느낌을 먼저 가져라.


모든 감상은 대상이 갖는 형태를 분석하기 이전에 전체에서 오는 기운을 느끼고 그 느낌이 어떠한지 음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는 감상자의 마음을 허공같이 텅비게 하여 대상의 기운을 보다 민감하게 느끼려는 노력을 가져야 한다. 물론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자연을 대할 때 나름의 첫인상을 갖게 되고 대체로 그 첫인상이 오래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대상의 본질을 직관하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지는 여기서 논할 문제는 아니지만, 대상을 직관하는 것은 감상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전통사찰의 대부분은 자연 속에 위치하여서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고 있기에 자연과 건축이 어떻게 만나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기운을 느껴보고 읽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필자가 보기엔 우리 나라 건축의 최대 관심사는 자연과의 조화를 어떻게 갖는 것인가? 그 속에서 안심입명을 실현하고자 하는 건축적 구조를 어떻게 갖는 것인가? 이다. 이는 우리 건축에서는 자연의 기운과 지형지세를 비롯한 환경적 조건을 매우 중시하였고 건축재 또한 자연재로 일관하면서 자연에 합일하려는 건축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지형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으며 또한 어떤 조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건축재가 갖는 물성을 어떻게 상호 조화시키고 또한 조형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물론 조형으로서 건축을 보아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셋째, 전각배치를 중심으로 공간의 흐름을 따라 공간적 체험을 심화시켜 보라.


건축은 조형예술의 한 영역으로 고유한 특성을 갖는다. 건축은 평면의 회화나 입체의 조각과는 다른 공간으로 사람의 출입과 이동을 위한 삶을 공간을 창조하는 실용적 예술이기에 앉을 자리 앉아보고 설자리 서보면서 공간체험을 심화할 때 보다 건축을 깊게 느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단지 바라보는 시각적 예술의 경계를 넘어 그 공간의 주인이 되어 행동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즉 외부에서 바라보기보다 실내와 실외를 넘나들며 앉아보고 서보면서 공간체험을 심화해보는 것이 보다 건축 감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사찰건축감상은 여러 가지 시각과 방법으로 이해되고 감상되어질 수 있지만 먼저 동선과 전각의 배치를 중심으로 공간의 흐름을 살펴봐야 한다. 전체 건물군에서 중심축을 발견하고 배치의 구조적 짜임을 살펴봐야 한다. 주불전이 어떻게 위치하고 있으며 주불전과 부불전을 중심으로 중심축과 부축이 어떻게 형성되며 각 예배공간들과 수행공간 그리고 과정적 공간이 어떤 관계 속에 연계되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전각을 중심으로 신앙체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파악해보아야 한다. 물론 불교에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그것이 보이거나 읽혀지질 않을지 모른다. 건축은 단지 조형적 아름다움만으로도 분석하고 감상할 수 있지만 사찰은 불교라는 종교적 이념을 실현한 공간이기에 불교적 공간 체계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이를 위해 Ⅱ장에서 기본적 개념을 기술하였다).


넷째, 전체에서 부분으로 실외에서 실내로 한 방향에서 보다 여러 방향으로 공간체험을 심화하면서 감상한다.


산지가람의 경우 사찰의 경내에 들어서면서 멀리 주변 산의 능선과의 관계 즉 어떤 환경 속에서 기단에서 지붕, 전체의 형태와 구조, 공포, 편액, 창살과 문양 등 세부장식에 이르기까지 어떤 형식과 양식을 가졌는지 살펴봐야 한다. 실내에 들어가서 내부 공간 전체의 기운과 전체의 이미지를 느끼고서 실내의 구조와 천장?장식 등을 관찰하고서 관심 가는 부분을 세심히 관찰한다.

불전의 내부공간 속에 상단, 중단, 하단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살피면 신앙의 체계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주불전부터 관찰하되 상단의 주불, 협시불 그리고 후불탱화 그리고 중, 하단으로 옮겨가면서 살펴본다. 대개 주요불전은 실내공간을 분할하지 않은 채 큰 볼륨 그대로 쓰면서 불단을 상?중?하로 구분하면서 그 위계를 정하고 여기에 장엄을 더한다. 부불전 또한 차례대로 외부공간과 실내공간을 구분하면서 앞서 주불전을 관찰한 것처럼 진행한다. 부불전은 주불전에 비해 규모가 적은 것이 일반적이고, 공포와 장엄도 덜한 편이다. 이 과정에서 주불전과 관계, 다른 불전이나 수행공간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공간이 갖는 성격을 전체 신앙체계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 살펴봐야 하고 미술적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부불전이 여럿일 경우 그 관계와 격을 구분하면서 건축의 외부, 공간 구조, 그리고 실내공간, 봉안된 존상과 탱화를 통하여 신앙적 내용과 체계를 전체 구조 속에 어떤 기능과 역할을 가지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존상과 탱화들이 갖는 도상과 표현내용, 제작기법 전체 공간 속에의 아름다움에 관해서 살펴봐야 한다. 때로는 실내 공간보다 존상이 너무 커 보이는 경우도 있고 실내공간에 비해 존상이 너무 작아 설렁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불단이나 천장, 벽 그리고 공포 등의 구조 속에 살펴보아야 한다.



앞에서 예배공간 중심으로 여러 전각들을 살펴보았다면 다음은 수행공간을 살펴보아야 한다.


수행공간으로 쓰이는 강당이나 선방 그리고 생활공간인 요사채 등을 살펴본다. 요사란 수행자들이 거쳐하는 집으로 생활공간, 휴식공간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승려들이 모여 공부하고 정진하는 집인 승당(僧堂)또는 선방과 요사가 뚜렷한 구분 없이 혼용되고 있으며 강당이나 선원에 붙은 선방까지도 넓은 의미의 요사 또는 승방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경향이다(이응묵, 1990,p. 6).


대체로의 수행공간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그 내부 공간을 살펴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훌륭한 선방이나 요사채 등은 불전 못지 않은 아름다움과 훌륭한 기능을 갖고 있어 사찰건축 감상에서 놓치기 아까운 경우가 많다. 사전조사를 통하여 답사나 건축감상을 할 경우 종무소를 통하여 미리 양해를 구한 다음 그 내부를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통불교의 조선중?후기의 사찰일 경우 대개 주불전(대웅전)의 좌에 선방, 우측에 강당(큰방), 정면에 누각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요사채는 좌우 선방이나 강당에 연이어져 있거나, 축선에서 더 외곽에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선방, 강당, 요사채의 경우 한 면에서 건물의 외형만 바라보고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내부공간이 더욱 중요하다. 안에서 밖을 바라보고 또 앉고 서며 걸어 보면서 내부의 또 다른 면을 통해서 공간의 흐름과 특성을 파악한다. 하나의 물체 도 시간대별로 그 느낌이 다르듯이 내부와 외부공간 또한 빛이나 주변 환경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면에서 여러 방향(시각)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공간의 체험을 심화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부분의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즐겨라.


