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대구 자락 올래 둘레길

[팔공산 자락 걷기 좋은길 .10] ‘북지장사∼인봉∼모래재∼외국인산장∼폭포골 입구∼동화교’ 코스

초암 정만순 2018. 1. 21. 12:42



[팔공산 자락 걷기 좋은길 .10]

‘북지장사∼인봉∼모래재∼외국인산장∼폭포골 입구∼동화교’ 코스



저길 봐요! 성냥개비만한 통일대불을…

인봉(원사진)에서는 팔공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동화사와 통일대불이 보인다.
계곡물은 자꾸만 자꾸만 산의 속살을 파고들고, 산은 저 웅장한 골격으로 세상을 밀어내며 자꾸만 자꾸만 먼 바다로 간다.

바위를 뚫고 자라난 나무는 잔인하리만치 무정한 기풍으로 인간의 세계를 내려다보고, 지구의 핵에서 자라난 봉우리는 모든 봉우리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

팔공산을 걷는 일은 이 모두를 목격하는 것이다.


◆인봉에서 팔공산 주능선을 보다

‘팔공산 자락 걷기 좋은 길’의 열 번째 코스는 북지장사에서 시작된다. 인봉과 모래봉, 두 개의 봉우리를 넘고, 원시림처럼 관능적인 숲길을 헤치고, 폭포들의 골짜기를 걸어 동화사 입구의 동화교에 다다르는 길이다. 총 5.5㎞ 정도로 길지 않은 길이지만 웅장한 선경, 오르내림의 다이내믹한 리듬, 그리고 계류의 청명함을 골고루 갖췄다.

걷기 도중에 만난 노랑망태버섯(왼)과 테두리방귀버섯.
지난달 11일 오전 9시, 걷기 특별취재팀의 이지용 팀장, 오병현 팔공산녹색여가문화센터장, 박효진 팔공산녹색여가문화센터 간사와 함께 출발, 공기가 가벼운 운 좋은 날씨다. 북지장사까지 오르는 울창한 소나무 숲길과 협곡을 끼고 도는 모롱이 길은 미리 덤으로 얻는 호혜다. 양옆에 막돌로 쌓은 담장을 펼친 절집의 중문은 또 얼마나 어여쁜지.

북지장사 주차장 입구에서 인봉으로 오르는 산길, 시작이 고되다. 가파르게 치닫는 길이 하악 하악 내뱉는 숨에 젖는다. 짙은 개나리색의 버섯과 달개비를 만나고 성급한 도토리가 또르르 달아나는 모양을 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즈음이면 두어 번 쉴 만한 터가 나타난다. 그곳은 어김없이 신선 같은 소나무들의 터다. 짙고 선영한 이끼들이 둥치를 감싸고 껍질이 두껍고 그로테스크하게 갈라진 소나무들이다. 그렇게 가파른 된비알을 따복따복 걸음을 보태 30여분 오르면 하늘이 열리는 인봉이다.

인봉. 멀리서 보면 도장같이 생겼다 해서 인봉이라 한다. 커다란 바위들이 서로를 꽉 깨물고 단단하게 솟은 봉우리다. 바위틈에 짤막한 밧줄 하나가 드리워져 있다. 봉우리의 머리 꼭대기로 오르는 길인게다. 이곳은 반드시 올라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꽤 오래 멈춘다.

인봉에서 보는 팔공산의 모습은 예측하지 못했던, 어떠한 예측보다도 훨씬 더 조형적인 위용으로 펼쳐져 있었다. 동쪽으로는 노적봉, 서쪽으로는 시내가 보인다. 북쪽에 높이 솟은 동봉 아래 푸른 숲을 뒤집어 쓴 동화사의 조각과 성냥개비만 한 통일대불이 보인다. 인간의 규모란 얼마나 소소한가. 봉우리와 봉우리를 넘는 능선들, 그 산의 골격들이 세상을 서서히 밀어내며 바다로 나아가는 듯하다. 바람과 구름과 빛으로 가득한 높고 널찍한 무한의 공간이 모든 것이 마비되고 잠잠한 가운데 천천히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공포에 가깝다. 눈부신 공포다. 구름 속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부동의 세상에서 나 혼자만이 심장을 끄집어내어 숨을 헐떡이는 듯하다. 바위 꼭대기 한그루 소나무, 이 한자리에 박혀서 얼마나 오래 살았을까.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평정으로 얼마나 오래 당당했을까.

