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자락 걷기 좋은길 .8]
‘천성암 입구∼기기암∼안흥폭포∼은해사∼구화사’ 코스
암자서 암자로 이어진 길…
빗소리, 독경처럼 퍼지다
다시 폭포로 떨어지누나
천성암 가는 길. 비가 내려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
질퍽해진 흙길에 발자국을 남긴다. 시간도 그 뒤를 따라 느릿느릿 걷는다. 그러기를 잠시, 일순간 빗줄기가 폭풍과 함께 휘몰아친다. 빗물이 삼켜버린 발자국은 흔적조차 없다. 푸른 비린내가 자욱하게 번진다. 빗줄기가 만들어내는 무채색의 얼룩들, 잎사귀들이 엄살을 부리며 오들오들 몸을 떤다. 바람조차 갈길을 몰라 이리저리 엉킨다. 거세지는 빗줄기가, 이방인을 경계하듯 잔뜩 겁을 준다. 모든 게 순식간이다.
잠시 걸음을 멈춘고 다시 고요해지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우산밖으로 손을 쭉 내민다. 손바닥을 때리는 빗물의 촉감, 꽤나 상쾌하다. 비바람은 그렇게 예고도 없이 밀려오고, 그리고 다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한바탕 비바람이 머물다간 숲에는 초록이 깊게 드리워졌다.
그림같은 풍경에 방해가 될까봐 이내 걸음을 재촉한다. 그렇게 숲 속으로 잠잠히 숨어든다.
천성암 앞 바위에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 |
◆천성암 입구∼천성암∼기기암(3.6㎞)
걷기 취재를 나서기로 한 지난 2일. 아침부터 하늘이 심상찮다. 비 예보는 있었지만 빗줄기의 굵기가 예사롭지 않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좀체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 취재자문과 가이드를 맡은 서태숙 팔공산연구소 사무국장도 궂은 날씨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원래 계획했던 코스로는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날 계획했던 코스는 갓바위쪽으로 치고 올라가는 코스였다. 험한 길에 비까지 겹쳐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 급기야 취재팀은 코스변경을 선택했다.
오전 10시30분 경산시 와촌면 천성암 입구를 출발한다. ‘이범호 30홈런 기도도량’ ‘권혁 투수 소원성취 기도도량’. 천성암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무뚝뚝하게 걸려있다. ‘1300년 전통사찰’을 알리는 광고 문구치고는 살짝 헛웃음이 나온다. ‘나도 로또나 당첨되라고 빌어볼까’. 또 한번 나오는 웃음을 어찌 할 수 없다.
천성암으로 오르는 길은 꽤나 가파르다. 흙과 자갈이 적당히 깔린 길이지만, 처음부터 거세지는 숨소리는 어쩔 수 없다. 몇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우산을 든 오른손이 묵직하다.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진다. 빗줄기도 점차 거세진다. 이런 길이 30분 동안 이어진다.
‘나 좀 보라며’ 개구리 한마리가 불쑥 튀어나온다. 낯선 이방인의 등장에 놀랐는지 작은 웅덩이에 툭 걸린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앙증맞은지…. 숨소리도 잠시 잦아든다. 가쁜 숨을 다시 내뱉을 때쯤, 길은 뿌옇게 흐려졌다. 안개다. 정상으로 올라 갈수록 희뿌연 풍경은 더욱 짙어진다. 풍경이 짙어질수록 ‘나’와 ‘자연’의 경계는 옅어진다.
비 오는날의 천성암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암자를 지키는 두마리의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다. 이곳은 너럭바위가 꽤나 인상적이다. 너럭바위의 갈라진 틈이 만(卍)자 모양을 하고 있어, 불연(佛緣·중생이 불교나 부처와 맺는 인연)이 깊은 곳이라고 한다. 그런 말을 전해들어서인지 보는 내내 신비스러운 느낌이다.
너럭바위는 전망대처럼 서 있다. 빗물에 젖은 바위 위를 조심스럽게 올라선다. 그리고 이내 할말을 잃는다. 발 아래로 드리워진 새하얀 풍경. 희뿌연 안개는 미동도 없이 고요히 번지고 있었다.
천성암에서 기기암으로 가는 길은 숲길이다.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또 한바탕 빗줄기가 쏟아진다. ‘다다닥~’ ‘다다닥~’ 숲을 때리는 빗소리가 온몸을 전율케 한다. 그 느낌이 상쾌하고 짜릿하다. 숲속의 나무들은 철통경호하는 경계병처럼 꼿꼿하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 모습이, 그 표정이, 그 몸짓이, 한없이 듬직해 보인다.
