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林 江湖/무술 이야기

한국 현대 무예의 지형도

초암 정만순 2022. 8. 16. 21:04

한국 현대 무예의 지형도

 

 

전통무술 십팔기 나라 잃으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조선 말기, 화포의 발달과 함께 고대 병장무예인 십팔기의 효용성이 차츰 떨어지다가 신식 군대의 신설로 인한 구식 군대의 차별, 그로 인한 임오군란, 외세 개입을 거쳐 결국 나라가 망하면서 무예 십팔기도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게 되는 운명을 맞고 만다.

 

대신 그 자리에 검도와 유도로 대표되는 일본무도가 강제로 이식되었다.

인류 문화의 문(文)과 무(武)는 항상 문화의 원형적 구조로 자리 잡고 있는데, 식민지는 다름 아닌 남의 문과 남의 무에 의지하여 문화를 운영해나가는 국가를 말한다.

자주국가란 자신의 문과 자신의 무를 중심으로 문화를 운영해나가는 국가를 말한다.

문화 교류도 자신의 것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종속된다.

일본의 무도 교육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

군과 경찰, 심지어 학교에까지 의무적으로 가르치게 하였다.

해방된 지 65년이 지난 오늘날, 일본무도는 어느덧 우리 것으로 되었다.

 

 
◇해범 김광석(왼쪽) 선생이 십팔기 동작을 시범하고 있는 모습.

 

문화라는 것은 그 출발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에 뿌리내리게 되어 있다.

물론 검도와 유도도 실은 어느 정도 토착화되었을 것이다.

땅의 속성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내성이 있다.

문제는 일본무도를 지속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무도를 잃어버린 데에 있다.

식민 시절의 일본 무도 및 해방 후 중국무술의 유입 과정과 새로 생겨난 우리 전통무예의 왜곡, 그로 인한 우리 민족정신과 정체성의 단절과 혼란은 중선진국이 된 지금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십팔기로 대변되는 전통무예에 대한 새로운 자각도 병행되어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일제 시절 조선의 국기였던 ‘십팔기’의 실체는 단 한 번도 역사에 등장하지 못하고, 단지 그 이름만 전설처럼 전해왔었다.

지금의 80, 90대 어른 중 몇몇이 이름만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따름이다.

 
◇권법

그동안 저잣거리에서 싸움을 유달리 잘하는 사람을 두고 ‘십팔기’를 한 사람이라는 둥, 소문만 전해져 내려왔을 뿐이다.

개중에는 십팔기를 중국 무술로 알고 있는 사람도 종종 있다.

이상하게도 낯선 ‘십팔기’는 ‘쿵후’와 함께 있어야 그래도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다.

무엇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는 자아상실의 상황이다.

한국무예의 지형도를 살피는 데 가장 적절한 중심 인물은 역시 십팔기의 해범(海帆) 김광석(金光錫) 선생이다. 해범 선생은 초창기 한국 근대무예의 중심에서 여러 무예인과 교류하였으며, 중간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하면서 무예에 뜻을 둔 인물들을 안내하고 방향을 잡게 하는 등 교통정리를 하기도 했다.

 

해범 선생과 교류한 인물 중에 한국 무예계를 대표하는 신화적 인물이 여럿 있지만, 일본 체술원 출신의

기하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반 선생은 제자를 기르지 않아 그의 대가 끊어졌다는 점이 약점이긴 하지만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가라테가 일본의 대중적인 무도였다면 체술(體術)은 귀족들의 무도였다.

체술은 일본 왕족과 귀족들만을 위한 호신술이었다.

체술원에서는 도합 16가지의 체술을 가르쳤는데, 모두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한 맨손 기예들로서 잡아채고, 꺾고, 넘어뜨리고, 젖히는 금나술(擒拿術) 위주였다.

이와 유사한 기예들이 1940년대 전후에 일본 시중에서 호신술로 보급되다가 합기도(合氣道)로 진화한다.

