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佛敎 美術 建築

韓國의 寺刹建築

초암 정만순 2018. 1. 30. 22:05



韓國의 寺刹建築



김 동 현(국립문화재연구소장)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소수 림왕(小獸林王) 2년(372)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승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경전을 들여옴으로써 전파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불교는 백제와 신라에 파급되었고 마침 내 불교는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건축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바 다건너 일본땅에 이르기까지 문물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현존 하는 사지나 사찰은 한국건축사 연구분야에 어느 유적이나 유구 이상으로 양적, 질적면에서 우수한 자료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또한 시대적인 변천과정을 통해 우리 민족의 건축활동 과 조형의식을 더듬을 수 있어 더욱 그 진가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찰 중 지상의 목조건축 유구는 고려시대 중기 이전의 것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 불교전 래이후 삼국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중요사지 및 사찰을 개관해 보기로 한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5년(375) 아도(阿道)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 (伊佛蘭寺)를 세웠고 광개토왕 2년(392)에는 대동강안 평양에 9개 절을 창건하였는데 기록 에서 알려진 사명은 금강사(金剛寺), 반용사(盤龍寺), 금동사(金洞寺), 진구사(珍丘寺), 대승 사(大乘寺), 대원사(大原寺), 유마사(維摩寺), 중태사(中台寺), 개원사(開元寺), 연구사(燕口 寺), 영탑사(靈塔寺) 등이며 이들 사지는 그 위치나 유구가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 이다. 그러나 1938년 발굴되어 고구려의 사지로 널리 알려지고 있는 평양의 대동강변 청암 리사지(淸巖里寺址-金剛寺라고 추정하고도 있음)와 대동군의 원오리(元五里) 팔각전지(八角 殿址), 그리고 최근에 발굴된 정릉사지(定陵寺址) 등만이 세상에 알려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 사지는 모두 탑의 평면이 8각형인 것이 특징이며, 소위 삼금당 식(三金堂式) 배치가 공통점으로 되어 있다. 청암리사지는 고구려시대의 평양성 유지로 생각 되는 토루(土壘)의 거의 중앙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지에서 배수구가 나타나고 고구려 의 와층이 발견되어 이를 기준으로 8각형의 건물지(一抯長 10.02m∼10.23m)와 이 8 각전지 남쪽의 중문지(中門址)로 보이는 건축지, 그리고 8각전지의 동과 서에 위치한 동서건 물지, 북쪽의 대건물지(동서장 30m)가 확인된 바 있어 이 사찰의 중심곽이 8각의 탑을 중심 으로 동서북에 금당이 있고 남쪽에는 중문이 있으며 그 후방에 강당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 하게 되었다.
원오리사지는 청암리로부터 동남쪽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청 암리사지와 같이 일변 약 3.3m의 8각기단이 나타났으며 이 건물지 동과 서에는 남북장이 28m, 동서장이 13.8m 크기의 장방형 건물지가 확인되어 역시 청암리사지와 동형의 배치형 식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또한 1976년 이전 발굴된 정릉사지는 평양에서 동남쪽 22km 되는 무 진리 왕릉동(前地名 ; 中和郡 眞坡里)에 있다. 사지는 크게 5개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중 앙에 위치한 제1구역은 8각건물지(추정 탑지)를 비롯하여 모두 10개의 건물지와 이들 건물 지를 둘러막은 회랑(廻廊)이 있다. 이 구성은 남북방향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는데 동서로 가 로지른 회랑에 의해 4개의 구간으로 구분되었다. 남쪽에 자리잡은 구간에는 8각건물지가 있 고, 그 좌우에 3간, 2간의 장방형 건물지가 8각 건물지를 향해 서로 대응해 있으며 그 북쪽 구간에는 횡열로 3개의 건물지가 남향하여 있고, 그 후방에 강당지로 추정되는 13간, 4간의 횡장한 건물지가 역시 남향하고 있다.
