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대구 자락 올래 둘레길

[팔공산 자락 걷기 좋은길 .13] ‘능성재~음양리 마을회관~강학리 회화나무~무학능선~도림사’코스

초암 정만순 2018. 1. 21. 10:00




[팔공산 자락 걷기 좋은길 .13]

 ‘능성재~음양리 마을회관~강학리 회화나무~무학능선~도림사’코스





코스모스·탱자·밤송이·억새…팔공산의 가을길은 고통마저 감미롭구나

억새가 핀 경산시 와촌면 음양리 들길을 걷는 걷기팀.
완연한 가을이다.

팔공산은 벌써 가을옷으로 갈아입었다. 불그스레함과 푸르름이 군데군데 조화를 이뤘다. 마치 한폭의 수채화 같다. 아직은 푸르름이 불그스레함을 앞선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이런 구분도 사라지겠지. 그래도 산은 넉넉하다. 겨울이 지나고 생동하는 봄이면 다시 숲은 수줍은 새싹들이 모여 ‘신록의 향연’을 선사하겠지.

잠시 자연의 이치를 생각했다. 깊은 숨을 내쉬며 흙길을 밟으면서. 탄생과 소멸은 불멸의 가치다. 생명을 지탱하는 호흡은 어디서 오나. 호흡에 필요한 산소는 숲생태계가 제공한다. 자동차 매연과 소음에서 벗어나 산에서 또다른 ‘나’를 본다. 문명과 이성이라는 장막에 갇혀 자본의 숭배와 경쟁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물든 도시는 숨막힌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을 찾는다. 산은 정직하다. 오른 만큼 보인다. 땀흘린 만큼 본질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능성재 출발-강학리 회화나무(5.8㎞)

지난 4일 찾은 팔공산의 하늘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극치였다.

국어사전에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인 ‘천고마비’를 온 감각으로 느끼는 때가 요즘이다. 이런 기분도 잠시, 서태숙 팔공산연구소 사무국장이 제동을 건다. 쬐끔 야속하다. “오늘 코스는 익숙하지 않을 거예요. 빨리 출발합시다.”

불굴사 주변에는 밤나무가 많아 가을이 되면 등산로 주변에 밤송이가 많이 떨어져 있다.
그동안 팔공산의 주요 능선과 자락에 난 길을 걸었지만 이번에는 좀 다를 것 같다. 서 국장이 준 코스 지도를 보니 그랬다. 총 길이 19㎞. 다행히 오르막길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대구∼포항 간 고속도로 구간을 통과하면서 불굴사로 향하는 길에서는 숨이 약간 헐떡거렸다.

지묘동과 능성동 예비군 훈련장을 지나 대구와 경산의 경계지인 ‘능성재’에서 출발했다. 오전 9시15분. 하늘은 구름 한점 없다. 신발끈을 조여 매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런데 늘 앞서가던 이지용 영남일보 취재팀장이 무언가를 열심히 찍는다. “가을의 꽃이 여러가지 있지만 코스모스만은 못해요.”

셔터 소리가 연속해서 여러번 났다. 순간적인 장면 포착 때문이다. 서 국장이 이 팀장에게 “정말 사진기자 하기가 힘드시죠. 체력과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이런 일은 꿈도 꾸질 못했을 텐데…”라고 하자, 이 팀장은 “사진은 순간의 예술인데, 남보다 앞서가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오늘 함께 작품 한번 만들어 볼까요”라며 분위기를 띄웠다.

출발 30분도 되지 않아 시장기가 돈다. 성덕대학 방면 능성로 내리막길로 가다보면 ‘가볼까요’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곳을 끼고 오른쪽 길로 진입하면서 본격적인 걷기체험이 시작된다. 길은 부드러웠다. 도로 왼편 오른편 가릴 것 없이 코스모스가 피었다.

불굴사 석불입상.
전원주택도 볼거리다. 각 건물의 설계와 디자인을 보면 집주인의 철학과 예술적 감각을 알 수 있다. ‘기르는 개 모습을 보면, 개주인의 성격과 외모도 안다’는 말이 있다. 집도 그런 것이 아닐까. 모양도 다양하고 개성도 각각 달랐다. 집주인들의 얼굴을 상상해보다 실없이 혼자 웃는다.

봉경사로 가는 길에는 복숭아 나무를 심은 농가가 많았다. 나무에 달린 복숭아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 추석을 앞두고 수확해 도시로 내다 팔아버린 탓이다.