반 선생은 체술을 비롯해 여러 무예를 섭렵하고 또 나름대로 큰 성취를 얻었으나, 시중의 무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집안 내력이 친일 귀족이었다는 점에서 자숙하는 의미에서 현실 참여에 회의적이었고, 중국 등지로 떠다니며 낭인 생활을 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그는 체술은 물론이고 합기(내공)와 중국무술도 상당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분이다.

그는 결국 한중일 무술을 전부 익힌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래서 해범 선생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쌍검

그는 6·25전쟁 후에 한때 미군 PX에서 경비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도둑들이 들어 철조망을 끊어내고 PX 물건을 훔쳐간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를 조사 나온 미군 헌병들은 물건 잃어버린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잘라진 철조망을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고 한다.

이유인 즉 반 선생이 끊어진 담장 철사를 잡아당겨 서로 얽어놓았는데 이게 아무리 관찰해도 이상했다는 것이다.

분명 굵은 철사가 무언가 엄청난 힘으로 당겨져 쭉 늘어나 가늘어져서 서로 얽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반 선생은 굵은 젓가락을 당기면 벌겋게 달아 늘어지게 했었다고 한다.

다들 그분의 손에 팔뚝이라도 잡히면 천하의 장골도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못 배겼다고 한다.

합기도계의 많은 원로들이 반 선생을 만나기를 소원하였지만 실현한 적이 없었고, 또한 단 한 명의 제자도 두지 않고 80년 무렵 타계했다.

생전에 무예계 사람으로는 오직 해범 선생과만 교류하였다.

60년 후반에서 70년 초반, 십팔기의 서울역 도장으로 해범 선생을 자주 찾았다.

항상 해범 선생과 도장 옥상에 올라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서로 무예를 교류하였다.

해범 선생의 제자들 가운데서 자신의 무예를 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 무도가 일제 때 들어왔다면 중국 무술은 50년대 후반부터 들어왔다.

서울과 인천에 있던 화교학교에서 국술을 가르치던 이지랑 선생과 이대 앞에서 도장을 연 임품장 선생, 그리고 노수전 선생이 60년 무렵, 삼각지에 중국 무술 도장을 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를 이어 이덕강 선생이 지금까지 임품장 선생의 도장을 이어받아 운영하였다.

이때 여러 명의 한국인이 여기서 중국무술을 배워 나갔다.

당시 중국무예는 중국의 정통 명가라기보다는 대개 대만이나 홍콩의 시중에 퍼져 있던 호신용 권법들이었다. 중국 명가의 무예는 80년 전후로 들어왔다.

 
◇본국검

어쨌거나 이 중국인 도장에서 한국인 김홍진·강용일·정소우·김광수 등이 쿵후를 배웠었다.

당시 이 중국인들은 당랑권팔괘장을 했다고 한다.

 

해범 선생에 따르면 노수전 선생이 팔괘장을 이루었고, 특히 칠철편을 잘 다뤘다고 한다.

아들 노수덕씨가 부친의 무예를 이었다.

 

임품장 선생은 당랑권을 했고, 같은 중국인 제자 이덕강(이포영)씨에게 도장과 권법을 넘겼다.

이덕강씨는 이후 지금까지 이대 앞 도장을 운영하면서 여러 한국인 제자를 기르고 있다.

그는 쌍검과 창을 잘 다룬다.

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일간지에 무협소설이 연재되고, 뒤이어 중국 무협영화가 수입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동안 중국인 도장에서 쿵후를 배우던 한국인들이 시중에다 너도나도 도장을 열기 시작했는데, 70년에는 서울 시내에 5, 6개 도장들이 새로 생겨났다.

마침 전 세계적인 ‘쿵후’ 열풍에 편승하여 중국 무술 도장들은 전성기를 맞았다.

그렇다 해도 전국 10여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쿵후(功夫)’란 말은 글자그대로 ‘공부하다’, ‘연마하다’, ‘닦다’는 뜻이었다.

‘쿵후(공부)’는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 일을 뜻한다.

이것이 서양으로 건너가 중국무술을 표현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마셜 아트’(marshall art)니 하는 용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중국인들이 그냥 수련한다고 말해준 것이 중국 무술을 뜻하는 용어로 굳어버린 것이다.