이 제1구역은 이 사찰의 핵심구역이며 그 좌우에 각각 2개 구역씩이 연접하여 부속건물들을 배치하고 있다. 사지에서 밝혀진 건물지는 모두 14개소였고, 회랑지 도 14개소였으며, 사지 전체규모는 남북 132.8m 동서 223m로 현재까지 밝혀진 사지중 가장 큰 규모이다. 이 사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축에 대한 비대칭성이며 건물의 주 간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점이라 할 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늦게 침류왕(枕流王) 원년(384) 동진(東晉)으 로부터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으며 385년에 한강유역의 한산(漢山)에 불사가 조영되었고 그후 도읍을 금강유역의 웅진(熊津-지금의 公州)으로 옮기고 다시 사비 (泗搱-지금의 扶餘)로 천도한 성왕(聖王)대에 이르러서 백제불교는 크게 융성되었으 며 성왕 19년(541)에는 양(梁)으로부터 공장(工匠), 화사(畵師)를 초청하여 불사의 당탑을 장 엄하게 조영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왕 30년(552)에는 일본에 불경, 불구, 불상 등을 보내 불교 를 전하였고, 각 분야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일본에 보내 일본문화 계발에 직접적인 공헌을 하였다. 백제사찰로 현재 잘 알려진 곳은 익산의 미륵사지(彌勒寺址), 부여의 정림사지(定林 寺址), 금공리의 금강사지(金剛寺址)를 비롯하여 부여의 군수리(軍守里), 가탑리(佳塔里), 동 남리(東南里)에 있는 이름 모르는 사지들과 공주의 대통사지(大通寺址), 서혈사지(西穴寺址) 등이 남아있어 대체적인 사찰의 배치형식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사지들의 배치는 대부분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주축상의 배치이며 특이한 배치를 갖고 있는 사지는 1981년 이후 지금도 발굴중에 있는 익산의 미륵사지로서 삼원식(三院式) 가람이라할 수 있 다.
일탑일금당식 배치형식은 중앙의 탑을 기준으로 일적선상의 주축위에 탑 후방에 금당과 강당을 두고 탑 전방에는 중문을 배치한 형식이며 이 구역을 회랑으로 둘 러막은 평면형식이다. 이러한 배치는 백제적 가람의 전형이었으며 신라와 일본의 고대 가람 에서도 이러한 백제적 가람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는 불교가 전래된 경우가 두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그 하나는 눌 지왕(訥祗王) 때 승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지금의 선산(善山)지방에 들어와 포교한 것이며 또 하나는 법흥왕(法興王) 15년(528)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불교가 정식으로 공인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처지로서는 기록에 의한 확실한 근거로 불 교건축의 시작은 법흥왕 15년 불교가 공인된 이후 6년이 경과한 534년 부터라고 할 수 있 다.
534년 흥륜사(興輪寺)가 사찰건물로서는 최초로 건립되었고 그 후 영 흥사(永興寺)를 비롯하여 황룡사(皇龍寺), 지원사(祗園寺), 실제사(實際寺), 삼랑사(三郞寺), 분황사(芬皇寺), 영묘사(靈廟寺) 등이 속속 창건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신라는 일반 건축활 동에 불사건축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신라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 전부터 궁궐건축이 이미 존재하였고, 시가지도 어느정도 정비되어 있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婆娑王) 22년(101)에 월성(月城)이 완성되었고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2년(469)에는 '정경도 방리명(定京都坊里名)'이란 기록이 있어 도 시의 규모가 정비되고 방리명까지 정해질 정도였으며, 소지(炤知)마립간 9년(487)에는 '용월 성(茸月城)'이라하여 월성에 기와를 덮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는 불교공인 이전 궁전다운 궁전, 도시다운 시가지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불교가 공인되고 유학구법을 위해 중국 및 인도로 건너 가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고 돌아온 승려도 늘어나고 불사조영이 차차로 성황을 이루게 됨에 따라 건축기술에도 신기법이 전래되고 새공법이 받 아들여졌을 가능성은 짙다. 신라에 앞서 불교건축에 좀더 앞섰던 고구려나 백제의 건축기법 은 이미 신라의 불교공인 이전에 신라 땅에 들어올 수 있었음도 배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적극적인 기술도입은 공인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불교건축은 삼국 공히 그 개개건물 성격이 궁전건축의 개개건물과는 큰 차이가 없었겠으나 사역 전체에 걸친 계획, 즉 마스타플랜에 있어서는 양택적인 궁전과 음택적인 성격의 불교건축간에는 조영적 의식내용이 약간 상위하였을 것이다. 또한 개체건 물에 있어서도 탑건축과 같은 불교건축 기능에만 필요했던 특징 건물의 조영을 위해서는 특 수한 공법의 새로운 도입은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신라에는 어떠한 사찰들이 존재하였나를 잘 알 수 있다. 이들 중요사찰의 이름을 들면 다음과 같다. 흥륜사(527∼544), 영흥사(535), 황룡사(55 3∼645), 신원사(眞興王代), 기원사(566), 천주사(天柱寺;眞平王代), 삼랑사(597), 분황사(634), 영묘사(635), 법림사(法林寺-善德王代), 황복사(皇福寺-文武王이전), 사천왕사(四天王寺-679), 망덕사(望德寺-685), 감산사(甘山寺-720), 감은사(感恩寺-682) 등 150여 사명(寺名)이 보인다.
