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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度寺

초암 정만순 2018. 2. 13. 13:22

            


通度寺


 

 
 

          


         



통도사       

통도사

통도사 전경,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佛寶·法寶·僧寶로 일컬이지는 세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佛寶)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산 이름을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 옛 이름은 축서산(鷲棲山)이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는 뜻,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③ 산형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 등이 있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특히 불사리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 기록은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는 계단(戒壇)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아 득도시켰다. 이에 통도사는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찰이 아니고 후에 금강계단이라고 불려진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뒤 고려 초에는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초기 선종대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중요한 석조 조형으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배례석(拜禮石), 봉발대(奉鉢臺), 그리고 국장생석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하는 유물이고 그 밖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다.

물론 조형상으로 가장 앞서는 석조물로는 영산전(靈山殿)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 위의 폐탑재를 들 수 있으나, 이는 이미 파괴된 채 기단부의 사리공(舍利孔)만이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이 어떻게 하여 파괴되었는지 또는 최초에 건립된 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특징

1. 가람배치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신라 이래의 전통 법식에서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향하였는데. 서쪽에서부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상로전(上爐殿)과 중로전(中爐殿)·하로전(下爐殿)으로 이어진다. 또, 그 서쪽 끝에 보광선원(普光禪院)이 자리잡고 있다.

본래 이 절터에는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으나 창건주 자장율사가 이들을 제도하고, 한 마리 용을 이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신지(九龍神池)의 자그마한 상징적 못이 있다.

먼저 동쪽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천왕문(天王門)·불이문(不二門)의 세 문을 통과하면 금강계단에 이르게 된다. 금강계단 앞의 목조건물인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5년(인조 23) 우운(友雲)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상부의 기본 형태는 丁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정면격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을 대웅전이라고 하지만 남쪽 정면의 금강계단이 그 정전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건물의 바로 뒤쪽에는 통도사의 중심이 되는 금강계단 불사리탑(佛舍利塔)이 있다. 이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불사리를 세 곳에 나누어 황룡사탑·태화사탑, 그리고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하는 바로 불사리 계단이다. 통도사의 특징은 이 불사리 계단에 있으며 또 이로 인하여 불보사찰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부처의 신골(身骨)인 사리를 봉안하였으므로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으며, 내부에는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이 조각되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 의미는 계단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는 신앙 때문이다. 그리고 금강계단 목조건물의 천장에 새겨진 국화와 모란꽃의 문양 또는 불단에 새겨진 조각은 주목되는 작품이다.

(1) 상로전

상로전의 법당은 금강계단과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應眞殿)·명부전(冥府殿)·삼성각(三聖閣)·산신각·일로향각(一爐香閣)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된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서 창건한 시기는 1677년(숙종 3)이며, 내부에는 석가삼존과 그 주위에 16나한상(十六羅漢像)을 봉안하였다. 후벽의 탱화를 위시하여 내외 벽화는 주목되는 불화들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5호로 지정된 명부전은 1369년(공민왕 18)에 창건되었고, 1760년(영조 36) 춘파(春波)가 고쳐 지은 건물로서,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十王像)·탱화를 봉안하였다.

삼성각은 고려 말의 삼화상(三和尙)인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로서, 1870년(고종 7) 영인(靈印)에 의하여 창건되었고, 현존 건물은 1935년 경봉(鏡峰)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건물의 내부 측면에는 산신탱(山神幀)·칠성탱(七星幀)을 봉안하고 있으며, 산신각은 1761년에 초창된 이래 철종대에 중수를 거친 사방 1칸의 건물이다.

(2) 중로전

중로전의 건물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된 관음전(觀音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용화전(龍華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통도사 대광명전(大光明殿), 세존비각(世尊碑閣), 장경각(藏經閣), 해장보각(海藏寶閣), 황화각(皇華閣), 감로당(甘露堂), 원통방(圓通房), 화엄전(華嚴殿), 전향각(篆香閣) 등을 들 수 있다.

관음전의 창건은 1725년 용암(龍岩)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며, 내부에는 독존상으로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용화전은 1369년에 창건되었으나 창건주는 미상이며, 1725년 청성(淸性)이 중건하였다. 내부에는 역시 약 2m에 달하는 미륵좌상을 봉안하였다. 대광명전은 중로전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세존비각은 1706년에 건립된 사바교주 석가여래 영골부도비의 비각으로서 불사리 계단에 대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채팽윤(蔡彭胤)이 지었으며 중국에서 자장율사가 가져온 불사리·가사 등에 관한 내용과 임진왜란 당시 사리 수호에 따르는 수난의 사실들을 기재하였다. 비신의 높이는 약 2.5m, 너비는 약 1m이다.

장경각에 있는 목조 경판은 『능엄경(楞嚴經)』·『기신론(起信論)』·『금강경』·『법수(法數)』·『사집(四集)』·『부모은중경』 등 15종이 있다.