건축은 전체의 배치나 구조의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발견하는 것 못지 않게 부분의 아름다움도 많다. 축대, 기단, 소매 돌, 창호, 벽화, 단청, 불단의 장식, 보개나 닷집, 담장 등에서 옛사람들의 미의식을 발견하고 미소지을 수 있는 예들은 얼마든지 있다. 전체 못지 않게 부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섯째, 사찰건축은 종교적인 해석을 통해 이해?감상되어져야 한다.


즉 사찰은 조형예술이전에 종교사상에 의해 이루어진 종교적 건축이면서 신행 공간이기에 그것을 이해 감상하기 위해 종교적 해석이 필요하다. 특히 누가, 언제, 어떠한 종지를 가지고 창건하였으며 역사적 과정속에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 살펴보고, 문헌적 기록이 있으면 사전 조사과정을 통하여 종파,종지, 신앙체계, 조형사상, 가람배치, 시대정신, 인물, 사회적 관계...등을 다각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특히 신앙의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보다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과거에서 지금의 신앙의례를 살펴보면 신앙체계를 알 수가 있다. 즉 각불전과 상단, 중단, 하단의 의례와 신앙행위에는 보다 분명한 신앙체계를 제시해 준다. 신앙의례문은 불교 교리를 바탕으로 하면서 해당 사찰의 종지, 종풍, 역사가 깃들어 있어 보다 심도 깊은 연구에는 짚어 보아야 할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깊이 있는 이해나 감상이 아닌 처음 보는 사찰을 대할 때는 쉽지 않은 부분이기에 초심자는 문화재 안내문을 활용하여 역사적, 종교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일곱째, 문화재 안내문을 활용한 감상을 하라.


 사찰건축 뿐만 아니라 다른 유형문화재는 대개 문화재 앞에 그 문화재를 해설한 안내문을 설치해 놓고 있다. 좋은 감상은 안내문에의 내용을 능가하여 스스로 문화재를 분석, 해석하고 그리고 평가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안내문에 제시되어 있는 내용마저 다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건축의 경우 전문용어가 많아 보통사람에게 어떤 부분은 이해마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문화재 안내문은 관련문화재의 기본적인 내용을 압축적으로 기술하였기에 적절하게 활용한다면 감상에 있어 좋은 지침과 함께 많은 도움을 얻을 수가 있다. 이를 위해 평소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특히 건축의 기본적 개념이나 용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건축용어는 전통미술문화영역에서 그 수가 가장 많다. 감상자는 구조와 형식에 관련된 기본 개념과 용어를 알고 있어야만 안내문을 읽을 때 그 내용과 의미가 이해되어진다. 기본개념이나 용어의 이해 없이 문화재 안내문을 읽는 것은 마치 단어를 모르면서 문장을 해석하는 것 같기에 사전학습을 필요로 한다.


여덟째, 사찰건축 감상을 역사적 이해를 기반으로 인물과 사상의 해후를 가져야 한다.


다른 미술문화도 그러하지만 특히 사찰 건축은 사람들의 신앙을 위한 공간으로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고, 그 전시대에는 다른 많은 사람이 머물다간 역사적 공간이다. 이는 창건에서 그 이후에 어떠한 변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미술문화를 답사할 때 세 가지의 사이(三間)를 보아야만 한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간으로 구체적 공간과 시간 속에 어떤 인물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미술 문화를 본다는 것은 그 조형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중심이 되면서 형태와 색채 그 속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관찰?분석하면서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3간을 보라는 것은 한 미술 문화의 배면에 깃든 사람과 시대정신을 중심으로 구체적 공간과 역사적 시간 그리고 그 속의 삶을 보다 거시적이고 인문학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더욱이 전통사찰이라면 창건된 지 길게는 천년에서 짧게는 백년이 넘는 시간 속에 다양한 이야기가 깃들어져 있지만 주인공은 여전히 한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찰 속에 인물과 사상을 추적하는 것은 감상과정에 포함시켜야 할 과제인 것이다. 물론 문헌을 통한 여러 기록의 검토라든가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도 있으며 때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부분과 상상력을 발휘하여야 할 부분도 있다.



아홉째, 건축의 재료가 어떤 기법으로 어떻게 쓰였는지 또한 조형적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감상하여야 한다.


우리의 건축재는 대부분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들이다. 나무, 흙, 돌이 기본을 이루는데 돌은 기단과 주춧돌로 한정되고 주된 재료는 나무와 흙이 사용되고 있다. 때로는 다른 나무를 쓰기도 하지만 대개 한반도에 고루 분포하는 육송 즉 소나무가 많이 사용된다. 나무가 돌과 만나고 또한 흙과 만나면서 어떤 관계를 지으면서 전체의 조화를 어떻게 이끌어내는지 살펴볼 일이다.


열번째, 건축이 갖는 형태와 공간을 중심으로 조형과 조형성, 그리고 기능과 아름다움을 평가하라.


이 건물만 갖는 고유성이 무엇이며 다른 건축과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살펴 보라. 동시대나 다른 지역에 유사한 양식의 건물을 찾아 비교해 보라.


이상에서 언급한 작품을 대하는 일반적 태도에는 불교의 세계, 역사 등 인문학적 태도와 지식 그리고 건축적 시각과 태도에 이르기까지 여러 측면이 언급되었다. 이는 건축과 조형물이 갖는 본질적 조형, 조형성, 조형의식에 대한 감상의 시각을 강조?제시하지 않았다. 그만큼 건축이 갖는 인문학적 중요성을 전재하기 때문이다. 감상에서 대상의 전체적 느낌을 갖고 분석하고 해석하여 마지막으로 그 가치를 평가하는 일로 이어진다. 이해나 해석을 넘어 건축적 가치를 판단하는 일 여기에는 인문학적 여러 변수도 작용되겠지만 더 순수한 건축적 입장을 존중하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건물의 배치 형태, 구조, 공간, 재료와 표현방법 기능, 디자인, 독창성 그리고 언급하지 않은 조형의 여러 요소와 원리 등을 다양한 건축?미술적 시각에서 냉정하게 평가되어져야 한다.




