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佛敎 美術 建築

磧川寺 大雄殿 四天王像 腹臟遺物

초암 정만순 2018. 1. 31. 22:12



磧川寺 大雄殿 四天王像 腹臟遺物

 

청도 적천사 대웅전(淸道 磧川寺 大雄殿)은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적천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대웅전이다.

201348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73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앞면 3·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 전기 건축 수법도 부분적으로 볼 수 있다.

적천사는 664(문무왕 4)에 원효대사가 수도하기 위해 토굴의 형태로 창건한 절로 828(흥덕왕 3)에 헌덕왕의 셋째 아들 심지왕사가 이 절에서 수도하여 진표로부터 법을 받아 다시 크게 지었다.

1175(명종 5)에는 지눌이 오백대중이 상주하는 대가람으로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병화로 소실되어 1664(헌종 5)에 다시 지었다.

그 후 1694(숙종 20)에 태허가 중수하였으나 조선시대 말기에 다시 병화를 입었으며 근래에 명부전과 누각을 중수하였다.

경내에는 5동의 건물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3호 적천사 목조사천왕의자상,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52호인 괘불이 있으며, 주변 정원에는 18기의 고승들의 부도가 있다.







木造 四天王像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원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 사천왕상은 1690년(숙종 16)에 제작되었다.

1982년 2월 24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4m. 조선 후기의 목조사천왕상은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보림사 사천왕상이 만들어진 이래로 151년 동안 소조사천왕상들만 제작되어 오다가 적천사 사천왕상에 이르러 오랜만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특히 20년 뒤에 제작된 쌍계사의 목조사천왕상이 적천사 상의 계통을 철저히 따르고 있어 조선 후기 목조사천왕상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는 시발점으로 보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라고 판단된다.

평면적인 이마에서 눈썹이 급작스럽게 윤곽을 만들면서 솟아 오른 점이라든가, 주먹코이면서도 매부리코를 하고 있는 형상, 또는 목주름의 울퉁불퉁하고도 규칙적으로 표현된 기법 등이 쌍계사 상들과 흡사하다.

목조인 까닭에 여러 조각의 나무를 잇대어 만든 흔적이 뚜렷한 적천사 상들은 4위 모두 몸체 부분이 일정한 틀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가슴 주변의 옷주름이라든가 갑옷의 형태 그리고 몸통의 입체감 등이 거의 동일하게 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4위 모두의 어깨의 구부러진 각도, 목수건의 형태, 오른발을 올리고 왼발을 내린 각도 또한 거의 일정하다는 점 등은 하나의 기본 틀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

1988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악귀는 모두 3구였다. 1981년에 윤용진 교수가 적천사 사천왕상에 대한 보고서에 의하면 악귀가 모두 8구였음을 알 수 있다. 1981년 6월 20일 천왕문 보수 중에 사천왕상 안에서 사리 3과(果), 경전 80여 판(板), 의류(장삼 두루마기) 23점 및 다라니경판 찍은 것이 다량으로 나왔다.

복장기에 의해 적천사 사천왕상의 조성 연대가 밝혀졌으며 여기에는 7백여 명의 승려의 이름과 신도 4백 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복장기에는 “康熙二十九年庚午7月淸道郡地南領華岳山積川寺四天王造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들어진 연대가 숙종 16년(1690)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적천사 사천왕상 복장 유물(磧川寺四天王像服裝遺物)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에 있는 적천사 사천왕각에서 발견된 복장 유물.

적천사 사천왕상 복장 유물은 1981년에 적천사 사천왕각(四天王閣)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사천왕 목상 안에서 발견되었다.

 사리, 경판, 다라니경, 곡식, 향료 등과 함께 철릭, 장삼, 창옷, 적삼, 중치막, 직령 등 의류 23점이 발견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복식 유물은 7점으로 철릭 3점, 장삼 1점, 중치막 1점, 직령 2점이다.

적천사 사천왕각에서 발견된 유물은 사리, 경판, 의류, 다라니경, 곡식, 향료 등이며, 이와 함께 복장기(腹藏記)가 나왔다. 복장기에는 ‘강희 이십구 년 경오 칠월 청도군 지남령 화악산 적천사 사천왕조상(康熙二十九年庚午七月 淸道郡地南嶺華嶽山磧川寺四天王造像)’이라는 기록이 있어, 강희 29년인 1690년(숙종 16)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향료와 곡식은 삼베 조각으로 싸고 네 귀퉁이를 모아 동심결(同心結)로 묶어 두었다. 복장 유물 중 철릭은 현존하는 유물 7점 중 3점이며, 무명 철릭 2점과 삼베 철릭 1점이다. 철릭은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을 따로 재단하여 허리에서 연결한 남자용 포(袍)로, 하상의 주름이 많아 말을 타거나 할 때 행동이 자유로운 옷이다.

무명 철릭은 상의와 하상 길이의 비율이 1:2로 하상 부분이 상의의 배 정도가 된다. 하상의 주름 너비는 2㎝ 정도이다. 상하 비율과 주름을 보면 조선 후기 철릭의 특징을 갖는다. 소매는 좁고 긴 것으로 미루어 다른 옷의 받침옷으로 착용한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오른쪽 소매는 탈착이 가능한 형태로 고리를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소매 부분은 유실되었다. 삼베 철릭의 상하 비율 역시 1:2이다. 양 소매와 치마 부분의 훼손이 심하나 역시 조선 후기 철릭의 특징을 보인다.

장삼은 명주로 만든 것으로 사천왕 목상에서 발견된 자료 중 유일한 명주옷이다.

중치막은 조선 시대 벼슬하지 아니한 선비의 웃옷으로, 적천사 중치막은 삼베로 만든 홑중치막이다. 옷 길이가 비교적 짧고 도련이 둥글게 퍼진 모양을 하고 있고, 소매는 길고 좁다. 중치막 형태는 이태곤(李泰坤)[1672∼1763] 묘에서 출토된 중치막과 유사한 형태로 조선 후기 중치막의 특징을 갖고 있다.

직령은 옷깃이 직선으로 여며지는 조선 시대 남자 포(袍)의 하나이다. 적천사 사천왕 목상에서 발견된 직령은 2점으로 모두 삼베로 만들었다.

복장 유물 중 의류들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옷으로 무명과 삼베로 이루어져 당시 생활을 보여 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바느질이 정교하지 못한 점과 여러 곳에 기워 입은 흔적이 남아 있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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