개산조당(開山祖堂) 바로 뒤에 있는 해장보각은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주위에는 고려대장경 완질이 봉안되어 있다. 요사(寮舍)의 중심이 되는 감로당은 창건이 1340년(충혜왕 복위 1)이나 현존 건물은 1887년(고종 24) 덕명(德溟)이 중건한 것이다. 口자형 건물로서 약 86칸의 대소 방사로 이루어져 있다.

감로당과 가까운 원통방은 1341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존 건물은 감로당과 함께 탄해(坦亥)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화엄전은 창건이 1368년이며, 1762년에 중건하였고, 1882년 불타서 없어진 것을 1887년 구련(九蓮)이 중건하였고, 1970년 재건하였다.

(3) 하로전

하로전의 중요 건물들은 영산전·극락전·약사전(藥師殿)·만세루(萬歲樓)·영각(影閣)·범종각 등이 있다. 이들 건물배치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배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북쪽의 중심 건물과 그 좌우, 그리고 남쪽 전면에 누각을 두었다. 이러한 배치 방식은 하로전 일대의 건물군이 가장 짜임새 있게 배치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곳 일대의 법당들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 중심 건물은 영산전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된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내외 벽의 벽화가 주목되고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 불상과 팔상탱화(八相幀畵)를 봉안하였다. 팔상탱화는 1775년에 그린 것이며, 본존 후불탱은 1734년의 작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양식이나 구조로 볼 때 대웅전 건물과 함께 가장 주목받는 건물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1369년 성곡(星谷)이 창건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추녀의 네 귀는 활주로 받치고 있는 아담한 법당으로, 내부에는 아미타삼존을 봉안하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된 약사전 또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동시에 창건한 아담한 맞배건물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된 만세루는 창건이 미상이나 1644년 영숙(靈淑)이 중건하였다.

역대 조사(祖師) 및 통도사 고승들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은 1705년 처학(處學)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범종각은 2층 누각 건물로서 정면 상하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의 상하에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대종(大鐘) 등 사물(四物)을 안치하였다. 이들은 모두 조석 예불시에 사용하는 의식용구이다. 그리고 1757년에 건립한 응향각(凝香閣), 도서실인 명월료(明月寮)와 금당(金堂)을 위시하여 종무소 건물들이 즐비하다.

또, 절의 세 문 가운데 일주문은 1305년(충렬왕 31)에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현판은 대원군의 필적이며, 기둥 좌우의 ‘불지종가 국지대찰(佛之宗家 國之大刹)’은 김규진(金圭鎭)의 글씨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된 통도사 천왕문은 사천왕을 봉안한 문이다. 사찰수호 기능을 담당하는 곳으로 목조 사천왕이 각기 특징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된 통도사 불이문은 1305년에 창건되었으며, 편액 ‘불이문(不二門)’은 송나라 미불(米芾)의 필적이다. 건물은 매우 단조로우며, 중앙에는 대들보 대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를 받쳐 지붕의 무게를 유지하는 건물이다.

사찰 경내의 현존하는 석조물로는 역시 금강계단이 가장 중요하다. 통도사 창건의 이유가 바로 이 계단에 있기 때문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불사리 계단이 축조된 이래 특히 고려시대에 와서는 이 계단에 얽힌 수많은 기록이 전해 오고 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계단의 석종을 들어 보려는 일이 잦았으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석함 속에는 긴 구렁이 또는 큰 두꺼비가 있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1235년(고종 22) 상장군(上將軍)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郎) 유석(庾碩)에 의하여 계단의 석종이 들려졌다.

“큰 일에 상장군 김공 이생과 유시랑 석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 왕이 하사한 旗)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뚜껑을 들어 예하고자 하니, 승이 그 전의 일을 들면서 어렵다고 하였다. 김이생과 유석이 군사를 시켜 굳이 돌뚜껑을 들게 하였다……. 서로 돌려보며 예경하였는데 통이 조금 상해서 금간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수정함(水晶函)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 기부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때는 강화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째인 을미년(1235)이었다(三國遺事 卷3 前後所將舍利條).”

이와 같은 기록이 문헌상으로는 계단에 손을 댄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다가 1379년(우왕 5) 고려 말에 국세가 약해진 틈을 타서 빈번히 왜구들이 침입하여 이 계단은 일대 수난을 겪는다. 즉, 이색의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記)」에 따르면, 통도사의 주지 월송(月松)이 왜구들의 침입을 피하여 1379년 8월 24일 석가여래의 사리·가사 등을 가지고 서울의 평리(評理) 이득분(李得分)을 만난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영남지방이 왜구의 수중에 들자 의승장 유정(惟政)은 통도사의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휴정(休靜)에게 보냈다. 이에 휴정은 “영남이 침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곳 역시 안전한 장소는 못된다. 영축산은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명한 곳이다. 계(戒)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신보(信寶)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하였다.

