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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 역사 기행 -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 / 팔공산동봉석조약사여래입상

초암 정만순 2021. 11. 25. 21:38

우리땅 역사 기행 - 

팔공산마애약사여래좌상 / 

팔공산동봉석조약사여래입상 

 

 

 

 

 일시 : 2021. 11. 26 (맑음)

 

 기행로 : 수태골 - 서봉 - 마애여래좌상 - 비로봉 - 동봉석조약사입상- 동봉 - 수태골

 

 기행인 : 초암 독행

 

 

팔공산(八公山)

 

 

대구시 동구와 경상북도영천(永川)ㆍ군위군(軍威郡) 사이에 있는 산.

해발 1,192.3이다

 

대구광역시 중심부에서 북동쪽으로 약 20㎞ 떨어진 지점에 솟은 대구의 진산이다. 남쪽으로 내달리던 태백산맥이 낙동강·금호강과 만나는 곳에 솟아 행정구역 상으로는 대구광역시 동구에 속하지만, 영천시·경산시·칠곡군·군위군 등 4개 시·군이 맞닿는 경계를 이룬다.

주봉인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동·서로 20㎞에 걸쳐 능선이 이어진다.

남쪽에 문암천(門岩川), 북쪽과 동쪽에 한천(漢川)·남천(南川)·신녕천(新寧川) 등 여러 하천과 계곡이 발달하였다.

 

은해사(은해사(銀海寺)ㆍ동화사(桐華寺)ㆍ파계사(巴溪寺) 등의 명찰(名刹)이 있으며, 심지왕사(心地王師)ㆍ원효대사(元曉大師)ㆍ의상(義湘)ㆍ윤필(尹筆) 등이 수도하였다

또한 팔공산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통일구상을 하면서 수행했던 곳이며, 고려를 세운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원래 산의 명칭은 공산이라고 불렀는데 신숭겸을 포함한 고려의 개국공신 8명을 기리기 위해 팔공산(八公山)이라고 불렀다.

   

이 산을 예로부터 부악(父岳)·중악(中岳)·공산(公山)·동수산(桐藪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선덕여왕(宣德女王) 때 사직단(社稷壇)을 세우고, 경내의 삼산(三山)ㆍ오악(五岳) 이하의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대ㆍ중ㆍ소로 나누어 제사지냈는데, 부악(팔공산)은 이들 중 중사(中祀)를 지내던 오악(五嶽: 동ㆍ서ㆍ남ㆍ북ㆍ중) 중의 중앙에 해당하는 곳으로 신성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팔공산마애약사여래좌상(八公山磨崖藥師如來坐像)】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시도유형문화재 제3호.

대구 팔공산 중앙봉의 정상 가까운 절벽에 새겨진 마애약사불상이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은 전체 높이 1.82m 정도로 조각이 우수하고 안정적인 구도감, 평면적인 신체의 구성, 화려한 장식성, 화려한 사실주의 양식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8~9세기 통일신라시대 마애불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불상이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八公山 磨崖藥師如來坐像)은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에 있는 팔공산 동봉의 석불입상에서 서쪽에 솟아 있는 비로봉의 정상 가까운 절벽에 새겨져 있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은 1982년 3월 4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은 연화대좌[불보살을 모시는 자리를 연꽃의 모양으로 조각]위에 가부좌(跏趺坐)[두 발등을 포개어 앉는 자세를 틀고 앉아 있는 형태]이며, 두광(頭光)[부처의 머리에서 나오는 빛]과 신광(身光)[부처의 신비스러운 빛], 거신광(擧身光)[불상의 몸 전체를 감싸는 빛]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민머리]이고 큼직한 육계(肉髻)[부처의 머리 위에 살이나 혹, 머리뼈가 솟은 것으로 지혜를 상징]가 높게 솟아 있다.

두 눈은 반개(半開)[눈을 반쯤 감음]하고 코는 오뚝하며 인중(人中)이 뚜렷하고 입은 좀 작게 표현되었으며, 엷은 미소를 띄고 있다.

미간에는 백호(白毫)[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가 없으며, 두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길게 표현되었고 목에는 삼도(三道)[불상의 목 주위에 표현된 3개의 주름]가 뚜렷하다.

 



어깨는 당당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가슴은 편평하여 양감이 표현되지 않았다.