물론 서양인에게 설명하는 중국무술, 동양무술, 고전무술을 통칭하는 일반 용어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 무예 종목을 가리키는 뜻은 아니다.

어쨌거나 한국 현대무예사에서 60, 70년대 이 중국인들의 쿵후 도장들이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해방 후 ‘십팔기’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69년 10월 3일, 해범 선생이 서울역 근처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십팔기도장을 개원하면서이다.

 

집안 내력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무예 십팔기와 심신수양법을 익혀온 해범 선생은 전쟁이 끝난 후 서울에 정착하면서 적잖은 무예인들과 교유했었는데, 당시 마땅히 운동할 곳이 없어 지인들의 태권도장(황기 선생의 무덕관)이나 중국무술(임품장) 도장을 오가며 혼자 수련하던 차에 아예 자신의 도장을 연 것이다.

그러자 중국 무술계의 원로들은 물론 서울의 모든 무술도장 관장들이 이곳을 사랑방처럼 드나들게 되면서 십팔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장창

 

이즈음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무술 도장들도 십팔기의 정확한 뜻도 모른 체 ‘십팔계’라는 글자를 ‘쿵후’라는 글자와 함께 간판에 써 붙이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한국인이나 중국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십팔기를 중국무술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십팔기란 이름이 미처 제자리를 잡기도 전에 세계적인 쿵후 바람이 불어 닥친 때문이었다.

 

해범 선생이 십팔기 도장을 연 것도 바로 이 시기였고, 역사적 사실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때여서 중국무술·쿵후·십팔기가 서로 뒤섞여버린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중국인들은 결코 ‘십팔기’란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고, 그곳에서 쿵후를 배워 나와 도장을 운영하던 한국인들이 십팔기의 역사를 모른 체 들은 풍문으로 ‘십팔기’, ‘십팔계’를 중국무술이라 운운했었다.

두 손으로 칼을 엄숙하게 잡으면 일본 검도, 창이나 봉 등 여타 병장기들을 다루면 중국무술, 권법을 하면 쿵후, 그저 맨주먹으로 벽돌이나 기왓장을 깨야 한국무술로 단정 짓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권법과 창봉 등 온갖 무기를 다루는 십팔기는 당연히 중국무술로 인식되었다.

 

무예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일반인들은 물론 무예인들조차도 중국 무협영화, 무협소설, 일본 무협만화를 통해서 얻은 꽤 허황된 상식이 고작이었다.

물론 병장기를 다루는 데 있어 중국무술, 일본무술, 한국무술이 그 기법에서 서로 크게 다를 수가 없고, 거의 유사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런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해범 선생만이 계속해서 십팔기가 우리 것이라고 고집하며, 그 이름 석 자 지키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다만 도장 운영상 한 개뿐인 십팔기 권법 이외에 다른 호신용 권법이 더 필요하였기 때문에 당시 유행하던 중국 권법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분위기는 쿵후가 아니면 배우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쿵후도 함께 써 붙여야 했다.

그러면서 이 무렵 한국무예계의 한편에서는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이름의 무예 종목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정도술’, ‘불무도’, ‘심검도’, ‘선무도’, ‘정신도법수련회’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개중에는 사라진 것들도 많았다.

물론 신생 무술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생겼지만 오래 역사를 만들어가는 무술이 적은 것은 당연하다.

 
◇현대 한국무술의 초창기에 중심 인물이 된 해범 김광석 선생과 원로 무예인들이 1970년 10월 3일 개천절을 맞아 해범 선생의 ‘십팔기 도장’(서울역 부근) 개원을 축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일본 체술원 출신의 전설적 무예인 반기하 선생, 팔괘장의 노수전 노사, 뒷쪽 서 있는 사람이 김광석 선생.