이에 1함은 돌려 보내고 나머지 1함은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 안치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 계단을 다시 복구하였으며, 1652년(효종 3) 정인(淨人)이, 1705년에는 성능(性能)이 중수하였으며, 그 뒤에도 영조·순조·헌종·고종 대에 이르는 여러 차례의 중수와 1919년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단의 크기는 초층 너비 약 990㎝, 총높이 약 300㎝이며, 형태는 2중의 넓은 방단(方壇) 위에 석종(石鐘)의 부도를 안치한 지극히 간단한 구조이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입상을 배치하였고, 기단 상하면 돌에는 비천상과 불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석단 외곽에는 석조 난간을 돌렸고, 계단 정면에는 석문을 두었으나 모두 후기의 작이다. 계단의 초층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나타냈으나 모두 도상적 경직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상층 기단 면석의 불보살 및 비천상의 양식은 유연한 수법이 하층보다는 월등하다.

계단의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수법이 다른 조각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동서 좌우에는 유연한 비천상을 부조로 나타냈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보합(寶盒)의 향로를 조각하였다.


2. 석조물

대체로 통도사의 석조물은 고려 선종대를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그 대표적 조형으로는 극락전 앞의 배례석·삼층석탑, 그리고 사지경계(四至境界)인 국장생석표 등이다.

(1) 배례석

배례석이란 국왕배례지석(國王拜禮之石)이라는 상징적 조형물로서 신라 사찰에서도 자주 볼 수 있으나 이곳 배례석은 1085년(선종 2)에 조성되었다. 길이 175㎝, 너비 87㎝의 판석으로 3절되었으며, 상면에는 아름다운 연화문과 운문으로 조각되었다. 현재의 명문은 ‘太康王一年乙丑二月日造’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太康十一年乙丑二月日造’의 위각이고 또 중간의 판석(길이 35㎝, 너비 87㎝)도 후에 보충된 것임이 최근 판명되었다.

(2) 삼층석탑

배례석 바로 옆에 있는 삼층석탑 역시 신라 말기의 양식이나 이 시대 선종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2중기단 위에 3층의 석탑으로서 전체 수법은 간략하게 조성되었으나 기단에 나타난 안상(眼象) 등 장식된 수법은 고려의 석탑으로 볼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3) 국장생석표

통도사에서 약 2㎞ 거리의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의 보물 제74호로 지정된 국장생석표 역시 고려 선종대의 사찰 경계로 알려져 있다. 이와 동일한 명문을 지닌 장생석표가 울산광역시 울주구 삼남면 상천리에서 근래 발견되었으나 상부가 단절되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의하면, 이와 같은 표지는 절을 중심으로 사방에 12장생을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형태는 목방(木榜)·석비(石碑)·석적장생(石磧長生) 등으로 분류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석비장생뿐이며, 이들은 고려시대 이두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금석문이다.

3. 기타 중요 유물

그 밖에 이 절에 현존하는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34호인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471호인 양산 통도사 봉발탑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인 통도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6호인 자장율사 진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7호인 통도사 삼화상 진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8호인 통도사 팔금강도, 보물 제1041호인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 보물 제1353호 통도사 영산회상탱, 보물 제1042호인 통도사 대광명전 산신불도가 있다.

그리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9호인 대광명전 신중탱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1호인 오계수호 신장도, 보물 제757호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권46, 보물 제738호인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菩薩最上乘無生戒經)』, 보물 제1194호와 보물 제1196호인 『묘법연화경』권2, 보물 제1195호인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권9~10,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인 청동은입사향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인 청동은입사정병(靑銅銀入絲淨甁)이 있다.

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인 청동여래좌상·청동사리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인 인적(印籍) 및 동인(銅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6호인 청동여래입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9호인 양산 통도사 동종 및 종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0호인 청동시루(철부포함), 보물 제1373호 양산 통도사 금동천문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금니법화경(金泥法華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인 『금니금강경』 등이 있다.

그 밖에 전석가여래가사(傳釋迦如來袈裟)·전자장율사가사(傳慈藏律師袈裟)·고려은입사동제향로(高麗銀入絲銅製香爐)·청개와(靑蓋瓦)·감로병(甘露甁)·육환철장(六環鐵杖)·동자상(童子像)·동탑(銅塔)·화엄만다라(華嚴曼陀羅)·육각요령(六角搖鈴)·금자병풍(金字屛風)·구룡병풍(九龍屛風)·삼장서행노정기(三藏西行路程記) 등이 있다.

산내 암자로는 극락암·비로암·자장암·백운암·축서암·취운암·수도암·사명암·옥련암·보타암·백련암·안양암·서운암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통도사지(通度寺誌)』
  •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 『한국의 사찰』4 통도사(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4)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朝鮮總督府, 1919
  •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佛寶·法寶·僧寶로 일컬이지는 세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佛寶)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산 이름을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 옛 이름은 축서산(鷲棲山)이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는 뜻,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③ 산형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 등이 있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특히 불사리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 기록은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는 계단(戒壇)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아 득도시켰다. 이에 통도사는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찰이 아니고 후에 금강계단이라고 불려진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뒤 고려 초에는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초기 선종대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중요한 석조 조형으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배례석(拜禮石), 봉발대(奉鉢臺), 그리고 국장생석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하는 유물이고 그 밖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다.