3. 사찰건축 감상의 실제


1) 사찰건축 감상 방법론


현행 학교 교육에서 미술문화 그중 건축감상의 뚜렷한 방법론 제시가 없다. 사람들이 미술품이나 사물을 보거나 감상할 때 개인에 따라 그 의미와 해석이 다르다. 보는 사람에 따라 그만큼 주관적으로 보고 판단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 관심과 정신의 차이에 의한 차별현상은 대상에 대한 이해나 해석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하겠다. 즉 감상은 미적 대상으로부터 자기만의 미적 태도에 의해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에 감상자의 태도와 능력에 따라 같은 대상을 보아도 그 느낌이 다르다. 그러면 대상에서 무엇을 어떤 관점에서 감상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대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고 느끼며 판단하고 평가해야 할 것인가? 감상은 대상의 접근에 있어 미학적 측면, 작가적 측면, 미술사적 측면, 미술의 사회사적 측면, 비평적 측면 등의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비평적 측면이 강화된 종합화된 접근을 하고자 한다. 1차적으로 개념적 이해나 전체적 인상 파악을 먼저 하면서 형식분석, 해석, 판단에 이르는 비평적 과정을 종교적 특수성과 역사성을 고려하여 4단계로 나누어 접근하고자 한다. 즉 미술작품의 비평적 감상 방법론에 건축적 특성을 살려 건축감상 방법의 시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전체적인 느낌 찾기: 작품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파악하는 단계이다. 처음 대할 때 기운이나 직관으로서 전체적인 분위기나 인상 그리고 대체적인 형식을 파악하는 것으로 세부적인 관심을 갖기보다 전체적인 느낌과 내용을 파악한다. 마음을 텅비게 하여 건축대상에서 무엇이 보이는 가를 개괄적으로 파악하고 기술한다. 아름답다. 무질서하다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 객관적으로 그것도 크게 개괄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아름답다라고 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할 때 이미 미적 판단이 되어 버리기에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사찰은 세속과 다른 청정한 수행과 전법을 목적으로 건축되었기에 일반적 건축과 느낌이나 기운이 다르고 나름의 엄격한 질서를 가지고 있다. 산지가람이라면 주변의 자연환경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중심불전과 여타의 전각이 주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보다 분명한 느낌과 내용을 갖기 위해 언어로 기술해 보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기술은 객관적 내용으로 배치, 형식, 중심축선, 공간의 이동, 기능 등 건축적 내용중심이어야 한다.


둘째, 형식분석하기 : 작품의 구조를 분석하는 단계이다. 사찰은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으로 큰 사찰이라면 입구의 전체 조감도를 보면서 전체 구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살펴본다. 일주문에서 금강문, 천왕문, 누각, 중정 그리고 주불전, 강당, 선원이나 관음전을 비롯한 여러 부불전, 그리고 저 멀리 산신각에 이르는 여러 전각의 배치와 중심축선을 파악한다. 그리고 전각의 배치를 통하여 전각의 위계 즉 불전을 상단, 중단, 하단으로 구분하면서 사찰의 유형과 신앙의 체계를 파악한다. 보다 구체적인 것은 주불전과 부불전의 관계, 주불전내 상단, 중단 , 하단의 불단배치와 모셔진 존상과 탱화의 도상과 형식, 표현양식을 분석한다. 여기서는 건축의 이해와 감상이 중심이 되기에 불단의 불상, 불화, 공예에 대한 관심은 예외로 하고 가람전체의 배치와 구조를 분석하고 공간의 성격과 체험과 동선과 건물의 기능과 그리고 개별건축이 갖는 형식과 양식을 파악한다.


이 단계에서 전체구조와 동선의 변화를 중심축선에 따른 시각의 변화와 공간의 경험, 전각의 위치와 명칭 등을 그리거나 언어로 기술하여 본다 .사찰이 어떻게 구성되고 구조화되며 건축적 요소나 조형적 요소와 원리를 통한 시각적 특징을 발견하고 그 특징들이 상호 어떤 영향을 주는 지를 분석?정리한다.


셋째, 해석하기: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는 단계로 전각의 배치와 불전, 불단구성 분석을 통하여 사찰의 유형과 신앙의 체계 및 내용을 해석하고 건물이 갖는 위상과 건축적 특성을 파악한다. 그리고 개별적 건물이 갖는 조형성과 조형의식을 정리한다. 사찰은 종교건축이기에 종파나 종지의 신앙적 체계가 내재되어 있으며, 또한 역사적 산물이기에 창건에서 지금에 이르는 과정에서 여러 인물들과 그들의 사상이 가람구조와 신앙체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문헌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여기에는 전각이나 .조형물만으로 파악되고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기에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야 한다. 건축 감상에서는 건축을 통한 신앙체계, 조영사상, 조형의식, 미의식의 파악과 해석과 조형 그리고 형식, 양식, 기능, 독창성 등이 상호 연계성을 가져야 한다. 전각의 구조와 배치 분석, 동선에 따른 공간 체험 등 여러 시각에서 건축의 표현과 내용을 해석한다. 사찰건축은 교리적 해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때로는 역사적, 사회적, 순수 건축적, 조형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로 한다. 종파와 관련하여 사찰의 유형을 파악하고 그 유형 이 전각의 구성, 불전내부의 불단구성, 조형물 등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사전의 예비지식이 필요하면서 불교의 교리와 역사 인물 등 많은 전문지식이 동원이 된다. 한가지 우려되는 점은 순수한 건축의 조형적 접근보다 관념적 이해나 해석으로 이어질 소지가 많아 건축적 특성을 중심으로 하는 조형감각이 손상되지 않아야하기에 균형 있는 중도의 시각이 필요하다. 특히 건축주나 건축가의 입장이나 다르게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면 객관적 관찰자보다 또 다른 시각과 해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가치판단하기: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단계로 이는 앞 단계의 분석과 정보를 근거로 건축물 속에 내재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다. 가치는 건축의 조형적, 종교적, 역사적 여러 가치를 평가한다. 우리는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볼 때 처음의 인상적 느낌이 최종가치판단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대개는 처음 보는 느낌이 강한 이미지를 오래 지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는 피상적이고 형식적일 수 있다. 미술작품이나 건축물에 내재된 가치는 형식, 양식, 기능, 역사, 종교 등 다양한 시각에서 가치 판단이 있어야겠지만 건축에서는 조형적 미적 가치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가치 판단을 위해서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의 유사한 건물을 비교하여 형태, 구조, 공간, 기법, 기능성, 조형성, 아름다움 등에서 얼마만큼 독창적인가를 질문하면서 판단하여야 한다. 여기서 앞의 단계를 거치면서 대상을 분석하고 해석한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인식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보다 설득력을 갖는다. 물론 사찰건축은 불교가 갖는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여 체계화되고 질서화된 것이기에 그 특수성을 전제하여 해석하고 그리고 가치판단을 전제해야 한다.


지금까지 비평적 측면이 강조된 통합적 접근을 하되 불교의 특수성, 역사성을 고려하여 3건축의 조형적?미적 가치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정리하였으나 건축이라는 장르의 특성이 살려진 비평적 관점과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앞으로 건축의 특성이 충분히 살려진 건축감상 방법론의 제시가 과제로 남겨진다. 건축은 회화, 조각, 공예, 서예 등 다양한 예술 영역을 포괄하고 있기에 종합적인 시각과 각급 학교교육, 사회교육, 불교 신자 등 보다 구체적인 대상을 전제하여 체계적이고 다양한 건축감상방법론의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2) 사찰건축 감상의 실제-부석사


앞에서 사찰건축 감상은 “첫째 사찰의 특성을 고려한 종합적인 시각에서 감상되어 져야 한다.”에서 “열째 건축이 갖는 형태와 공간을 중심으로 조형과 조형성 그리고 기능과 아름다움을 평가하라”고 까지 열 가지와 4단계의 비평론적 감상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전자는 감상의 일반론적 시각에서 인문학적, 조형적, 건축적 시각까지 복합적으로 언급하였고 그리고 비평적 감상에서 4단계로의 체계적 접근 모두 실제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아 바람직한 감상에 이르기까지는 어려움이 따른다.