 

정도술은 검도의 변형… 불무도, 합기도·차력 합쳐 발전
공력 높아도 시대 감각 잃으면 도태… 새 전수방법도 필요
각종 무예들간 영향 미치며 시대의 요구따라 변신 거듭

 

무술인들은 대개 무술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대개 여러 무술을 섭렵하게 되어 있고,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신생 무술은 대개 태권도, 합기도, 십팔기, 검도, 그리고 기공을 과시하는 차력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에 산중에서 비전해오던 전통무술, 그리고 중국의 내가무술과 외가무술을 조금씩 익혔던 사람들이 나름대로 창안한 것들이 많다.

이들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신비한 우리 무예라고 주장하지만 이 중에는 시중의 영화나 만화 혹은 무예서나 무협소설 등 근자에 모방하여 꾸며낸 이야기들이 많다.

 

역사적 단절이 불러온 혼란 속에 생겨난 생계용 신전통무예의 일부 종목이 성공을 거두자, 이후에도 계속해서 전통무예가 신상품처럼 생겨나는 기현상을 보이게 된다.

이런 경우 무술이 진화(evolution)하는 것이 아니라 퇴화(involution)한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무술 프로그램보다 못한 무술이 생겨나서, 심하면 혹세무민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의 복잡화를 통한 타락이다.

그래서 무술인들은 자신의 무술이 혹시 퇴화의 길에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여야 한다.


무예의 잡종강세는 천하의 대세이다.

그러기에 전통·민족·산중(山中)·가문(家門) 비전을 표방하는 것은 증명할 길도 없고 정확한 자료도 제시하기 어렵다.

그것보다는 실력을 보여주는 게 정도이다.

실력이 없는 무술은 자동으로 도태되기 마련이다.

 

또 무술의 공력이 높다고 하더라도 시대에 감각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외면당한다.

그러기에 무예인들은 백척간두에 서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선사와 같은 신세인지도 모른다.

무술 자체의 진화는 물론 무술을 전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야 한다.

 

정도술은 검도를 익혔던 안일력씨가 창안한 것으로 주로 검도의 변형이다.

그는 1969년 TV드라마 ‘암행어사’에서 어사의 호위무사로 출연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그의 동생 안길원씨와 함께 젊은 무인들을 TV사극에 출연시켜 주는 산파역을 맡는다.

그때부터 TV 사극은 무예인들의 직업적 출구가 되었다.

안길원씨는 충주무술축제에 관계하면서 나름대로 무예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불무도조자룡씨가 만든 것으로, 처음에는 합기도와 차력을 융합한 무술이다.

매일경제신문 근처에 도장을 차려 놓고 주로 지압을 통해 이름을 넓혀 갔다.

해범 김광석 선생이 무술 구성에 조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 불무도는 현재 양산 금강사 주지 안도 스님불무도와는 다른 것이다.

안도 스님의 불무도는 양익 스님의 계통이다

선무도는 70년 무렵 부산 범어사의 승려 양익에 의해 만들어졌다.

후에 그의 제자 설적운 스님에 의해 선무도라는 이름을 내걸게 된다.

양익 스님은 세속에서 태권도 유단자였는데 출가 후에도 나름대로 무예를 계속 익혀 태권도와 역근(易筋)을 조합해서 선무도를 만들었다


양익의 사형인 양우 역시 태권도를 하였고, 79년 무렵 서울 남영동에서 해범 김광석 선생에게서 쿵후를 배우면서 중앙대 석사과정에서 태극권에 대한 논문을 완성하였다.

아마도 태극권에 대한 논문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무예의 깊이가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학문적 차원에서 한국인이 중국 무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첫 사례이다.

해동검도의 전신인 ‘심검도’는 70년대 초 김창식 선생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가 무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시 해범 선생에게서 십팔기(쿵후)를 배우던 친구(김윤우)에 의해서였다. 당시 그는 수유리 화계사 근처에 살았는데, 절 근처에서 수련을 하였다고 한다.

심검도라는 이름의 작명은 당시 그 절에 자주 거하던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정태혁 교수의 조언을 받기도 했다.

 

심검도에서 분가하여 나름대로 재창조한 해동검도는 탤런트 나한일씨의 인기와 더불어 급성장하였다.

김창식씨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따로 도장을 냈다.