    물론 조형상으로 가장 앞서는 석조물로는 영산전(靈山殿)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 위의 폐탑재를 들 수 있으나, 이는 이미 파괴된 채 기단부의 사리공(舍利孔)만이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이 어떻게 하여 파괴되었는지 또는 최초에 건립된 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특징

    1. 가람배치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신라 이래의 전통 법식에서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향하였는데. 서쪽에서부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상로전(上爐殿)과 중로전(中爐殿)·하로전(下爐殿)으로 이어진다. 또, 그 서쪽 끝에 보광선원(普光禪院)이 자리잡고 있다.

    본래 이 절터에는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으나 창건주 자장율사가 이들을 제도하고, 한 마리 용을 이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신지(九龍神池)의 자그마한 상징적 못이 있다.

    먼저 동쪽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천왕문(天王門)·불이문(不二門)의 세 문을 통과하면 금강계단에 이르게 된다. 금강계단 앞의 목조건물인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5년(인조 23) 우운(友雲)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상부의 기본 형태는 丁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정면격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을 대웅전이라고 하지만 남쪽 정면의 금강계단이 그 정전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건물의 바로 뒤쪽에는 통도사의 중심이 되는 금강계단 불사리탑(佛舍利塔)이 있다. 이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불사리를 세 곳에 나누어 황룡사탑·태화사탑, 그리고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하는 바로 불사리 계단이다. 통도사의 특징은 이 불사리 계단에 있으며 또 이로 인하여 불보사찰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부처의 신골(身骨)인 사리를 봉안하였으므로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으며, 내부에는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이 조각되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 의미는 계단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는 신앙 때문이다. 그리고 금강계단 목조건물의 천장에 새겨진 국화와 모란꽃의 문양 또는 불단에 새겨진 조각은 주목되는 작품이다.

    (1) 상로전

    상로전의 법당은 금강계단과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應眞殿)·명부전(冥府殿)·삼성각(三聖閣)·산신각·일로향각(一爐香閣)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된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서 창건한 시기는 1677년(숙종 3)이며, 내부에는 석가삼존과 그 주위에 16나한상(十六羅漢像)을 봉안하였다. 후벽의 탱화를 위시하여 내외 벽화는 주목되는 불화들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5호로 지정된 명부전은 1369년(공민왕 18)에 창건되었고, 1760년(영조 36) 춘파(春波)가 고쳐 지은 건물로서,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十王像)·탱화를 봉안하였다.

    삼성각은 고려 말의 삼화상(三和尙)인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로서, 1870년(고종 7) 영인(靈印)에 의하여 창건되었고, 현존 건물은 1935년 경봉(鏡峰)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건물의 내부 측면에는 산신탱(山神幀)·칠성탱(七星幀)을 봉안하고 있으며, 산신각은 1761년에 초창된 이래 철종대에 중수를 거친 사방 1칸의 건물이다.

    (2) 중로전

    중로전의 건물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된 관음전(觀音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용화전(龍華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통도사 대광명전(大光明殿), 세존비각(世尊碑閣), 장경각(藏經閣), 해장보각(海藏寶閣), 황화각(皇華閣), 감로당(甘露堂), 원통방(圓通房), 화엄전(華嚴殿), 전향각(篆香閣) 등을 들 수 있다.

    관음전의 창건은 1725년 용암(龍岩)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며, 내부에는 독존상으로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용화전은 1369년에 창건되었으나 창건주는 미상이며, 1725년 청성(淸性)이 중건하였다. 내부에는 역시 약 2m에 달하는 미륵좌상을 봉안하였다. 대광명전은 중로전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세존비각은 1706년에 건립된 사바교주 석가여래 영골부도비의 비각으로서 불사리 계단에 대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채팽윤(蔡彭胤)이 지었으며 중국에서 자장율사가 가져온 불사리·가사 등에 관한 내용과 임진왜란 당시 사리 수호에 따르는 수난의 사실들을 기재하였다. 비신의 높이는 약 2.5m, 너비는 약 1m이다.

    장경각에 있는 목조 경판은 『능엄경(楞嚴經)』·『기신론(起信論)』·『금강경』·『법수(法數)』·『사집(四集)』·『부모은중경』 등 15종이 있다.

    개산조당(開山祖堂) 바로 뒤에 있는 해장보각은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주위에는 고려대장경 완질이 봉안되어 있다. 요사(寮舍)의 중심이 되는 감로당은 창건이 1340년(충혜왕 복위 1)이나 현존 건물은 1887년(고종 24) 덕명(德溟)이 중건한 것이다. 口자형 건물로서 약 86칸의 대소 방사로 이루어져 있다.

    감로당과 가까운 원통방은 1341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존 건물은 감로당과 함께 탄해(坦亥)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화엄전은 창건이 1368년이며, 1762년에 중건하였고, 1882년 불타서 없어진 것을 1887년 구련(九蓮)이 중건하였고, 1970년 재건하였다.