“원래 예로부터 암자와 암자를 잇는 길은 멋이 있어요. 특히 이 길은 명상하면서 걷기에 좋은 곳이죠”
서 국장이 말을 잇는다. 빗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렸지만 약속이라도 한듯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빗소리가 굵어질수록 생각은 깊어만 간다. 40여분 숲길을 걷다보면 기기암과 마주친다. 여기서 잠시 앉았다 가자.
팔공산 은해사 기기암 아래에 있는 안흥폭포. |
◆기기암∼안흥폭포∼서운암∼은해사(3.3㎞)
기기암은 816년 안덕사·안흥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1186년 중건하면서 ‘몸은 사바세계에 머물러도 마음은 극락세계에 머문다’라는 뜻으로 기기암으로 불렀다고 한다. 마당에는 귀륭나무 두그루가 서있다.
기기암은 마침 점심공양중이었다. 젖은 옷을 가다듬고 공양간으로 들어선다. 정갈한 음식이 한상 가득하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공양을 한다. 처음 먹어보는 절밥은 역시나 담백하다. 한결 몸이 든든하다. 지친 몸을 잠시 추스르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을 내려오다 잠시 안흥폭포로 발길을 돌린다. 기기암의 옛이름인 ‘안흥’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다.
안흥폭포는 비가 와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건천폭포다.
“이곳을 수차례 왔지만, 폭포수가 흐르는 모습은 처음 보네요.”
서 국장이 폭포를 배경을 포토타임을 청한다. 폭포수의 절경이 그대로 카메라속으로 들어온다. 빗줄기가 굵어질수록 풍경은 깊어진다. 비오는 날 걷기의 또다른 매력을 덤으로 얻었다. 안흥폭포의 흥분을 뒤로 하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계곡을 따라 곳곳에 돌탑이 소담스럽다. 오후 1시, 대나무 숲 입구가 인상적인 서운암에 도착한다. 암자엔 아무도 없다. 낯선이를 경계하는 출입문도 보이지 않는다. 산신각을 둘러보고 마당 한켠에 마련된 나무의자에서 잠시 휴식. 굵은 빗줄기도 잠시 멈춘다.
기기암에서 나와 10여분을 걸으니 영천 은해사다. ‘수능 100일 기도’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보화루 아래에 걸려있다. 계곡에는 빗속에도 아랑곳 않고, 수련회를 온듯한 아이들이 물놀이에 여념이 없다.
◆은해사∼경산시 와촌읍 대동리 마을회관∼구화사∼천성암 입구 원점회귀(5.1㎞)
은해사 입구를 나와서 좌회전한다. 이때부터는 지루한 아스팔트 포장길이다. ‘숲속의 다향’이라는 간판이 나오면 바로 좌회전해서 직진. 빗줄기가 잠시 멈추면서 구름이 길게 드리워진다. 초록잎은 글썽거리고 붉은 꽃은 물결친다. 건너편 숲은 화창했던 봄날을 애써 기억하려는 듯 바르르 떤다.
완만한 아스팔트 포장길을 한동안 걷다 보면, ‘프린스 산장’과 마주친다. 이곳에서 우회전 하면 가파른 길이 또한번 발걸음을 긴장케한다. 다시 숨은 거칠어지고, 빗물에 눅눅해진 신발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추장스럽다. 하지만 신발 사이로 올라오는 뜨거운 쾌감은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낚시터로 유명한 대동지 연못을 지나면 경산시 와촌읍 대동리에 이른다. 마을회관 정자에서 잠시 목을 축인다. 전형적인 시골의 모습은 아니지만, 마을이 주는 느낌은 여전히 소박하고 아련하다.
“아이고, 비가 이리 오는데 등산 왔는 감네. 어데서 왔어예.”
때마침 나온 동네 어르신들이 한마디씩 거드신다.
천성암에서 이곳까지 걸어왔다는 대답에 모두가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옅은 웃음으로 짧은 대답을 대신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참 대단하데이…”
어르신들의 대화가 뒤쪽에서 희미하게 들린다.
대동리를 지나 20여분을 걸으면 구화사다. 신식 목조주택의 사찰이 낯설기만 하다. 잠시의 휴식도 없이 다시 걷는다. 오동잎 잎사귀가 작은 바람에도 물결친다. 큰 잎 한장을 뚝 따서 머리에 얹는다. 오동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정겹다. 오후 3시. 천성암 입구 원래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또 한바탕 빗줄기가 거세게 몰아친다.
▨ 영남일보-대구시걷기연맹-대구녹색소비자연대-대경권광역경제발전위원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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