그는 미국에서 숭산 스님의 관음선원(The Kwan Um School of Zen)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해동검도는 나한일계와 심검도계, 그리고 대구 지방에서 해범의 십팔기와 합쳐진 부류로 갈라져 이어오고 있다.

마산, 창원 지역의 한국본국검협회는 원래 해동검도와 검도계 사람들이 90년대 말에 해범 선생이 ‘본국검’이란 책을 낸 뒤에 ‘십팔기를 복원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등장한 단체이다.

한국 무예의 발전에서 차력을 빼놓을 수 없다.

차력의 대부는 최대길씨이다.

그는 당시 조계사의 청담 스님을 잘 따랐고, 그 때문에 불교정화운동에도 뜻을 같이했다고 한다.

아주 건장한 그는 차력술로 전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영호남은 물론이고, 강원도의 무승(武僧)들이 그와 인연을 맺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당시 해범 선생은 청담 스님과 친하게 지냈으므로 자연히 최대길씨와도 가깝게 지냈다.

70년 무렵 차력의 인기가 시들어갈 때 이 최대길씨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 바로 청산거사이다.

청산거사는 처사로 통하면서 동네 절에 왕래했는데 당시 그 절에 다니는 보살들의 도움으로 현재 단성사 옆 백궁 다방 건물에 ‘정신도법수련회’를 내걸었다.

이것이 오늘날 국선도의 출범이 된다.

당시 보살들의 남편이 후에 5·16혁명의 주역이 되는 바람에 국선도는 창립 후 최대 호황을 맞는가 싶었는데 호사다마라고 ‘경솔한 언사’ 때문에 도리어 화가 되어 된서리를 맞는다.

70년대 중반, 중국무술 사범 노수전씨의 아들 노수덕씨가 일부 비주류 합기도인들과 함께 사단법인

‘대한쿵후협회’를 결성한다.

그러자 비록 그동안 중국 무술인들과도 경계 없이 교류해 왔던 해범 선생은 ‘십팔기’의 보전을 염려하여

대한십팔기협회’(76년 결성, 81년 문교부 사회단체 등록)를 만들었다.

이때 해범 선생을 따르던 절반 정도의 중국 무술도장들도 대한십팔기협회에 가입했다.

당시에는 도장을 개설하려면 협회의 인증서가 필요했었고, 협회의 단증도 발급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십팔기를 가르치지 않은 중국무술도장에서도 십팔기단증이 발급되었다.

당시에는 모두들 십팔기를 중국무술로 알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나라가 있으면 당연히 군대가 있었을 것이고, 군인들은 각종 무기들로 훈련을 했을 터인데, 그런 기본적인 상식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저 병장기를 다루면 무조건 중국무술로 치부하던 때였다.

이렇게 해서 크게 양분되었던 무예계는 이후 몇 개의 중국무술협회가 생겨나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다가 얼마 후 해범 선생이 도장을 접고 무예계를 떠나고, 십팔기는 그의 몇몇 제자들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나가게 된다.

여러 개로 쪼개져 있던 중국 무술계는 90년 아시안 게임을 계기로 중국과 국교가 열리면서 ‘우슈’가 제도권에서 새로운 유망 스포츠로 떠오르자 모두 ‘대한우슈협회’로 통합하게 된다.

동시에 대한체육회 산하의 경기단체로 가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통무예’라는 용어가 무예계에 등장하고 이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한 계기는 85년 당시 민속학자이자 문화재전문위원이었던 심우성 선생과 해범 선생의 만남이었다.

평소 우리 무예와 전통 춤의 상관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심우성 선생은 필자와의 인연으로 해범 선생과 조우하게 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그때까지 저잣거리 왈패들의 주먹다짐 정도로만 인식되던 십팔기가 더없이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임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전통무예로서의 십팔기의 전개양상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십팔기의 실기를 최초로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 실기해제’ 출간을 기념해 1987년 12월 22, 23일 바탕골예술관에서 개최된 ‘해범 김광석 한국무예’ 발표회 팸플릿. 한국 현대무술 발표회의 효시가 됐다.