    (3) 하로전

    하로전의 중요 건물들은 영산전·극락전·약사전(藥師殿)·만세루(萬歲樓)·영각(影閣)·범종각 등이 있다. 이들 건물배치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배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북쪽의 중심 건물과 그 좌우, 그리고 남쪽 전면에 누각을 두었다. 이러한 배치 방식은 하로전 일대의 건물군이 가장 짜임새 있게 배치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곳 일대의 법당들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 중심 건물은 영산전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된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내외 벽의 벽화가 주목되고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 불상과 팔상탱화(八相幀畵)를 봉안하였다. 팔상탱화는 1775년에 그린 것이며, 본존 후불탱은 1734년의 작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양식이나 구조로 볼 때 대웅전 건물과 함께 가장 주목받는 건물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1369년 성곡(星谷)이 창건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추녀의 네 귀는 활주로 받치고 있는 아담한 법당으로, 내부에는 아미타삼존을 봉안하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된 약사전 또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동시에 창건한 아담한 맞배건물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된 만세루는 창건이 미상이나 1644년 영숙(靈淑)이 중건하였다.

    역대 조사(祖師) 및 통도사 고승들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은 1705년 처학(處學)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범종각은 2층 누각 건물로서 정면 상하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의 상하에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대종(大鐘) 등 사물(四物)을 안치하였다. 이들은 모두 조석 예불시에 사용하는 의식용구이다. 그리고 1757년에 건립한 응향각(凝香閣), 도서실인 명월료(明月寮)와 금당(金堂)을 위시하여 종무소 건물들이 즐비하다.

    또, 절의 세 문 가운데 일주문은 1305년(충렬왕 31)에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현판은 대원군의 필적이며, 기둥 좌우의 ‘불지종가 국지대찰(佛之宗家 國之大刹)’은 김규진(金圭鎭)의 글씨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된 통도사 천왕문은 사천왕을 봉안한 문이다. 사찰수호 기능을 담당하는 곳으로 목조 사천왕이 각기 특징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된 통도사 불이문은 1305년에 창건되었으며, 편액 ‘불이문(不二門)’은 송나라 미불(米芾)의 필적이다. 건물은 매우 단조로우며, 중앙에는 대들보 대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를 받쳐 지붕의 무게를 유지하는 건물이다.

    사찰 경내의 현존하는 석조물로는 역시 금강계단이 가장 중요하다. 통도사 창건의 이유가 바로 이 계단에 있기 때문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불사리 계단이 축조된 이래 특히 고려시대에 와서는 이 계단에 얽힌 수많은 기록이 전해 오고 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계단의 석종을 들어 보려는 일이 잦았으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석함 속에는 긴 구렁이 또는 큰 두꺼비가 있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1235년(고종 22) 상장군(上將軍)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郎) 유석(庾碩)에 의하여 계단의 석종이 들려졌다.

    “큰 일에 상장군 김공 이생과 유시랑 석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 왕이 하사한 旗)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뚜껑을 들어 예하고자 하니, 승이 그 전의 일을 들면서 어렵다고 하였다. 김이생과 유석이 군사를 시켜 굳이 돌뚜껑을 들게 하였다……. 서로 돌려보며 예경하였는데 통이 조금 상해서 금간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수정함(水晶函)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 기부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때는 강화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째인 을미년(1235)이었다(三國遺事 卷3 前後所將舍利條).”

    이와 같은 기록이 문헌상으로는 계단에 손을 댄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다가 1379년(우왕 5) 고려 말에 국세가 약해진 틈을 타서 빈번히 왜구들이 침입하여 이 계단은 일대 수난을 겪는다. 즉, 이색의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記)」에 따르면, 통도사의 주지 월송(月松)이 왜구들의 침입을 피하여 1379년 8월 24일 석가여래의 사리·가사 등을 가지고 서울의 평리(評理) 이득분(李得分)을 만난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영남지방이 왜구의 수중에 들자 의승장 유정(惟政)은 통도사의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휴정(休靜)에게 보냈다. 이에 휴정은 “영남이 침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곳 역시 안전한 장소는 못된다. 영축산은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명한 곳이다. 계(戒)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신보(信寶)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하였다.

    이에 1함은 돌려 보내고 나머지 1함은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 안치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 계단을 다시 복구하였으며, 1652년(효종 3) 정인(淨人)이, 1705년에는 성능(性能)이 중수하였으며, 그 뒤에도 영조·순조·헌종·고종 대에 이르는 여러 차례의 중수와 1919년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단의 크기는 초층 너비 약 990㎝, 총높이 약 300㎝이며, 형태는 2중의 넓은 방단(方壇) 위에 석종(石鐘)의 부도를 안치한 지극히 간단한 구조이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입상을 배치하였고, 기단 상하면 돌에는 비천상과 불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석단 외곽에는 석조 난간을 돌렸고, 계단 정면에는 석문을 두었으나 모두 후기의 작이다. 계단의 초층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나타냈으나 모두 도상적 경직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상층 기단 면석의 불보살 및 비천상의 양식은 유연한 수법이 하층보다는 월등하다.

    계단의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수법이 다른 조각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동서 좌우에는 유연한 비천상을 부조로 나타냈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보합(寶盒)의 향로를 조각하였다.

