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암(聖殿庵)
팔공산 성전암(聖殿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에 속하며, 파계사(把溪寺)의 부속암자이다. 팔공산 서쪽 주릉이 파계재를 지나면서 서북쪽 가산산성 줄기와 서남쪽 도덕산 방향 줄기로 크게 나뉘는데, 그 분기점의 남쪽 정상부 바로 밑에 터를 잡은 제비집 모양의 연소형(燕巢形) 명당에 자리잡았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695년(숙종 21)에 현응(玄應) 조사가 중창하였고, 1915년에 보령(保寧) 대사가 중건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성철선사가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본격적인 수도도량으로 만든 유서 깊은 도량이다.
성전암 현응선림선원은 남방 영남의 3대 선원도량 중의 하나로서 조선 중엽 숙종대왕과의 인연으로부터 시작된다.
왕으로부터 왕자출생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부탁받은 용파선사는 기도가 끝날 무렵 선정에 들어 조선팔도를 관해보니 조선에 왕자로 태어날만한 인연은 도반인 농산 스님 뿐이었다. 이 인연을 알게 된 농산 스님은 그대로 앉아서 열반에 드시고는 최무수리(숙종의 비)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그대를 인연으로 내가 이 세상에 다시 올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태어나신 분이 조선 제21대 영조대왕으로 바로 전생의 농산 스님이셨다.
숙종대왕께서 용파 선사께 왕자탄생의 공덕을 치하하여 파계사 사방 사십리의 땅을 사찰전답으로 하사하였으나, 선사께서는 이를 사양하시고, 대신 파계사와 삼보종찰과 전국의 모든 사찰에 숙종의 어머니 대왕대비마마의 영전을 모시는 기영각을 세울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청했다. 또, 전국의 스님들 노역을 풀어 수행에 정진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전국 사찰 일주문 앞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관찰사나 양반 관리들이 기영각에 참배하게끔 선포해 주실 것을 청을 드려 숙종대왕의 윤허를 받아내셨다.
현응선원은 정조의 아드님인 영조대왕이 시주자가 되어 건립한 도량으로 용파선사에게 현응(玄應)조사란 시호를 내린데서 유래한다.
근세 성전암은 조계종 선풍을 드날린 중흥조이신 만공선사, 혜월선사, 고봉선사(만공스님 법제자), 금봉선사(만공스님 법제자), 고송선사, 구산선사, 석암선사, 서옹선사(종정), 혜암선사(종정), 법전선사(종정), 철웅선사께서 계셨던 곳이다.
특히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성철(性澈)스님이 1955년 부터 10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 곧 한번도 성전암 문을 나서지 않고 수행하였던 곳 입니다.
2007년 2월 화재로 인해 현응선원이 소실되었으나 2010년 3월3일(음력) 낙성식을 거쳐 성전암 현응선림 선원이 선불장(禪佛場) 도량으로 중창되어 훌륭하신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실 수 있게 되었다.
파계사 성전암 현응선원(玄應禪院)
千峯盤窟色如藍(천봉반굴색여람) 誰謂文殊是對談(수위문수시대담) 堪笑淸凉多少衆(감소청량다소중) 前三三與後三三(전삼삼여후삼삼) 천 봉우리 깊은 골짜기 쪽빛 같이 푸르른데, 그 누가 말하리 문수보살을 만나 이야기 했다고 우습구나! 청량산 대중이 얼마냐고 하니. 전 삼삼 후 삼삼이라 하네.
威踏毘盧頂상(위답비로정상) 行拜童子足下(행배동자족하) 비로자나 부처님의 정수리를 위엄있게 밟고 남순동자의 발아래에서 절을 올리네.
寂默室(적묵실) 大夫自有衝天氣(대부자유충천기) 不向如來行處行(불향여래행처행) 대장부는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운이 있으니, 부처님께서 걸어가신 묵은 길을 향해 가지 않는다.
성전암 선원에는 편액이 두 개가 걸려 있으며, 주련의 내용도 두 가지 로 되어 있다. 선원 정면에는 ‘성전암(聖殿庵)’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오른편에는 ‘ 현응선림(玄應禪林)’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성전암’ 편액은 누가 쓴 것 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현응선림’의 제액(題額)은 파계사 원통전 주련을 쓴 유명한 서예가 회산(晦山) 박기돈(朴基敦)의 글씨이다.
선원의 주련은 모두 6구인데, 1구∼4구는 칠언 절구 형식의 게송이며, 5 구∼6구는 6언으로 이루어진 대구(對句)이다. 출처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주련 글씨는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浩)가 쓴 것이다. 주련의 서풍(書風)은 주로 당나라때 서예가인 안진경의 서체를 구사하여 중후하고 안정된 느낌 을 준다. 선원 댓돌 위에는 나무 팻말에 새겨서 놓아둔 ‘각근하조고(脚근 下照顧)’란 글귀가 있다. 수행승이나 참배객들에게 신발 정리를 잘하라고 붙여놓은 말이지만, 화두로도 볼 수 있다. ‘지혜로운 자는 하루에 한 번 쯤 자신을 돌아본다’라는 말이 연상된다.
적묵실(寂默室)은 선원 뒤에 있는 아담한 건물이다. 한 칸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주련은 2구절 뿐이다. 이 게송은 중국 당나라 때 스님인 동안상 찰선사(同安常察禪師)가 읊은 선구(禪句)이다. 편액과 주련 글씨는 역시 소헌 김만호 선생의 것이다.