해범 선생의 십팔기와 그 전승을 확인한 심우성 선생은 더 이상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해범 선생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그 실기를 세상에 공개토록 하였는데, 그로 인해 우리나라 최초로 십팔기 교본인

‘무예도보통지 실기해제’(심우성 해제, 김광석 실연, 1987, 동문선)가 출판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22, 23일 서울 동숭동 바탕골소극장에서 한국민속극연구소 주최로 ‘해범 김광석 한국무예발표회’를 가졌다.

이를 계기로 학계와 문화계에 전통문화로서의 십팔기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책이 세상에 나가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십팔기가 우리의 전통문화라는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자, 먼저 대학생들이 동아리를 결성하여 해범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게 된다.

이후 10년 동안 그들을 지도하는 한편 십팔기 전 종목을 각론으로 해제한 ‘권법요결’ ‘본국검’ ‘조선창봉교정’을 펴내는데, 모두 이 방면의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이론서들이다.

97년, 위 세 권의 집필이 끝나자 해범 선생은 모든 것을 후학들에게 맡기고 도장을 접었다.

이후 동아리 졸업생들과 학자들로 구성된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의 활동 덕분에 십팔기에 대한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학계의 관심을 유도하여 본격적인 전통무예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임동규 선생이 감옥에서 혼자서 책을 보고 십팔기를 터득하여 복원했다고 주장하며 ‘경당’이라는 무예단체를 만든다.

처음에는 ‘십팔기’라는 말을 사용하다가 얼마 후 ‘24반 무예’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 최근에는 그의 제자가 독립해서 수원 화성에서 ‘24기’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누구에게서 십팔기를 전승받은 것도 아니고 자의적으로 실기를 해석한 데다 그 명칭조차 왜곡함으로써 가까스로 제자리를 잡아가는 십팔기를 혼란스럽게 한 점이 있다.

본래 ‘무예도보통지’에는 ‘24반 무예’라든가 ‘24기’라는 말이 없다.

본래 ‘십팔기’가 명칭이고 그 책을 낼 때 마상무예 등 부수적인 6기를 첨부하였을 따름이다.

그 외에도 7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 ‘특공무술’ ‘단학’ ‘기천문’ 등 여러 무술이 생겨나고, 90년대에는 중국과의 문호 개방으로 ‘우슈’ ‘태극권’ 등 갖가지 중국무술이, 일본에서는 ‘극진카라데’ ‘거합도’ 등이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해범 선생의 업적에 편성해서 ‘본국검협회’ 등 유사 십팔기단체들과 그 연원이 불분명한 온갖 전통무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국무술은 해마다 발전하여 특공무술에서 그 강인함을 보인다.
특공무술은 태권도 다음으로 한국 군경의 기초무술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특공무술장수옥(張水玉)씨가 군에서 합기도와 태권도 등을 기초로 창안한 군사무술이면서 동시에 강한 호신술이다.

그는 오랫동안 청와대 경호실에서 무술사범을 하면서 특공무술을 우리나라 경호무술로 키워냈다.

해범 선생과도 친하며 절대 특공무술이 자신이 새로 만든 것으로 비전해 오던 무예란 거짓말을 안 하는 드문 인물이다.

경호무술의 시대적 요구와 함께 장명진(張明鎭)경호무술도 생겨났다.

이상은 해범과 그의 주변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본 한국의 현대무예사이다.

다소간 무술단체의 주장과는 그 기원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한 내용이다.

더 깊은 내용도 있지만 프라이버시와 무술인들의 자존심을 위해서 쓰지 않는 부분이 많다.

크게 보면 한국 현대무예는 결국 60∼70년대 민족의 정기의 발양과 국가재건과 중흥의 기운에 동참하여 융합, 창시, 재창조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겨났다.

지금도 전통의 단절로 인한 무예 문화에 대한 무지와 잘못된 인식이 무예계는 물론 무예학계에도 만연해 있다.

무예계의 통렬한 반성과 함께 이제는 학계와 문화계에서도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전통무예학’을 제도권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물론 전통은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하여야 한다.