    2. 석조물

    대체로 통도사의 석조물은 고려 선종대를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그 대표적 조형으로는 극락전 앞의 배례석·삼층석탑, 그리고 사지경계(四至境界)인 국장생석표 등이다.

    (1) 배례석

    배례석이란 국왕배례지석(國王拜禮之石)이라는 상징적 조형물로서 신라 사찰에서도 자주 볼 수 있으나 이곳 배례석은 1085년(선종 2)에 조성되었다. 길이 175㎝, 너비 87㎝의 판석으로 3절되었으며, 상면에는 아름다운 연화문과 운문으로 조각되었다. 현재의 명문은 ‘太康王一年乙丑二月日造’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太康十一年乙丑二月日造’의 위각이고 또 중간의 판석(길이 35㎝, 너비 87㎝)도 후에 보충된 것임이 최근 판명되었다.

    (2) 삼층석탑

    배례석 바로 옆에 있는 삼층석탑 역시 신라 말기의 양식이나 이 시대 선종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2중기단 위에 3층의 석탑으로서 전체 수법은 간략하게 조성되었으나 기단에 나타난 안상(眼象) 등 장식된 수법은 고려의 석탑으로 볼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3) 국장생석표

    통도사에서 약 2㎞ 거리의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의 보물 제74호로 지정된 국장생석표 역시 고려 선종대의 사찰 경계로 알려져 있다. 이와 동일한 명문을 지닌 장생석표가 울산광역시 울주구 삼남면 상천리에서 근래 발견되었으나 상부가 단절되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의하면, 이와 같은 표지는 절을 중심으로 사방에 12장생을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형태는 목방(木榜)·석비(石碑)·석적장생(石磧長生) 등으로 분류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석비장생뿐이며, 이들은 고려시대 이두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금석문이다.

    3. 기타 중요 유물

    그 밖에 이 절에 현존하는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34호인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471호인 양산 통도사 봉발탑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인 통도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6호인 자장율사 진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7호인 통도사 삼화상 진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8호인 통도사 팔금강도, 보물 제1041호인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 보물 제1353호 통도사 영산회상탱, 보물 제1042호인 통도사 대광명전 산신불도가 있다.

    그리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9호인 대광명전 신중탱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1호인 오계수호 신장도, 보물 제757호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권46, 보물 제738호인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菩薩最上乘無生戒經)』, 보물 제1194호와 보물 제1196호인 『묘법연화경』권2, 보물 제1195호인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권9~10,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인 청동은입사향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인 청동은입사정병(靑銅銀入絲淨甁)이 있다.

    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인 청동여래좌상·청동사리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인 인적(印籍) 및 동인(銅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6호인 청동여래입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9호인 양산 통도사 동종 및 종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0호인 청동시루(철부포함), 보물 제1373호 양산 통도사 금동천문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금니법화경(金泥法華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인 『금니금강경』 등이 있다.

    그 밖에 전석가여래가사(傳釋迦如來袈裟)·전자장율사가사(傳慈藏律師袈裟)·고려은입사동제향로(高麗銀入絲銅製香爐)·청개와(靑蓋瓦)·감로병(甘露甁)·육환철장(六環鐵杖)·동자상(童子像)·동탑(銅塔)·화엄만다라(華嚴曼陀羅)·육각요령(六角搖鈴)·금자병풍(金字屛風)·구룡병풍(九龍屛風)·삼장서행노정기(三藏西行路程記) 등이 있다.

    산내 암자로는 극락암·비로암·자장암·백운암·축서암·취운암·수도암·사명암·옥련암·보타암·백련암·안양암·서운암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통도사지(通度寺誌)』
    •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 『한국의 사찰』4 통도사(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4)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朝鮮總督府, 1919)



  •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로 법보(法寶) 해인사, 승보(僧寶) 송광사와 함께 불보(佛寶)로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이다. 646년(선덕왕 15)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사리·가사·대장경 등을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창건한 절이다. 이와 같이 불사리와 대장경이 최초로 봉안된 사찰로 창건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절이었으며 이후 신라 율종(律宗)의 근본도량이면서 신라 승단(僧團)의 중심지가 되었다.

                


    절의 이름은 승려가 되려는 출가자들이 모두 금강계단에서 득도하거나 모든 법을 깨달아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또는 산의 형세가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자장율사가 이곳 연못에 사는 9마리 용을 항복시키고 대가람을 이루었는데 1마리 용만 머물게 하여 절을 수호했다고 하는 설화가 있으며 지금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지(九龍池)가 상징적으로 남아 있다. 처음에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한 규모가 작은 절이었으나 고려 선종대에 크게 확장되어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石鐘形) 부도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3층석탑 및 배례석(拜禮石), 봉발탑(奉鉢塔),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 등이 건립되었다. 그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리고 1603년(선조 36) 송운대사(松雲大師)에 의해 재건된 뒤, 1641년(인조 19) 우운대사(友雲大師)가 다시 중건하여 대가람이 되었다.