전통사찰은 천년이 넘는 연륜에서부터 몇 백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변화를 겪어왔기에 그 과정을 추정하고 그 변화를 찾아보기는 무척이나 어려움이 따른다. 여기서는 영주 부석사를 통하여 사찰건축 감상의 실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부석사에 관한 자료들은 다른 사찰도 그러하겠지만 가벼운 인문학적 답사기에서 건축 전문 답사에 이르는 여러 글들이 발표되어 있고, 단행본까지 출간이 되어 있어 기본적 이해는 쉽게 할 수 있다.


부석사의 건축감상은 1300여 년 전에 창건되어 오늘에 이르는 역사적, 종교적 건축물을 감상하는 것이기에 창건에서 지금에 이르는 변화과정에 대한 이해와 창건의 이념과 관련인물들의 사상, 가람배치 그리고 지금의 건물들을 살펴보고 건축적 특성과 조형미 등을 통하여 부석사의 건축적 평가를 하여야 한다. 부석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고려, 조선시대의 문헌이나 금석문 그리고 근래의 연구보고서, 지방향토지에 이르기까지 많이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것은 몇 가지가 안 된다. 근래 간행된 대중적인 자료들을 정리하였다.1)

이러한 여러 자료 중에는 보다 전문성이 있고 그리고 연구자마다 견해를 달리하기에 초심자가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자료도 있다. 부석사는 우리 나라 사찰중 가장 뛰어난 건축으로 이름이 높다. 부석사는 건축의 영원한 고전이며 경전이다. 공간으로 쓰여진 경전이다(서현, 1998, p. 250).

부석사는 축선의 아름다움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찰이다(류경수, 1998, p.178). 그것은 우리 목조건축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축이다. 가장 아름답다는 것은 주관적 평가에 따르는 부담도 있지만, 이는 잡지(플러스, 1994. 2)에서 설문?조사한 결과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부석사는 불국사와 비교하여 그 아름다움을 말하곤 하는데 불국사는 인공미의 극치이라면 부석사는 자연미의 극치이다. 더욱이 우리 나라 건축이 자연과 조화를 모색하면서 자연미를 추구하는데 그 화두를 삼았다면 부석사는 가장 한국적 이상의 건축을 실현한 것으로 평가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부석사 건축감상을 하기 위해서는 부석사라는 사찰 전체를 두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부석사를 구조적으로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문화재 안내문’을 제시하고 기본적인 개념을 짚고 난 후 감상에 나선다. 문화재 안내문은 문화재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이 견해를 가장 압축적으로 정리하여 문화재 이해와 감상 지침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안내문에 의지한 감상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재에 대한 기본적 개념을 인지하는데 이용하고자 한다. 부석사에 관한 문화재 안내문은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조사당에 한정하고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부석사 당간지주, 부석사 삼층석탑, 부석사 고려각판, 부석사 원융국사비, 부석사 삼층석탑, 조사당벽화는 제외한다. 그러나 사찰을 감상한다는 것은 건축과 그 속의 조형물을 함께 감상하는 종합적인 감상이어야 한다.



<안내문 1>





부 석 사


소재지: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16년(676)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이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우리 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로 이름하게 됨은 불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 돌(浮石)이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한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 혹은 홍교사라 불리었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76)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 3년(1377)조사당이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석조 여래 좌상(보물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 255호), 석조기단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 벽화(국보 제46호), 고려 각판(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 2기의 삼층석탑 등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 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오래된 것으로 현재 무량수전안에 보관되어 있다. 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여래좌상은 국내에 전하는 최고의 소상(塑像)이다.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선묘정은 의상대사의 호법룡이 살았다는 우물이라 전한다.




<안내문 2>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제 18호

소재지: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전으로 신라 문무왕(661~668)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이다. 그후 소실된 것을 고려 현종(1009~1031)때 중창하였으나 공민왕7년(1358)다시 불에 타버려 우왕 2년 (1376)에 재건하였고 조선 광해군(1608~1623)연간에 단청하였다.


이 건물은 주두와 소로의 굽은 각각 약간 안으로 깎여 휜 곡선을 이루고, 굽받침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가구는 직선재를 사용하였고 장식적인 요소가 적으며 공포, 가구의 수법도 견실하다.


1916년 해체 수리시에 발견된 묵서명에 우왕 2년(1376)에 재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조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수법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 현존 목조 건물중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서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의 하나이다.

전내에는 무량수불인 아미타여래를 봉안하였는데 다른 불전에서와는 달리 불전 측면 서쪽에 모시고 있으며 조사당의 벽화를 옮겨 보존하고 있다.




<안내문 3>


     부석사 조사당


국보 제19호
소재지: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 창건한 의상대사(625~702)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건립되었고, 조선 성종 21년(1490)에 중수되었으며, 동 24년(1493)에 개채되었다.


이 건물은 주심포 양식에 맞배집으로 무량수전에 비해 기둥의 배흘림이 약해졌고, 주두와 소로의 굽은 직선이며 굽받침이 없고, 공포와 가구의 수법은 간략하다. 구조양식으로 보아 무량수전보다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


건물 내부 입구 좌우에 제석천, 범천, 사천왕상의 벽화가 있었는데 이들은 고려시대의 회화사상 희귀한 것이며,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로서 지금은 무량수전 내에 보존하고 있다. 조사당 앞 동쪽 처마아래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 국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이 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 스님이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되었고 화엄사상을 널리 펴기 시작한 화엄종찰이다. 의상은 중국 화엄종 2조인 지엄문하에서 수학하여 화엄경의 깊은 세계를 요달하였다. 귀국 후, 이곳 부석사를 기점으로 화엄사상을 홍포하였다. 의상의 교화활동은 화엄사상이 한국불교 사상사 위에 커다란 강물이 되어 흐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한국 불교 연구원, 1976, p. 27). 의상이 체득한 화엄사상의 요체는 연기의 정법을 바로 앎으로써 서로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서 유지되는 이세상의 모습을 바로 보고 거기서 하나와 전체, 일념과 무량한 시간, 진리와 현상의 운용을 중도의 관념으로 꿰뚫어 본다는 것이었다(최완수, 1994,p. 424). 창건 당시 화엄사상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을 교화할 수 있는 통일신라의 새로운 사상이었기에 국가의 전폭적 지원과 함께 국가적 중심사상으로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사찰의 전체적 가람구조는 단일불전을 가진 산지형, 단일 영역의 사찰로서 미타계 사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그림 5. 참조).

물론 부석사가 미타계 정토신앙을 구현한 가람이 아니고 화엄사상을 구현하는 사찰로 주장하는 논리(김봉렬, 1989, pp. 63-65참고, 이원교, 1993, 재인용, 부석사, pp. 69-71)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주장으로는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미타계 사찰이라는 주장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경사진 산기슭을 10여 개의 석축으로 구분하고 중문지로 보이는 천왕문의 석축에서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9단의 변화가 있다. 9석축은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는 三背九品(三品三生說)의 교리를 건축화시킨 것으로 가람의 기본적 설계가 무량수경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부석사는 화엄종찰로서 역사적으로 화엄사상을 계승해왔다는 자부심을 갖는데 가람의 구조는 정토왕생신앙에 바탕을 둔 신앙형태를 지니고 있다(홍윤식, 1997, p.170).이 면을 정토신앙과 화엄신앙을 대립적 구도로 볼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관계를 갖는다.

