塔
3층 석탑의 구조
‘탑파(塔婆)’의 준말이다.
탑파는 인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스투파(率堵婆)라고 하는데, 이를 의역(意譯)하여 방분(方墳) 또는 고현처(高顯處)라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탑이라고 부르는데, 스투파는 고대 인도어인 범어(梵語, Sanskrit)의 stupa의 소리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며, 탑파는 파리어(巴梨語, Pali)의 thupa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stupa는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土石)을 쌓아 올린 불신골(佛身骨, 眞身舍利)을 봉안하는 묘(墓)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탑파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리랑카에서 탑을 다가바(dagaba) 또는 다고바(dagoba)라 부르고 있는 것은 다투가르바(dhatugarba), 곧 ‘사리봉장(舍利奉藏)의 장소’라는 말을 약하여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미안마(Myanmar)에서는 탑을 파고다(pagoda)라 부르고 있으며, 구미인(歐美人) 역시 파고다라고 부른다.
세간에서는 흔히 홀쭉한 고층건물을 탑이라고 부르는 일이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타워(tower) 같은 것이지 스투파는 아니다. 그러므로 사찰에 건립된 탑은 엄밀하게 말하여 ‘탑파’ 또는 ‘불탑’이라 표현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가 구시나가라(Kusinagara)의 사라쌍수(沙羅雙樹) 밑에서 열반한 후 그의 제자들은 유해를 당시 사회의 풍속에 따라 다비(茶毘 : 火葬)하였다. 이때 인도의 여덟 나라에서 그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이 일어나게 되자 도로나(徒盧那)의 의견에 따라 불타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나라에 나누어 주어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고 하였다. 사리신앙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불탑 역시 이때에 기원한다.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지 100년이 지나 대인도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Maurya)왕조의 제3대 아소카왕(Asoka, 서기전 273∼232)은 불사리를 안치한 8대탑을 발굴하여 불사리를 다시 8만4000으로 나누어 전국에 널리 사리탑을 세웠다고 하니, 신심 깊은 아소카왕이 일시에 많은 탑을 건립함으로써 넓은 지역에 불교를 크게 전파시켰음을 알 수 있다.
서기전 3세기 아소카왕 때의 불교 중심지였던 산치(Sanchi)에는 지금도 ‘산치탑’이라 하여 거대한 불탑이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산치탑’은 거대할 뿐만 아니라 4대 탑문(塔門)과 주위 난간 조각들이 아릅답고 또한 가장 오래된 불탑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세계 제일의 탑파이다.
이와 같이, 탑을 세우는 의식은 인도에서 비롯되어 8기의 탑을 쌓았는데, 최초의 탑은 반구형(半球形)을 이루어 마치 분묘(墳墓)와 같은 모양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탑은 본래 원분형(圓墳形)을 이루고 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밑에 높은 기단을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상륜(相輪)의 수효가 늘어나는 한편 주위에 돌난간을 둘러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놓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의 불교 수용과 탑파의 건립 경로는 중국을 거쳐 4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인도·중국과 다른 독특한 탑파의 양식이 이루어졌다. 한국 고대 유적 유물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불교적인 조형물이다. 이 가운데서도 양과 질에서 볼 때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탑파와 불상이라 할 수 있으니, 이러한 상황은 탑파와 불상이 불교의 예배 대상으로서 불교도들의 신앙과 정성이 모두 이 두 곳에 결집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즉, 불교에서는 사원을 건립하는 목적이 탑파를 세우고 불상을 봉안하여 이 탑파와 불상에 예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탑파는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하였고, 불상은 직접 그를 향하여 예배를 올리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탑파와 불상은 가장 뛰어난 불교미술로서 한국의 고대미술을 대표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우리나라의 탑파는 1,000기 이상을 헤아릴 수 있는데, 이 탑들을 건조한 재료에 따라 분류하여 일반적으로 목탑(木塔)·전탑(塼塔)·석탑(石塔)·모전석탑(模塼石塔)·청동탑(靑銅塔)·금동탑(金銅塔)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초기에는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양식을 모방한 누각형식의 다층목탑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지역에서는 목탑을 모방한 석탑이 비롯되고, 신라에서는 전탑을 모방한 석탑에서 시작되어, 바야흐로 석탑이 우리 나라 탑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탑은 부처의 유골이나 유품 등을 모셔 두고 공양하기 위해 높게 만든 건조물이다. 탑은 범어의 '스투파'에서 온 말로, 한자로는 '탑파'라고 적는다. 본디 부처의 유골(사리)을 묻고 그 위에 돌이나 흙을 높이 쌓은 무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는 부처의 유골이 들어 있지 않아도 특별한 장소를 나타내거나 또는 부처의 덕을 추모·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도 탑이라고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와서는 탑처럼 높게 세운 건조물도 아울러 탑이라 부르고 있다. 이를테면 기념탑 · 시계탑 · 전파탑 · 광고탑 등이 그것이다. 서양의 유명한 탑으로는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영국 국회 의사당의 시계탑, 쌍탑으로 가운데로 배가 지나갈 수 있게 만든 영국의 타워 브리지, 프랑스의 에펠 탑 등을 들 수 있다.
불교에서의 탑은 원래 부처의 유골을 모신 것이기 때문에 매우 존귀한 존재이다. 따라서 탑은 반드시 절의 중심부 곧 법당 앞에 세우며, 공양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처음으로 탑이 세워진 것은 기원전,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후 석가모니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개로 나누어 인도 전역에 각기 탑을 세워 안치한 것이 시초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삼국 시대부터 건립하였다.
탑은 만드는 재료에 따라 목탑·석탑·전탑·철탑 등으로 나뉘며, 형식에 따라 정형탑과 이형탑으로 나뉜다. 목탑은 나무, 석탑은 돌, 전탑은 벽돌로 만든 것이며, 모전 석탑은 돌을 벽톨 형태로 다듬어서 만든 탑이다. 지역에 따라 중국에서는 전탑이, 우리 나라에서는 석탑이, 일본에서는 목탑이 각각 발달되어 왔다.
우리 나라는 전역에 걸쳐 질이 좋은 화강암이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탑 중에도 석탑이 많이 건립되어 왔다. 석탑은 불교와 관련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만큼 많이 남아 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석탑은 약 1,000여 기로 추산된다. 목탑은 조선 시대에 건립된 법주사 팔상전 뿐이며, 전탑은 안동 신세동의 7층 전탑 등 5기가 남아 있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탑은 백제 후기에 세워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다. 대표적인 탑으로는 통일 신라 시대에 건립된 불국사 다보탑과 불국사 3층 석탑, 고려 중기의 신륵사 다층 전탑·경천사 10층 석탑, 조선의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탑으로는 인도의 쿠트브미나르(높이 72m)·대정사 대탑(높이 52m), 중국의 중흥탑, 미얀마의 쉐지곤 파고다 등이 있다. 또한 싱가포르의 스리마리암만 사원의 탑은 많은 조각으로 된 것이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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