    현재 가람배치는 독특한 형태로 되어 있는데 동서축을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건물이 배열되어 있다. 즉 대웅전(보물 제144호)과 금강계단을 비롯하여 응진전·명부전 등의 상로전(上爐殿)과 관음전·용화전·대광명전·장경각·황화각·화엄전 등의 중로전(中爐殿), 영산전·극락전·약사전·만세루(萬歲樓)·영각(影閣) 등의 하로전(下爐殿)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가람구조는 금강계단 중심에서 점차 대웅전 중심의 공간배치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건물들은 모두 조선시대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주위에 회랑을 돌리지 않고 삼문(三門)을 두어 구분했는데 일주문(一柱門)은 완전히 절의 영역 밖에 있으며 천왕문(天王門)과 불이문을 들어서야 각 전각들에 이르게 된다. 중요문화재로는 국장생석표(보물 제74호)·은입사동제향로(보물 제334호)·봉발탑(보물 제471호) 등이 있다. 이밖에 석가여래가사·자장율사가사·고려감지금니화엄경·고려은입사동제향로·동판천문도·감로병·육환철장(六環鐵杖)·동자상·청동소탑·법라·화엄만다라·청동요령·금자법화경·구룡병풍·삼장서행노정기(三藏西行路程記) 등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많은 유물이 최근에 건립된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부속암자로는 극락암·비로암·자장암·백운암·축서암·취운암·수도암·사명암·옥련암 등이 있다.


    통도사국장생석표

    보물 제74호. 높이 166cm, 너비 60cm. 통도사의 경내를 표시한 것으로 동남방 약 2㎞ 지점의 도로변에 있다. 국장생이라는 말은 국명에 의해 건립된 장생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원래 장생은 절이나 마을 입구 및 길가에 세워진 마을의 수호신으로 벽사·비보(裨補)의 기능과 함께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의 역할을 했으며 마을 사람들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장생표

    통도사국장생석표(1085), 보물 제74호, 경남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

    신라와 조선시대에 걸쳐 장생(長生)·장생표주(長生標柱)·목방장생표(木榜長生標)·석적장생표(石磧長生標)·석비장생표(石碑長生標)·국장생석표·황장생·장승(長承)·장생우(長栍偶)·장성(長性 또는 長城)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는 장승이란 명칭이 일반화되었으며 입목(立木)·입석(立石)·입적(立磧) 등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져 크게 유행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의하면 통도사 주변의 산천 비보(裨補)를 위해 12곳에 장생표를 세웠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이정표의 역할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한 도참사상과도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로는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 입구, 경상남도 밀양시 무한면 무안리, 경상남도 울산시 울주구 삼남면 상천리 등의 장생을 들 수 있는데 특히 밀양과 울산에 있는 장생은 통도사 장생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 장생은 앞면에 해서체로 새겨진 명문을 기초로 1085년(선종 2)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문을 통해서 당시 사찰과 관청 간의 관계를 알 수 있으며 이두문(吏讀文)이 포함되어 있어 금석문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


    통도사금강계단

    국보 제290호. 높이 300cm, 너비 990cm. 646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경주 황룡사탑, 울산 태화사탑과 함께 봉안한 곳으로 매년 초하루와 보름날에 계(戒)를 설했다고 한다. 금강계단이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받은 계법이 금강(金剛)과 같이 단단하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조에 의하면 사리가 도난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금강계단의 석함 안에는 구렁이와 두꺼비가 있다고 했으나 1235년(고종 22) 김이생(金利生)과 경석(庚碩)이 군사를 시켜 석종을 들어 보았더니 작은 석함의 유리통 안에 사리 4개가 있었다고 한다.

    금강계단

    금강계단 전경

    〈양산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 梁山通度寺釋迦如來舍利記〉에는 1379년(우왕 5) 왜구의 침입으로 주지 월송대사(月松大師)가 불사리를 송경(松京)으로 옮겨오자 왕과 왕비가 예를 다하여 공경하여 사리의 분신(分身)을 얻었다고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통도사의 사리가 왜구에 의해 도난당했는데 백옥(白玉)거사가 적의 포로로 있다가 사리를 다시 찾아온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임진왜란을 피해 사리를 대소 2함(函)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는 휴정(休靜)에게 보냈으나 자장의 뜻을 받들어 1함을 되돌려 보내어 1603년 통도사 계단을 중수한 뒤에 봉안했으며, 나머지 1함은 태백산 살나사(薩那寺 : 葛盤寺·淨岩寺)에 안치했다. 그러나 〈건봉사석가치상립탑비 乾鳳寺釋迦齒相立塔碑〉에 의하면 사명대사가 왜구로부터 다시 찾은 통도사의 사리는 금강산 건봉사와 대구(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용연사(龍淵寺) 석조계단에 나누어 봉안했다고 한다. 특히 용연사의 경우 통도사 금강계단을 모방하여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주목된다. 1652년(효종 3)에 정인대사(淨人大師)를 중심으로 중수되기 시작하여 1705년에는 성능대사(性能大師)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고 그뒤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구조는 정방형으로 된 2중 석단 위에 석종형 부도가 안치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과립 3매, 불아(佛牙), 정골지절(頂骨指節)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고 기단의 상하 면석에는 비천상과 불상·보살상을 조각했는데 특히 1층 계단의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상·보살상이 부조되어 있다. 석종부도는 연화대좌 위에 놓여 있고 앞면에는 향로를, 좌우에는 비천상을 양각했는데 조각수법이 부드러운 편이다. 석단 주위에는 석조 난간과 석문이 있으나 모두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금강계단은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쳤지만 창건 당시의 석조물로서 부처의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리를 정암사·건봉사·용연사에도 나누어 봉안했다는 점에서 불사리 봉안사찰의 원류가 되는 가장 오래된 불교 성지라 할 수 있다.