신라의 화엄사상은 아미타 정토왕생사상을 수용함에 의하여 보다 실천적 민중적 전개를 볼 수있었다(상게서, p. 170). 통일신라의 화엄사상의 발전의 기저에는 정토왕생사상의 수용과 실천에 큰 도움을 받고 있던 그전 모습을 가람배치 속에서 엿볼 수 있다. 부석사 가람의 중심구조는 무량수전 ?안양루 등 아미타 극락정토적 성격이지만 이를 있게 한 근거는 석가의 무궁한 교설에 근거하고, 석가의 무수한 교설 중 의상은 화엄사상에 의하여 아미타 정토를 구현하려 하였다(상게서, p. 149).


부석사는 선달산을 정점으로 하여 소백산맥이 동에서 서로 가로막고 있다. 祖山인 두 산세의 모양은 큰 금성의 산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달산에서 용맥이 남으로 흘러 宗山인 봉황산에 이르러 그 기슭에 부석사가 자리잡고 있다. 즉 穴에 해당하는 곳이다. 주불전인 무량수전에 이르면, 훤히 앞이 트인 남쪽으로는 먼 산들이 겹겹이 보이는 것이 마치 물 흐르는 것 같으므로, 金生水의 五行相生格이 되는 것이다(송민구, 1990, p. 51). 부석사는 당시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감은사지에서 보는 것처럼 평지가람의 대칭적 건물 배치를 통한 권위와 형식적인 표현이 대상에 직결되어 접근하는 방식이 아닌 우회 접근하게 하는 완곡법(婉曲法, euphemisim)를 취하여 여러 군(群)에서 개(個)로 유도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대석단을 올라감에 따라 여러 동의 건물과는 엇비슷하게 안양문이 놓인 것이 바라다 보이고, 그 뒤에 무량수전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그러한 기법이다. 그리하여 무량수전이라는 클라이맥스에서 서북쪽 모서리 가까이 있는 浮石으로 여운을 남기며 아름다운 대자연에 흡수되고 마는 것이다(상게서, p. 54).

먼저 입구에서 중심축선을 따라 서있는 중심건물과 그 중심선 밖의 여러 건물의 이해를 위해 부석사 배치도(그림5. 참조)를 보자. 자연 지형, 지세 속에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가?


부석사는 태백산맥 끝자락 봉황산 기슭에 10여 개의 크고 작은 석축을 쌓아 대지를 다진 다음 중심축을 잡고 산자락 위로 올라가면서 여러 전각을 구성하여 마지막에는 중심불전-무량수전을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긴 종심형 공간구조를 갖고 있다(그림14. 참조). 위로 갈수록 공간의 위계가 높아지도록 배치되어 중심축선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 있는 起, 承, 轉, 結의 구성을 하고 있다.


참배자가 사찰 경내로 들어서 중심축을 따라 안으로 진입할수록 새로운 공간의 체험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계단과 중심축선의 변화 속에 종교적 세계를 심화 체험하게 하면서 궁극에는 피안의 저 언덕(극락세계)에 이르도록 계획하고 있다. 즉 ①사찰입구에서 천왕문까지 도입공간인 기(起)라면 ②대석단위 범종각까지 전개해 나가는 공간인 승(承)에 해당되고 여기서 ③축이 꺾여 전환점을 맞는 안양문까지가 전(轉)의 공간이며 ④안양루와 무량수전은 가람의 종국점으로 결(結)이라 할 수 있다(김보현 외, 1995, p. 53).


또 다르게 유홍준은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모든 길과 집과 자연이 이 무량수전을 위하여 제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는 절묘한 구조와 장대한 스케일에 있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부석사는 ....풍요로운 자연의 서정과 빈틈없는 인공의 질서를 ...”가지면서 3종류 길을 통한 부석사의 순례를 말한다. 절 입구에서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에 이르는 돌반, 흙반의 비탈길은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천왕문에서 요사채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르는 본 채는 정연한 돌축대와 돌계단이라는 인공의 길이다. ...무량수전에서 한 호흡 가다듬고 조사당, 응진전으로 오르는 길은 떡갈나무와 산죽이 싱그러운 흙 길이다. 그것은 자연으로 돌아온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는 여운인 것이다(유홍준, 1994, p. 77).


그러나 오늘날에는 부석사의 초입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호박돌길은 98년에 봄에 아스콘으로 말끔이 포장을 하여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로움은 맛볼 수 없다. 부석사의 공간구성은 10여 개의 크고 작은 석축과 한 번 꺽어지는 긴 중심축선을 통하여 중간 중간의 건물로 인하여 역동적이고 명쾌하게 만들고 있다. 이 공간구성을 불교적 교리와 연관시켜 불교의 이상세계인 극락세계를 건축화한 모범적인 일례로 평가한다.


즉 부석사는 산지형 가람으로 단일불전을 가진 단일영역의 사찰로서 정토계 사찰의 전형이다. 형국의 주축이 정남향이 아니고 일직선도 아니다. 사찰의 주축도 범종루를 지나면서 약 17°꺽어진다. 부석사의 배치에서 가장 위대한 설계는 바로 여기, 축을 꺾는데 있다(서현, 1998, p. 245). 이로 인해 극락적인 변화를 유도하면서 중심불전인 무량수전 중정에 진입하게 된다.


부석사는 중심축선은 확연하게 드러나면서 축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중심축선 위의 건물로는 일주문, 천왕문, 범종루, 안양루, 무량수전이며 무량수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그 건물의 중심이 중심축선 이면서 동선이 되기에 순례자는 건물의 중심부를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건물들 요사채를 비롯한 부불전이나 전시관 건물인 보장각은 이 중심선 밖으로 비껴 앉아 있다. 이는 진입과정에서 시선이 차단되지 않고 동선을 명쾌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리고 범종루, 안양루의 누하의 진입은 하나의 과정적 공간의 극적인 경험을 유도하게 되는데 건물로 인하여 차단된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 준다.


범종루를 통과할 때는 저 멀리 안양루와 무량수전 즉 불교의 이상향의 극락세계가 저 멀리 손에 잡힐 듯 중경으로 들어오면서 중심축선의 각도가 꺾이게 된다. 꺾인 축선은 종교적으로는 안양국(극락)의 도입이 되면서 신앙의 전환점으로, 또 한번의 加行精進을 요구하는 듯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때 무량수전의 지붕선과 날아갈 듯한 안양루는 우리 건축에서 마치 극락이 이러하듯 우리 건축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준다.


안양루는 누하를 진입하면서 석등과 무량수전 편액이 중첩되면서 드디어 무량수전의 중정에 들어선다. 여기서 석등이 정중앙이 아닌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이는 순례자로 하여금 동선을 자연스럽게 동쪽으로 이끌게 한다.