길 위를 가로지르는 고압선이 흉물이다. 전기가 필요한 도시로 공급하기 위해 팔공산뿐만 아니라 전 국토의 산맥에는 이런 고압선이 설치됐다. 스키장에 설치된 리프트를 움직이는 케이블처럼 고압선의 끝은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졌다. 옛 사극 영화나 드라마 한편 찍으려고 해도 고압선때문에 옛 정취가 나지 않는다는 영화감독의 푸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서 국장은 “고압선 아래에서 자라나는 동식물은 불임의 원인이 될 만큼 생명체에 해롭다”며 안타까워했다.

계속 걷다보니 한이 찼는지 고압선도 사라졌다. 대신 길 양옆으로 텃밭을 일구는 노부부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냇가를 건너자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퇴비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땅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 묻은 것이다. 옛말에 인분 냄새를 맡으면 성인병도 막을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서 국장도 같은 생각인 듯 “맞는 것 같다”며 웃는다.

경산 무학능선에서 바라본 팔공산 주능선 모습.


봉경사를 지나 태백사 비석 맞은편에 길이 나있다. 이후 언덕길을 계속 오르락 내리락 반복하면 아스팔트 포장길이 나온다. 오른편으로 길게 늘어선 탱자나무가 인상적이다. 5분쯤 걸었을까 내리막길에 다다르자 음양1리다. 잠시 숨을 돌린 뒤 발걸음을 소원사 방향으로 이어갔다. 그런데 벌써 정오다. 주변 풍광을 보느라 페이스를 놓쳤다.

“걷는 속도를 높이자”는 이 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보 속도로 달음질쳤다. 시장기가 다시 도질 무렵 강학2리 마을회관 옆 회화나무에 도달했다.

산기슭에 핀 구절초가 등산객들에게 방긋 웃어 주는 듯하다.


◆강학리-도림사(7.8㎞)

강학리를 벗어나 불굴사로 향했다.

대구~포항 고속도로 옆길을 지나 고가도로 아래를 통과해 10여분쯤 걸었을까. 산위로 웅장한 불굴사가 보였다. 세종청소년 수련원을 지나 경사진 길을 조금만 더 걸으면 된다.

불굴사는 고요했다. 점심 공양을 마친 스님들이 줄줄이 나와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여기에는 기와 한장의 시주가 체험거리였다. 기와에 자신의 소원과 이름, 주소 등을 적고 쌓아 놓으면 된다. 이미 다녀간 사람도 수백명이였다. 수많은 기와들이 바로 그 증거였다. 불굴사위에 자리한 홍주암도 볼거리다. 원효대사가 여기서 머물렀으며, 김유신 장군도 삼국통일을 기원했다고 한다.

휴식의 유혹을 잊고 다시 불굴사 왼편길에 진입했다. ‘출입금지’라고 적힌 철문 옆으로 능선을 오른다. 사람의 발걸음이 뜸했던지 큼지막한 알이 박힌 밤송이가 바닥에 가득히 떨어졌다. 모두들 걸음을 멈추고 밤을 줍기 시작했다. 이런 게 산길을 걷는 묘미다. 해발 628m 고지인 무학산 능선에 도착하자 발 근육이 제대로 풀렸다. 다행히 이제부터는 평지다. 능선길은 마치 지리산 둘레길을 연상시켰다. 땀흘린 만큼 누릴 수 있는 걷기의 즐거움이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산바람도 좋았다. 능선길 끝에 다다르자 이제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도림사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림사-원점(5㎞)

도림사는 평일인데도 손님들이 많았다.

불공을 드리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는 것이다. 다행히 여기에서 출발지까지 내리막길이다. 벌써 15㎞를 걸었다. 시간은 오후 3시30분. 점심도 거른채 걸어온 길이다. 물론 각자 집에서 간식을 준비했다. 음식을 나눠먹자마자 입의 즐거움이 절정에 달했다. 몸에 에너지가 떨어진 탓일게다. 배고프고 목마를 때 먹는 음식맛이 최고다. 이것이 걷기의 또다른 재미 아닐까.

앞으로 목표지점까지 2㎞. 어떻게 20㎞ 가까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걱정됐다. 그러나 기우였다. 팔공산의 가을은 걷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고통을 잊게 하는 몰약과 같았다. 계절의 기운과 산의 매력을 느끼고 싶은 분이라면 이 가을 팔공산을 강력히 아주 강력히 추천한다. 강정제를 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