    통도사대웅전

    국보 제290호. 1961년 대웅전을 수리할 때 서까래에서 발견된 묵서명(順治二年甲申五月十一日立柱 同年八月初十日上樑 同年八月十八日椽)에 의하면 1645년(인조 23)에 중건했다고 한다.

    통도사

    단청, 통도사 대웅전 내부,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5칸으로 옆면이 앞면보다 긴 장방형의 건물이며 지붕도 T자형의 합각지붕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러한 건물구조는 법당 안에 불상이 없는 대신 뒤쪽에 있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예배하고 또 입구로부터 천왕문·불이문·탑을 잇는 직선상에 두기 위해 측면에도 합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앞면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 북쪽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편액이 각각 걸려 있지만 의미는 같다.

    지대석 위에 있는 기단의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기고 그 사이에 연꽃무늬가 조각되었으며 돌계단의 층계석과 좌우에도 매우 정교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가구식 기단은 창건 당시 신라시대의 석조기단으로 보인다. 기둥은 배흘림이며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 위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계 형식이다. 공포는 외3출목·내4출목으로 되어 있으나 살미첨차의 끝이 앙서로 되어 있어 조선 중기 목조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앞면과 옆면에는 빗살무늬와 꽃살무늬로 된 분합문을 달았으며, 뒷면에도 금강계단을 예배하기 위해 벽으로 막지 않고 4분합과 2분합을 설치했다.

    건물의 네 귀퉁이에는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세웠으며 지붕 기왓골 수막새 끝에 박은 연봉 모양의 와정은 독특하다. 내부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층단천장으로 국화·모란 등의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좌우의 끝부분은 우물천장으로 마무리했다. 불단에는 불상이 없는 대신 화려한 문양을 조각했으며 금강계단을 향하여 길게 설치되어 있다.


    통도사봉발탑

    보물 제471호. 높이 260cm. 하대석과 간석으로 구성된 대석 위에 발우형의 그릇을 얹어 놓은 특이한 형태이다. 절에서는 석호 또는 의발탑이라고도 한다. 이 봉발탑은 석가의 발우를 바쳐 장차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할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린다는 신앙상의 의미에서 미륵불이 봉안된 용화전 앞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넓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는 원형의 복련 하대석이 놓여 있는데, 옆면에 돌린 2줄의 선을 중심으로 아랫부분에 탱주 모양의 기둥을 8개 새겼으며 윗부분에는 4중의 중판복련을 조각했다.

    하대석 윗면에는 3단의 얕은 굄이 간석을 받치고 있다. 간석은 부등변 팔각형으로 중앙에 융기된 테두리를 돌렸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마찬가지로 8엽의 앙련을 조각하여 서로 마주보게 했으며 윗면에는 3단의 얕은 굄이 있다. 상대석 위에 있는 석조발우는 뚜껑이 덮여 있고 그 밑에 굽받침이 새겨졌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석조물은 불교의 교리를 배경으로 조성된 보기드문 예이며 간석의 형태나 연판의 양식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도사은입사동제향로

    보물 제334호. 높이 33cm, 입지름 30cm, 밑지름 24.7cm.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형의 받침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시대 향완의 형태이다. 전체 표면에는 화려하고 복잡한 문양이 은입사되어 있다. 구연부인 전의 윗면에는 당초무늬가 장식되었고 뒷면에는 '通度寺上'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몸체의 4곳에는 범자가 새겨진 둥근 주석판이 못으로 고정되어 있고 주위에는 여의두무늬[如意頭紋]가 돌려져 있는데 이 주석판은 후보된 것이다. 주석판 사이에는 보상당초무늬가 빽빽하게 입사되었으며 문양의 바탕에 은판이 감입된 점은 다른 향로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징으로 상감청자의 기법과 유사하다.

    몸체 아랫부분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앙련을 표현했으며 그 밑에는 3단의 받침이 있고 표면에는 쌍엽무늬가 시문되었다. 받침대는 상단에 화문을 새긴 복련을 돌리고 그 아래로 여의두무늬·봉황·구름무늬 등이 표현되었으며 넓은 굽부분에는 당초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 향완은 안정감있는 비례나 몸체 아랫부분의 약간 볼록한 형태, 3단의 받침, 화려하고 장식적인 문양 등에서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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