무량수전을 감상하고서 올라왔던 길 즉 중심축선을 뒤돌아보면서 멀리 소백산맥의 연봉이 물결치면 무량수전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일망무제의 전망은 가히 천상의 정원인냥 경이롭기만 하다. 다시 무량수전을 두고 삼층 석탑을 지나, 동북쪽의 숲의 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사당을 만나게 된다. 중심축에 따라 배치된 건물 중 무량수전, 안양루, 범종루와 숲 속의 조사당 그리고 취현암, 응향각, 삼성각을 제외한 일주문과 천왕문, 중심축선에 벗어난 보장각, 요사채 등의 여러 건물들은 20세기의 건물이다.

그 이전의 건물구성을 알기 어렵다. 그런데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교남명승첩 의 ‘순흥 부석사’ 그림에서 전각 배치에 관해서 시사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고(최완수, 1994, pp. 414-439), 1849년에 간행된 ‘순흥읍지’의 기록 또한 당시의 가람구조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지만 앞으로 보다 심도 깊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부석사의 건축 감상은 20세기에 지어진 건물도 포함시켜 전체와 부분, 조선시대 건축과 20세기 건축을 비교 감상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에 한정한다.


부석사의 축대, 대석단은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은 아니지만 부석사의 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뛰어난 좋은 유적이다. 석축은 지주나 장대석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그대로의 크고 작은 돌을 제자리를 찾아 놓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구성을 하고 있다. 불국사의 축대가 목재를 모방한 지주가 있는 인공적인 구조가 강조된 아주 조직적인 모습으로 인공미의 극치를 보여준다면, 부석사의 축대는 사람이 쌓았다기 보다 크고 작은 각각의 돌들이 자연그대로 본래 자리에 놓여있는 것처럼 천연스럽게 구성하여 자연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연 그대로 돌의 성품과 모양을 살리면서 전체로 통일을 안겨주고 있는 모습이 자연의 무질서를 자연스러운 질서로 되살리고 있어 화엄세계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듯하다. 크고 작은 자연석들의 만남은 평범스럽지만 전체로는 장중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① 무량수전


우리 나라 최고의 건축으로 평가받는 무량수전의 건축적 성격은 완결성과 절제로요약된다(김봉렬, 1991, p.81). 무량수전은 완벽한 황금분할비로 이루어진 사찰인 것이다(송민구, 1990, p.46). 정면 5칸 , 측면 3칸 팔작집으로 기둥사이가 넓고, 기둥 위에만 간결하게 짜올린 주심포 건축으로 공포가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는 구조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적절한 볼륨으로 생명감이 충일한 모습을 한 배흘림 기둥이며 유연한 추녀의 곡선과 무량수전 뒤편 병풍을 두른 듯한 자연의 대석단을 배경으로 살며시 고개를 든 듯한 지붕의 면과 선은 자연과 조화를 가지면서 자연 속의 인공의 행복한 만남을 가진다.


무량수전의 여러 건축 수법 중 앞에서 언급한 기둥의 배흘림 이외 기둥의 높이를 바깥쪽일수록 조금 더 높이는 귀솟음 수법과 건물의 모퉁이 기둥의 윗 부분을 수직선보다 약간 안쪽으로 기울려 세우는 안쏠림 수법이며 그리고 건물 가운데 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게 하여 처마의 선이 곡선을 그리도록 하는 안허리곡 수법 등과 내부 공간에서 보의 단면을 항아리 모양으로 위는 둥글고 아래는 직선으로 깎는 항아리형 보와 간결하고 구조적인 모습의 공포 등은 무량수전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목조건축의 기법과 모습이다.


무량수전의 공포형식은 첨차와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주심포계로 매우 건실하게 짜여 있다. 전면의 창호는 고풍스러운 井字살 창문을 띤 분합문 이다. 후면의 중앙 칸은 널문과 그 양 협칸에 붙박이 살창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절제된 모습이다. 내부공간은 구조부재들이 그대로 노출된 연등천장으로 목재의 모습을 천연스럽게 드러낸 모습이다. 내진기둥을 중심으로 가운데 항아리형 보들이 중첩되어 참배자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불단으로 유도하고 있으며 불 단에는 협시보살 없이 고려시대 최대?최고의 소조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불단을 서쪽 치우쳐 있어 깊고도 장엄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무량수전이 갖는 건축적 아름다움은 여러 조형요소와 원리가 깃들어 있는데 그 중 완벽한 비례를 몇몇 건축가들은 지적한다.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의 완벽한 비례가 우리의 눈을 보다 상큼하게 해준다. 즉, 무량수전은 측면 38.20척, 정면 61.90척으로서 비례가 1:1.62인 완벽한 황금분할비를 이루고 있다. 5:8이라는 것은 황금분할비의 근사값의 하나인 1:1.60이다(상게서, p.57). 송민구는 무량수전을 평면비례, 입면비례, 내부공간의 형성 등 여러 면에서 비례를 분석하고 여기에 불교를 중심으로 한 동양철학적 의미를 기술하면서 황금분할비는 조형에 윤회사상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한다(상게서, pp. 48~67).


사실 건축학자나 전문가들에 의해, 전문용어로 쓰여진 학문적 글이나 현재 무량수전 옆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문보다, 최순우 선생의 담백한 에세이가 무량수전을 더 쉽게 이해하게 한다. 전통미술문화는 우리의 조형의식과 조형으로 바라보고 오늘의 미적 감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전문용어로 된 학술적인 기술 내용은 보통사람에게 낯설게 하고 현재 우리의 미의식이 반영되지 못한 채 생생한 미적 감각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의미에서 최순우 선생이 무량수전을 기술한 짧은 문장은 무량수전만큼이나 간결하고 절제된 모습을 가지면서 무량수전이 갖는 조형의 아름다움 모두 설명하고 있어 오늘의 교육현장의 전통미술문화교육에 큰 시사점을 준다.2)


②조사당


무량수전과 더불어 고려 건축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기품을 가졌다. 부석사 개산조의 상조사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 건물로 고려말에 건립되었다. 정면3칸, 측면1칸, 주심포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조촐한 집이다. 지붕의 서까래를 길게 빼어 처마 밑 반 외부공간이 깊고 넓다. 맞배지붕의 직선과 주두와 굽은 직선의 각진 소로는 딱딱하고 간촐한 모습을 하고 있어 사당으로 함축적이고 엄숙함을 주고 있다. 정면의 어간은 세살문이 있지만 양옆의 협칸은 살창을 달았다. 무량수전이 유연하고 확장하는 듯 형태를 가진다면 조사당은 경직되고 응축된 듯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 대조적인 조형을 보여준다.


③안양루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을 친견하기 위해 지나는 중심축선의 마지막 관문의 누각으로 마지막 대석단에 절묘하게 배치되어 있다. 안양루 난간에 붙은 안양문 편액 아래로 누하 진입을 하면 무량수전 앞마당 석등과 마주친다. 석등이 무량수전의 정중앙이 아닌 약간 비켜 나 있어 출입자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동쪽으로 유도하고 있다. 무량수전에서 보면 단층의 누각이지만 반대 방향 범종루에서 보면 2층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누각으로 무량수전과 함께 무량수전 구역의 중심축을 이룬다. 석축 위에 놓인 기둥 위에 난간을 두른 모습과 긴 처마의 유연한 선으로 인하여 날아갈 듯 경쾌하다. 공포는 다포계로 조밀하게 배열되어 화려하다.