성전암 요사채
採藥忽迷路(채약홀미로) 千峯秋葉裏(천봉추엽리) 山僧汲水歸(산승급수귀) 林末茶煙起(임말다연기)
약초를 캐다가 문득 길을 잃었는데, 봉우리마다 단풍으로 물들었네. 산속의 스님 물을 길어 돌아가니, 숲 끝에서 차 달이는 연기가 피어나네.
성전암의 요사채에 걸린 주련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산중(山中)’이라는 시이다. 읽으면 저절로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르는 서경시(敍景詩 )이다. 비록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된 짧은 시이지만, 불교에 대한 율곡 선 생의 생각 일단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참선수행의 도량으로 유명한 이곳 성전암에 잘 어울리는 시(詩)라고 생각된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바위 틈 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 옥로차를 달이는 스님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격 조있는 율곡 선생의 ‘산중’ 시를 주련으로 걸 수 있는 안목은 어디서 생겼을까. 짐작하건대 오랫동안 성전암에 주석하면서 차를 애호하고 계신 철 웅선사(哲雄禪師)의 풍류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올 겨울 벗들과 더불어 성전암을 답사하고 하산하던 도중에 우연히 녹 차밭을 볼 수 있었다. 요사채 오른편으로 난 길을 따라 100m 정도 벼랑길 을 내려오다 보니 조그마한 텃밭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텃밭 가운데 소담 스럽게 자란 차나무들이 푸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추위에 약하다 고 알려진 차나무가 팔공산 중턱에서 이 겨울에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것 이 참 신기했다. 차를 혹호(酷好)하는 다인(茶人)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한풍 (寒風)이 몰아치는 깊은 산 속에서 차나무를 가꿀 생각을 했겠는가.
요사채의 글씨는 전아한 전서체(篆書體)이다. 주련 글씨로는 드물게 보이 는 서체이다. 글씨를 쓴 사람은 대연거사(大然居士) 안광석(安光碩·87) 선생 인데, 흔히 청사(晴斯)라는 아호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유명한 전각가요 서예가이신 안 옹은 한때 부산 범어사에서 출가(1938)하여 수행의 길을 걷던 스님이었다. 안 옹은 범어사에서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 스님을 친견한 이후, 만해선사의 인품에 매료되어 서울과 범어사를 오가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성전암 관음전
霜風括地掃枯 (상풍괄지소고해)
誰覺東君令已廻(수각동군영이회)
唯有嶺梅先漏泄(유유영매선누설)
一枝獨向雪中開(일지독향설중개)
서릿바람 땅에 이르러 마른 풀뿌리를 쓸어내리는데, 봄의 신이 이미 돌아옴을 누가 알았겠는가?
오직 고갯마루에 있는 매화만 먼저 알아채고, 매화 한 가지 홀로 눈 속을 향해 피어나네.
관음전은 성전암의 여러 당우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건물이다. 팔공산의 가파른 수직 암벽 위에서 고고한 모습으로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마치 관세음보살이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 정상에서 그 형상을 드러내시어 중생을 제도해주시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당우는 세 칸짜리 맞배식 건물로 그 규모가 아담한 편이다. 관음전을 오르는 돌계단과 그 앞에 서 있는 석등(石燈) 두 개가 암자의 운치를 더해 준다.
주련으로 걸린 시는 일반적으로 관음전에 걸린 것과는 그 내용이 사뭇 다르다. 다른 사찰에는 대부분 관세음보살을 칭송한 노래가 걸려 있는 데 비해, 이곳에는 차가운 눈 속에서 피어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설중매(雪中梅)를 읊은 시가 걸려 있다. 한시의 기본적인 형식-운자와 평측-을 제대로 적용하여 노래한 칠언절구 시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시를 읊은 작자와 출전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관음전의 편액과 주련 글씨는 단아한 해서체이다. 글씨를 쓴 사람은 대구에서 활동하다 돌아가신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 선생이다.
성전암 적묵실
丈夫自有衝天氣(장부자유충천기)
不向如來行處行(불향여래행처행)
대장부는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운이 있으니, 부처님께서 걸어가신 묵은 길을 향해 가지 않는다
적묵실(寂默室)은 성전암 선원 뒤에 있는 건물이다. 당우는 두 칸짜리 맞배식 건물로 그 규모가 아주 작은 편이다. 적묵실은 당호의 의미대로 고요히 침묵하며 홀로 참선수행하며 지내는 방이다. 그런데 암벽에 붙여서 지은 적묵실 옆에는 특이한 공간이 하나 있다. 방이라고 하기보다는 유리 온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유리로 사방을 두르고 난초 화분을 많이 두었으며, 중앙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습기를 머금은 암벽 아래 청초한 난(蘭)을 두어, 가히 석란원(石蘭院)이라고 부를만하다.
적묵실 주련은 단지 2구절만 걸려 있다. 이 게송(偈頌)은 중국 당나라 때 스님인 동안상찰선사(同安常察禪師)가 읊은 선구(禪句)이다. 편액과 주련 글씨는 당나라 안진경 서풍의 해서체인데, 1990년(庚午年) 가을에 쓴 것으로 적혀 있다. 글씨를 쓴 사람은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 선생이다.
필자는 올 겨울 벗들과 더불어 성전암을 답사하고 하산하던 도중에 우연히 녹차밭을 볼 수 있었다. 요사채 오른편으로 난 길을 따라 100m정도 벼랑길을 내려오다 보니 조그마한 텃밭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텃밭 가운데 소담스럽게 자란 차나무들이 푸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추위에 약하다고 알려진 차나무가 팔공산 중턱에서 이 겨울에 싱싱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 참 신기했다. 차를 혹호(酷好)하는 다인(茶人)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한풍(寒風)이 몰아치는 깊은 산 속에서 차나무를 가꿀 생각을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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