이들 사찰의 배치는 삼국통일 이전까지 주로 자오선상(子午線上)의 주축(主軸) 위에 남으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을 배열하고 중문으로부터 강당에 이르는 구역을 구형(矩形)의 회랑으로 둘러싸 부처의 전유공간(專有空間)으로 성역화하고 그 주변 에 부속건물인 승방, 식당 등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가람배치에서는 어디까지나 중심부에 놓 인 탑과 금당이 공통으로 가람의 주체가 되었다.
따라서 이들 핵심건물인 탑과 금당은 강하게 강조시키기 위해 높게 조영하였고 주변건물의 존재보다 분명하고 숭고하게 그 성격을 격상시키려 했다. 또한 자오 선상의 주축을 기준으로 좌우대칭을 엄격하게 고수함도 중앙위치의 탑과 금당존재를 보다 강력하게 표출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치는 중국의 『낙양가 람기(洛陽伽藍記)』에 나오는 영녕사(永寧寺)의 배치와 같은 것이며 영녕사는 불교가 중국 에 전래되기 이전의 궁전배치 형식에 그 바탕을 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신라의 불교건축은 고구려로부터 전래되고 불사조영기술도 함께 고구 려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 사찰중 신라시대의 가람 배치와 동일형식을 갖춘 유지가 발견되지 않아 고구려의 직유입 관계는 확실한 근거가 없지 만, 하여튼 중국의 영녕사, 그리고 백제 사지 등에서 자오선상의 중문·탑·금당·강당 배치 의 사찰예로 보아 당시의 전형적인 배치규범은 자오선상의 건물배치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 임에 틀림없다.
신라의 사찰배치 기본형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하나 는 앞에서 언급한 자오선상 주축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을 전면으로부터 순차로 배치하고 중문으로부터 강당에 이르는 구역을 회랑으로 둘러쌓은 소위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과 또하나는 자오선상 주축 위에 중문, 금당, 강당을 배치하고 금당 전면 좌우대칭 위치에 탑을 배치하는 이탑일금당식(二塔一金堂式)배치가 기본 배치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 탑일금당식의 배치형식에는 금당의 좌우에 동·서금당을 배치하거나 탑의 전면 좌우에 건물 을 배치한 황룡사와 같은 예가 있으며, 이탑일금당식은 금당 좌우로 익랑(翼廊)이 붙거나 중 문 좌우로 펼쳐진 회랑 끝에 경루(經樓)와 종루(鐘樓)를 배치한 불국사와 같은 예가 있다.
황룡사는 자오선상 주축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을 일렬로 배치하고 탑 전면 좌우에는 방형의 건물(경루와 종루로 추정되는 건물지)을 금당좌우에도 역시 장방 형 건물(동금당, 및 서금당지로 추정)을 배치하고 강당좌우에도 회랑아닌 건물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현재 알려진 가람의 배치 중 특이한 것이며, 이 배치형식은 고구려의 가람배치형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산물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즉 고구려의 일탑삼금당형 식의 탑중심 동서북 금당배치가 신라에 들어와 횡열삼금당(橫列三金堂) 배치형식으로 발전 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탑일금당식 가람배치는 8세기 중엽의 불국사가 그 대표적인 것이 라 언급하였듯이 자오선상 주축에 중문(紫霞門) 금당(大雄殿), 강당(無說殿)이 일렬로 배치 되고 금당 앞쪽 좌우대칭 위치에 동쪽으로 다보탑, 서쪽에 석가탑이 있고, 중문 좌우에 있는 남회랑의 동단과 서단에는 좌경루와 범영루(泛影樓)가 있는 형식이며 감은사의 경우에는 불 국사의 배치와는 달리 전면 회랑 양단에 별도의 건물없이 회랑으로만 되었다.
사천왕사는 망덕사와 배치형식이 동일하나 감은사나 불국사와 달리 금당 후면 좌우대칭위치에 방형의 건물지(경루 및 종루지로 추정)가 있어 이탑일금당식 형 식 중에서는 좀 복잡성을 띄운 사지라 할 수 있다.