공무원 연수원 앞 계곡에 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
◆관능적인 숲길을 따라

내려가는 길 역시 상당한 비탈이다. 발목에 힘을 주고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한참을 내려간다. 목을 길게 빼어 들여다보아도 동자가 보이지 않는 작은 동자암을 지나면 키 큰 활엽수와 무릎 높이의 관목과 수풀로 가득한 관능적인 숲길이 이어진다. 균형이 잡힌 키 큰 나무들이 떼를 지어 골짜기의 비탈을 따라 서있다. “이게 서어나무예요.” 코끼리 화석처럼 단단한 나무둥치를 쓰다듬어본다. 레이스 같은 잎들이 총총히 뿌려진 하늘과 초록과 연두 속으로 파고든 노란 햇살들, 그리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이 아름답고 잠잠한 숲을 뒤덮고 있다.

숲을 빠져 나오면 요란하게 재잘거리며 쏟아져 흐르는 급류가 길을 막는다. 물살위로 두더지처럼 머리를 드러낸 바위에 아슬아슬 발을 딛고 함께 걷는 이들의 손을 의지해 건넌다. 그러면 시원하고 한적하게 뻗은 가로수길이다. 잠시 길가에 주저앉아 젖은 신발을 말리고 목을 축인다. 가로수 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학생 수련관이다. 관청처럼 도도하게 지어진 수련관을 향하는 가로에는 키가 놀랍게 큰 무궁화가 도열해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 있다. 생경한 즐거움이 기분을 돋운다.

학생 수련관 앞에서 다시 등산로가 시작된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걷는 오르막은 제법 어지러이 꿈틀대지만 땅위로 드러난 뿌리들이 단단한 디딤대가 되어준다. 숲 속에서는 노란 망태버섯, 빨간 버섯, 하얀 버섯들이 가끔 요정처럼 등장한다. 매끈한 나무 한그루가 나부처럼 누운 갈림길이 나오면 위로 오른다. 이제 모래재다. 콰르르한 물소리가 아래에서부터 들려온다. “저 아래가 폭포골이에요.” 우리는 골짜기를 감추고 있는 숲으로 물소리를 향해 나아간다. 다시 내리막이다.




인봉 아래에 있는 '동자암'



◆모래처럼 자글거리는 흙길

모래처럼 자글거리는 흙길이어서 모래재일까. 길이 거칠다. 긴장된 몸이 산길을 잠시 활주하듯 내려오면 산은 느슨한 기복으로 숨고르기 할 여유를 준다. 그러다 다시 길은 명랑한 음표처럼 떨어져 내리고 골짜기의 물이 산의 속살을 파고드는 숲길로 접어든다. 그곳에서 손바닥만한 햇빛이 따사로이 모여 앉은 연한 숲 속에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건물 한 채를 만난다. 외국인산장이란다. 불이 났다던가. 그러나 돌을 쌓아 탄탄하게 만든 집이어서 최초의 형상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산장의 바로 앞은 풍성한 계곡이다. 집 옆에는 손길이 사라진지 오래된 무성한 텃밭이 남아있다. 아까워라, 얼마나 정감 있는 산장이었을까.

외국인산장에서 폭포골 입구까지의 길은 비교적 평탄하다. 길과 함께 달리는 계곡을 넘나들며 걷는 길이다. 얕은 계곡 가에 돗자리를 펴고 앉으신 몇몇 할아버지들의 한가로운 정오도 스쳐 지나고 누군가 힘센 사람이 세워둔 작은 갓바위도 스쳐 약수암 갈림길에 닿는다.

“폭포골은 60년대만 해도 인기 있는 등산로였다고 합니다. 약수암은 원래 여관이었다지요. 성철 스님의 불교운동으로 절 안의 상업시설들이 모두 나가 동화사 시설지구를 형성했다고 하죠.” 오병현 센터장의 설명이다. 약수암으로 향하는 콘크리트 다리가 계곡을 가로지르고 있다. 할머니 한 분이 다리의 낮은 난간에 걸터앉아 다리쉼을 하고 계신다. 배낭과 지팡이를 부려두고 계곡소리에 젖어 땀을 잊는다. 콘크리트 다리 뒤에는 오래된 다리 하나가 푸른 이끼에 뒤덮여 있다. 너무 가녀려 선녀만 지날 수 있을 것 같은 다리다.

다리에서 폭포골 입구는 지척이다. 봉황문 쪽으로 내려가는 널찍한 도로는 위세 있는 폭포와 웅장한 나무들로 감싸여 큰절 동화사의 위용을 말해준다.
봉황문을 나서기 직전, 이지용 팀장님이 손짓을 한다. “여기 서보세요.” 그곳, 주차장의 두 번째 주차선을 밟고 선다. “봉황문 단청의 곡선 아래에 앉으신 마애불을 보세요.” 봉황문의 바깥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단청아래 처마의 곡선을 지붕처럼 이고 앉아 계신다. “가을 단풍이 물든 해질 녘 마애불의 모습 위로 노을이 모이지요.” 마애불은 이 길의 마지막 선물이다. 이제 곧 가을인가. 동화교 아래 계곡엔 여름을 부여잡은 사람들의 물놀이가 한창이다. 정오가 훌쩍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