옛것을 그대로 지키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무예의 수준이 후퇴하는 것은 두고 그대로 바라볼 일은 아니다.

한국 현대 무예사를 보면 십팔기·태권도·합기도·검도·공수도를 비롯하여 각종 무예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새롭게 변신하고, 카피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무예의 잡종화가 결코 부끄럽거나 나쁜 것만이 아니다.

이런 잡종을 우습게 보는 자세도 일종의 위선적 선비문화의 나쁜 전통에 기인한 것이다.

잡종화야말로 무예가 시대에 적응한 새로운 모습이다.

지금 훌륭하게 무예가 구성되는 것이 중요하지, 내용도 없는데 ‘민족’ ‘비전’ 운운한다고 훌륭한 무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예의 과학적 속성상 발전하지 않으면 퇴출당하게 되어 있다.

특히 새로운 무예가 종래의 무예보다 못하여 퇴보하였다면 이는 문화의 확대 재생산이라는 법칙에도 어긋난다.

그러한 점에서 새로운 무예를 창시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무예는 당대 최고의 과학이다.

거기에는 누천년에 걸친 조상의 경험적 지혜와 정신이 녹아 들어 있다.

국기 십팔기의 재정립이 체육, 예능, 의학, 민속, 역사, 철학은 물론 전통문화 콘텐츠로서 무궁무진한 자원이 된다는 사실을 새로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국기 십팔기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민족 공유의 자산이다.

누구나 더 좋은 무술을 만들든가, 시대에 맞은 호신술을 개발한다든가 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용하여 거짓 족보를 덮어씌우거나 퇴보된 기술로 도사행세를 하는 것은 무예인의 자세가 아니다.

검도, 태권도, 택견은 이미 제도권에 속해 있다.

그 연원을 ‘꾸밈없이’ 밝혀야 할 의무가 스스로에게 지워져 있다.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해 어느 누구든지 의문을 제기할 권리 또한 있다.

지금 제도권으로 진입하려고 애쓰고 있는 무예 종목들은 이 점을 분명히 해야 뒷날 망신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가문이든, 나라든, 학문이든, 기업이든 각기 그 역사를 가르치고 배운다.

그것을 두고 전통이라 일컫는다.

한국 무예계도 내려오는 불문율이 있다.

비록 오합지졸일지라도 같은 무예인으로서 서로 허물을 뜯거나 나무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같은 불문율이 미덕으로 통하지만은 않는다.

바른 역사, 바른 전통이라야 바른 정신을 계승할 수 있다.

현재 태권도를 비롯하여 일부 종목을 제외하고는 어떤 무술도 어렵지 않은 곳이 없다.

그만큼 한국인은 알량한 선비문화 때문에 무술을 비천하게 보거나 머리 나쁜 사람만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무술이 공부 못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무술도 공부(功夫)이다.

중국은 무술을 ‘쿵후’(功夫)라고 하지 않는가.

무술의 고수는 머리가 좋지 않으면 안 된다.

무술도 계속 재창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술도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시대만 탓할 수는 없다. 그

러나 아쉽게도 현재의 상황은 한 종목의 무술로는 도장을 운영하기 어렵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현상유지도 어려우니, 여러 종목을 잡탕으로 구색을 갖추고 운영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무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무술이 시장경제와 만나지 못하는 문화적 기현상, 혹은 불균형 때문에 먹고살기에 급급하다 보니,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지경에 처한 것이 많다.

무술도 문화의 중요항목으로 다루면서 국가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외국의 무예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날이 오고 말 것이다.

무(武)의 정신이 없으면 결국 나라가 부패하고, 비겁하게 되고, 망하게 되어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도 상무정신의 필요하다.

'武林 江湖 > 무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타법 (爪打法) : 경락두드리기   (0) 2015.08.07
점혈 (點穴)  (0) 2015.08.07
우슈(武術)의 종류   (0) 2015.07.14
무술 관련 사이트 총집합(모음  (0) 2015.07.14
[스크랩] 일월문 三太極  (0) 2014.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