분황사(634년 초창)는 현재의 출입구가 남쪽이지만 원래의 가람배치 는 서향이고 중문이 서쪽에 위치한 그러한 배치가아니었나 하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견해이 다. 현재 경내에는 모전석탑(模塼石塔)이 남아있어 원상의 일부를 볼 수 있으나 9층탑이었던 것이 3층만 남아있어 탑전체도 알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탑 위치만은 원상 그대로이고 주변 건물들은 모두 소실되고 조선조 후기에 세워진 당우만이 옛절터위에 세워져 있어 원래배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분황사천수대비조(芬皇寺千手大悲條)에 보이는 '…左殿比壁畵千手大悲前…' 기록으로 보아 殿과 塔이 횡열식으로 배치, 즉 일본의 법륭사(法隆寺)나 법기사(法起寺)의 금당과 탑 관계와 같은 가람배치가 아니었나 생각케 한다.

고려는 통일신라시대 융성했던 불교건축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나 국태 민안을 위한 불사활동은 어느시대보다 더욱 성행하였다. 태조는 궁궐조영과 때를 같이하여 도성내에 십찰(十刹)을 창건하였고 숭불사상은 태조이후 역대왕들에게 계속 이어져 왕성에 는 불찰로 꽉 채워져 있었던 것 같다.
『송사(宋史)』에 보면 '高麗王城有佛寺 土十區'란 기록이 보이며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잡속시수조(雜俗施水條)에는 '王城長廊每十間張幕設佛像…'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왕성의 불사 면모가 어떠하였는지는 짐작이 가능하다.
특히 정종(定宗) 때의 개국사(開國寺), 광종(光宗) 때의 불국사, 문종 (文宗)대의 흥왕사(興王寺)는 거찰이었으며 개성 교외의 영통사(靈通寺), 광화사(廣化寺) 등 이 유명사찰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의 불사는 도선선사(道詵禪師)의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에 따라 그 위치가 점정되었다.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의 이탑일금당식이 그대로 사용되었고 한편 삼국기에 유행했던 일탑일금당식도 병존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탑일금당식의 대표적인 사찰은 불국사이며 이탑일금당식은 흥왕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형식 외에도 개성의 연복사(演福寺)는 동전서탑식의 배치이며, 남원의 만복사(萬福寺)는 동전서탑식의 배치형식을 갖고 있어 앞서 언급한 일본의 동전서탑식 법륭사와 서전동탑식의 법기사와의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대차가 일본의 것이 앞서는 유구이므로 혹 우리의 것이 일본의 것을 모방하지 않았나하는 의구가 들기 쉬우나 나랑시대(奈良時代)의 일본 가람배치를 고려시대에 재현시켰다고는 볼 수 없고 앞서 말한 분황사같은 사지나 고선사지(高仙寺址)의 동전서탑식으로보아 그러했던 가람은 우리나라에 일찍 있었으리라 생각되어지고 있다.
또 고려시대의 가람에 있어 특기해야할 사항은 한국적 민간신앙의 요 소가 가람에 스며들므로서 삼국기로부터 통일신라, 그리고 고려초에 이어진 정제된 가람제 도가 차차 잡연성을 띠게 되었고 산신각(山神閣)과 같은 샤머니즘적 건물이 스며들기 시작 하여 가람제도에 있어서도 한국적인 나름대로의 배치형식이 취하여지기 시작하였다. 건물에 있어서도 문(門)과 배전(拜殿)의 기능을 동시에 담당할 수 있는 루문형식(樓門形式)이 유행 되었던 것 같으며 지세에 따라 축의 변형, 다축성 등이 노골적으로 사찰건축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 좋은 예는 영주의 부석사(浮石寺), 안동의 봉정사(鳳停寺)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불교건축은 역대왕들의 억불정책(抑佛政策)에 의해 종래 의 융성함을 따르진 못하고 점차 쇠퇴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불교는 민 간인의 신앙대상이 되었고 그 명맥은 명승대덕에 의해 이어져 내려왔다. 따라서 불교건축은 관용적 입장에서 민용적 입장으로 전환되어 건축에 있어 한국적 성격이 오히려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불교건축은 임란전과 임란후에 그 성 격이 크게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임란전 개개의 건축들은 그런대로 고려시대의 전통 밑에서 그 영향권 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감을 남아있는 유구를 통해 알 수 있으나 임란후의 것은 확실히 임 란전과 비교하여 보면 더욱 평민적 내음을 풍겨주는 소박함과 비정제(非整齊)의 느낌을 주 고 있다. 따라서 관위주의 조형과 민위주의 조형차이를 실감케 하며 한국적 조형의식은 오 히려 현재 남아있는 임란후의 사찰건축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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