④범종각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누각 건물이다. 정면은 팔작 지붕인데 비해 후면은 맞배지붕이다. 일반적 건물의 정면이 길고 측면이 짧은 정형화된 패턴을 깨뜨리면서 통행자를 누하 진입 동선으로 유도하고 있다 부석사의 전체지형이 좁고 길게 형성된 조건에 따라 중심형의 배치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공간을 보다 깊게 하면서 보다 역동적인 공간을 경험하게 하기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르게는 지붕의 앞 뒤 모양이 다름으로 시각적 변화를 유도하면서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맞배지붕을 소백산맥 연봉을 향한 강력한 시각적 축을 형성하고(김봉렬, 1999, p. 78) 후면의 맞배지붕은 누하로 진입할 때 출입자의 머리를 누르는 듯한 답답함을 주지 않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 초석 위에 놓인 하층기둥은 주춧돌의 자연곡선그대로 살려 그랭이질 한 것인데 바깥기둥보다 안쪽 기둥이 휠 씬 가늘다. 누각 상층은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공포는 쇠서 밑의 연꽃무늬 장식의 익공 형식이다. 공포 사이의 화반은 화병과 보상화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모서리에는 용두를 조각하였다.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18세기로 시기적으로 뒤지지만 건 물의 앉음새라든지 의장기법, 장식성 등에서 상당히 뛰어난 건물이다(이응묵, 1995, p. 98).


부석사는 고려시대의 건물로 무량수전, 조사당 외 조선시대의 건물로 안양루, 범종각이 중심축선에 포진하고 있으며 그 외 취현암, 응향각, 삼성각이 조선후기 건물이다. 그리고 신범종각, 보장각, 천왕문, 일주문 그리고 요사채, 삼보전, 종무소가 건축되어졌고 지장전은 1990년 후반지어졌다. 취현암을 비롯한 나머지 건물은 간단히 정리한다.



⑤취현암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로 범종각 위쪽에 있다. 원래 위치는 조사당 동쪽에 있었는데 일제 때 현 자리로 뜯어 옮기면서 원래 건물은 조선 효종 원년(1649)에 수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면4칸, 측면2칸 규모의 맞배집으로 후면에 툇마루가 있다. 기둥과 기둥사이의 주칸이 일반적 건물과 다르게 오른쪽 칸이 가장 넓다. 아마 후대 부엌이 들어서면서 늘여 낸 것으로 보인다. 익공쇠서의 곡선이 우아하고 기둥에서도 배흘림 기법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건물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17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상게서, p. 100).


⑥응향각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최근에 마루를 덧달았다. 1980년 철거하고 뒤로 물려 신축하였다. 원래 강원 건물이었는데 현재는 스님들이 거처하고 있다.


⑦신범종각과 보장각


만세루 위쪽 석축단의 좌우에 있는 건물로 1980년 보수정화 공사이후 신축한 것이다. 신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집 이다. 보장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민도리 맞배지붕의 건물 2동을 석축단 위아래에 따로 건립하여 서로 연결하였다(상게서, p. 100).


⑧삼성각


칠성, 독성, 산신 세분을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아래에 있다. 삼성각은 원래 축화전(祝華殿)이라 불렀는데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다. 1979년 보수 때 까지 원각전(圓覺殿)이라 하였고, 얼마 전까지 목조 아미타 여래 좌상을 모셨다. 장대석으로 4단 쌓은 기단위에 원형 초석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을 세웠는데 지붕은 팔작 형식이다. 그리고 기단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공포는 익공 형식이지만 마치 다포 형식처럼 기둥사이에 주간포를 1구 끼워 넣은 점이 특이하다. 이 건물은 공포의 형태라 부재의 깍음 수법등으로 보아 20세기초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장식성에 치우쳐 법식이 흐트러져 가는 현상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상게서, p. 104).


⑨삼보전


삼성각 서쪽에 위치한 주지스님의 거처로 지어진 건물로 주변에는 낮은 돌 담장이 둘러져 있는데 1980년에 신축하였다.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놓고 세운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익공계 맞배집 이다. 내부는 방 2칸과 부엌 1칸을 두었다(상게서, p.104).


??천왕문과 일주문 천왕문은 산문으로 1980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 다포계 맞배집으로 지어졌다. 1978년에 발굴했는데 원래 조계문 터였고 부석사의 천왕문은 당간지주 바로 위 석축 위에 있었다고 한다. 원래 가람구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주문 역시 1980년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사찰의 경계를 상징하는 산문으로 세워졌다. 지장전은 보장각 위 언덕에 1990년 후반에 맞배집으로 건축되었다.


이외 종무소와 요사채가 범종각 아래 석단에 1980년 이후에 신축한 건물이다.


이상은 부석사 감상의 실제 비평적 감상방법인 첫째, 전체 느낌 찾기, 둘째, 형식 분석하기, 셋째, 해석하기, 넷째, 가치 판단하기를 체계적으로 기술하였다기보다 둘째 형식 분석하기, 셋째 해석하기 단계에 필요한 개념적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였다. 특히 가치판단하기와 부석사가 갖고 있는 신앙체계와 인물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설명이나 해석을 깊이 있게는 하지 못하였다.


창건주 의상과 그의 직계 제자 그이후 부석사가 배출한 고승 석덕들-神琳대덕, 惠哲국사(785-861), 無染國師(800-888), 折中선사(826-900), ?曉대사(826-895), 圓融국사(964-1053), 圓應국사(1307-1382)등-과 부석사의 가람구조의 변화와 신앙체계를 당시 불교 사상사 측면에서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는 지면의 한계와 건축을 지나치게 종교사상으로 연계시켜 설명하거나 해석할 때 건축 본래의 구조적?조형적 이해와 감상에 영향을 크게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Ⅳ. 결 론


우리 나라 사찰 건축감상의 방법론을 모색하고자 건축사학과 불교 교학의 연구와 미술교육을 연계시키면서 사찰건축의 개념적 이해와 그 실천적 방법을 모색하였다. 본 연구에서 구체적 대상을 전제한 감상방안의 제시를 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시안 제시에 머물렀다. 이는 다른 조형예술 영역의 감상도 어렵지만 건축은 전문적 지식과 함께 현행 교육과정에서 미술교과와 연계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학교교육은 건축의 이해. 감상의 체계적 접근이 없었기에 건축의 특성을 살린 방법론 제시는 어려웠다.


오늘날의 교육제도, 교육과정, 그리고 교육의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서구 일색으로 변한 교육 현실은 전통미술문화를 멀리할 뿐만 아니라, 미술과의 이해와 감상 학습시에도 서구적 방법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 미술문화임에도 낯설어하는 현실과 서구적인 시각과 방법론을 통한 전통미술 문화의 접근은 그 본질적 이해나 감상을 어렵게 만든다. 우리의 전통적 조형성을 바탕으로 한 감상 방법론의 제시가 없는 한 오늘 학교 교육에서의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론으로는 왜곡된 이해와 감상이 되기 십상팔구이다.


바람직한 미술문화의 감상은 선, 형, 색의 조형을 넘어 시대정신과 작가의 조형의식에 이뤄져야 한다. 우리의 조형의식과 조형방법으로 제작된 전통적 조형물들은 특히 서구적 조형의식이나 방법론을 떠나 우리의 조형의식과 방법론으로 감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본 연구에서 감상방법의 시론적 모색은 현재 감상 교육의 일반적 방법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적 조건을 감안하여 몇 차례의 시행 착오를 전제하며 필자의 답사 경험을 중심으로 기존의 미술 비평적 감상방법으로 주관적으로 접근하였다. 우리의 전통적 미의식에 바탕 한 방법론의 모색은 큰 과제로 남겨 놓았다.


사찰은 불교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10계 중 윤회의 6도의 세계를 벗어나 성문, 연각, 보살, 불의 성계로 나아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전각은 신중단, 보살단, 불단의 3단의 위계가 질서정연하고 종파에 따라 전각의 구성이 달라진다. 바람직한 감상을 위해서 종파와 신앙체계에 따른 전각의 구성이 어떻게 달라지며, 또한 입지조건에 따른 자연 환경과 조형의지를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조형물로서 건축이 갖는 조형성과 아름다움도 분석하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독자적인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사찰건축 감상은 종합적인 시각을 통한 사찰의 유형과 가람배치, 공간의 특성 등 구조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감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찰은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과정을 고려하여 과거에서 지금에 이르는 모습을 때로는 거시적으로, 때로는 미시적으로 분석?해석하면서 감상하여야 한다. 전각의 배치를 중심으로 공간의 흐름을 체험해보면서 개별적 전각은 전체에서 부분, 실외에서 실내, 실내에서 실외 등 여러 방향을 옮겨가며 공간을 심화 체험하면서 감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축의 아름다움을 조형요소나 원리로 분석하면서 그것이 어디에서 연유되는지 살펴보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 전체의 배치나 구조 못지 않게 부분의 아름다움을 찾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축대, 기단, 단청, 벽화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은 곳곳에 숨어있다. 또한 건축재의 처리방법과 건축기법을 고려하면서 보아야할 것이 많다. 그리고 건축주. 건축가 입장에서 종교적 이상과 건축기법을 고려하면서 조형성, 조형의식, 조형정신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앞의 방법과 태도를 존중하면서 비평적 감상방법인 전체 느낌 갖기, 형식 분석하기, 해석하기, 평가하기의 순서로 사찰건축에 다가가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축은 분명 우리의 육신과 정신에 아우르는 삶 전체를 담는 큰그릇이다. 그 그릇은 그 지역의 문화적 전통과 시대 정신으로 빚어진다. 전통건축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은 옛사람들의 삶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는 가의 질문에 부분적이나마 대답을 준다. 특히 한국의 미의식이 깃 든 전통 사찰건축을 감상한다는 것은 우리의 조형의식, 미의식을 찾아가는 순례이다.


끝으로 지금까지 우리 건축을 감상하는 구체적 방법론을 모색한 연구성과가 없는 현재에 이 시론을 토대로 보다 다양한 입장에서 참신한 방법론이 제시되어 건축의 이해와 감상의 활성화에 기여하길 희망한다.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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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구(1990), 부석사 무량수전 , 한국의 옛 조형의미, 기문당

2)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물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 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큼함이 이를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어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림이 없다.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1994, p. 14, 밑줄은 필자가 임의로 그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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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How to Enjoy Korean Traditional Temples



Yi, Sung-do


The aim of this study is to find some ways to help people understand and appreciate the Korean traditional temples with some knowledge of its construction philosophy along with the accompanied knowledge of history of construction, Buddhist doctrines, and art education. A Buddhist temple is constructed according to the Buddhist world-view which states a progress from the world of delusion to that of enlightenment. The inside of a main building is composed of three stages: a Buddha(s) platform, a Bodhisattva(s) platform, and a Guardian gods platform. The constitution of the building varies according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Order. To understand and enjoy a Buddhist building one needs an understanding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Order the building belongs to. one should also be careful to see how the building is constructed in its relation to its natural environment and the purpose of the builder's modeling. The formative quality and beauty of the building should be analysed and interpreted according to the above-mentioned elements, not to speak of in its own status as a building.

A concrete appreciation of a Buddhist temple is enhanced with some knowledge of its form, its arrangement, and its spatial characteristics. Since a temple is a product of its geographical and historical environments, one should view it chronologically, approaching it macrophsically, and microphysically. Experiencing the spatial flow of the building arrangement, and changing the viewpoint from the individual building to the whole temple precincts, from the inside to the outside, sometimes from the outside to the inside, one should be able to enjoy the spatial and constitutional beauty. one should also try to catch the beauty of the building through an analysis of its moulding elements and principles, understanding from where its beauty originates. one should try to find out the beauty of the small parts of the building, not to mention the arrangement and the structure of the building. Attention should be given to such areas as dealing methods of the building materials and construction techniques. Considering the relation between the religious ideas and the construction, one should be able to find out the formation characteristics, the formation consciousness, and the formation spirit.


Having the aforesaid attitudes, one should approach to the enjoyment of a Buddhist temple in the order of feeling the whole, analysing the form, interpreting, and finally evaluating.




한국 전통 사찰 감상론


이 성 도


본 연구는 우리 사찰 건축 감상의 방법론을 모색하고자 건축사, 불교학의 연구와 미술교육을 연계시키면서 사찰건축의 개념적 이해와 감상의 실천적 방법을 모색하였다. 사찰 건축은 불교 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전각 은 신중단, 보살단, 불단의 3단의 위계가 질서 정연하고 종파에 따라 전각의 구성이 달라진다. 바람직한 감상을 위해서 종파와 신앙체계에 따른 전각의 구성이 어떻게 달라지며 또한 입지조 건에 따른 자연환경과 조형의지를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조형물로서 건축이 갖는 조형성과 아름다움도 분석하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독자적인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사찰건축은 종합적인 시각을 통한 사찰의 유형과 가람배치, 공간의 특성 등 구조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감상이 이루어져야한다. 사찰은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과정을 고려 하여 과거에서 지금에 이르는 모습을 때로는 거시적으로, 때로는 미시적으로 분석. 해석하면서 감상하여야 한다. 전각의 배치를 중심으로 공간의 흐름을 체험해보면서 개별적 전각은 전체에 서 부분, 실외에서 실내, 실내에서 실외 등 여러 방향을 옮겨가며 공간을 심화 체험하면서 감상 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축의 아름다움을 조형요소나 원리로 분석하면서 그것이 어디에서 연유 되는지 살펴보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 전체의 배치나 구조 못지 않게 부분의 아름다움을 찾아 보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건축재의 처리방법과 건축기법을 고려하면서 보아야할 것이 많다. 그 리고 건축주. 건축가 입장에서 종교적 이상과 건축기법을 고려하면서 조형성, 조형의식, 조형정 신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앞의 방법과 태도를 존중하면서 비평적 감상방법인 전체느낌 갖기, 형식 분석하기, 해석하기, 평가하기의 순으로 사찰 건축에 다가가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끝-



1)

2)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물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 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 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큼함이 이를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어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림이 없다. ...(최 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1994, p. 14, 밑줄은 필자가 임의로 그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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