법의(法衣)는 우견 편단(右肩偏袒)[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어서 노출되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는 형식]으로 옷주름이 유려하고도 규칙적인데, 옷깃이 왼쪽 어깨 위에서 반전되어 뒤로 넘어가는 표현은 통일신라의 우견 편단을 한 불좌상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른손은 외장(外掌)[손바닥을 바깥으로 함]한 채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으며 다섯 손가락 마디마디의 표현이 뚜렷하다. 왼손은 배 앞에서 약호를 들고 있으며 손가락이 길게 표현되어 있다.

광배[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으로 몸 뒤쪽에 둥근 장식물로 표현]는 두광과 신광 그리고 거신광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조각이 정교하고 화려하다.

머리에는 큼직한 단판 육엽(單瓣六葉)[여섯 잎의 홑꽃잎]의 연꽃무늬를 새기고, 그 둘레에 2조의 테두리선을 돌렸다. 그 바깥으로 다시 2조선을 돌렸다.

그 사이에는 덩굴무늬로 장식하였다.

신광 역시 두광과 같은 모습이고 두·신광 주위에는 대좌에서 두광 정상까지 불꽃무늬로 장식했다.

 



대좌는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무늬]과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으로 이루어진 연화대좌인데, 무릎 밑의 단판 앙련은 이중으로 겹쳐져 있고 그 밑으로 복련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앙련 중앙의 큰 연꽃잎 안에는 귀꽃 모양의 문양을 새겨 넣었다.

연화좌 밑으로 두 마리의 용은 서로의 몸을 엇갈려서 대좌를 떠받들고 있듯이 표현되어 있다.

 불상의 대좌에 용두를 조각한 것은 희귀한 예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사산비(四山碑)인 「대숭복사비명(大崇福寺碑銘)」에 “2층 불전의 용으로 된 대좌위에 노사나불을 모셨다.”라는 대목을 근거로,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의 대좌는 숭복사 불상이 만들어진 9세기 이후에는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팔공산동봉석조약사여래입상(八公山東峰石造藥師如來立像)】

 

 

시도유형문화재 제20호.

 

대구 팔공산 비로봉과 동동 사이 잘룩한 안부인 장군메기에 위치하고 있는 전체 높이 6m에 달하는 거대한 석불입상이다.

 

 

얼굴은 두 볼이 풍만하고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어서 자비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신체에 비해 큰 오른팔은 안쪽으로 늘어뜨렸는데 다섯손가락의 길이가 고르지 않아 부자연스러우며, 왼팔은 가슴 앞으로 올려 무언가를 잡고 있는 듯하나 확실하지 않다.

옷자락 밖으로 노출된 발끝은 발가락의 조각이 뚜렷하여 거대한 불상임에도 안정감을 준다.

거대한 불상에 잘 조화되어 있는 옷주름이나 인상 등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관봉(冠峰)의 석조여래좌상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 6m.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해발 1,155m의 고지(高地)에 위치하고 있는 이 불상은 거대한 화강암의 서쪽 면에 거의 원각에 가까운 고부조(高浮彫 : 높은 돋을새김)로 조각되어 있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 자체가 거대한 광배의 역할을 하며 머리 주위로는 두광(頭光 : 부처나 보상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의 흔적이 남아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넓고 편평한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를 가졌다. 반쯤 뜬 눈은 가늘고 길게 표현되었는데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두 볼은 살이 찐 편이고 입가엔 미소를 띠고 있어 온화하고 자비스러운 불심을 느낄 수 있다.

신체에 비해 얼굴은 좀 크게 표현되었다.

거대한 불상을 올려다보며 예불을 드리는 예배자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된다.

 

 

귀는 길어 어깨에 닿을 듯하며, 목은 너무 짧아서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치 않다.

이 불상은 양손과 발이 모두 신체에 비해서 지나칠 정도로 크게 표현되었다.

오른팔은 아래로 길게 늘어뜨려서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였지만 조각 수법은 고르지 못하다.

왼팔은 가슴 위로 들어 올려 외장(外掌 : 손바닥을 바깥으로 함)했다.

엄지와 장지를 맞대어 지물(持物)을 가진 듯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법의(法衣 : 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는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이고 옷자락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뜨렸다.

단순한 호선(弧線 : 활등 모양으로 굽은 선)형 옷주름만이 표현되었다.

법의 밑으로는 군의(裙衣)의 표현이 희미하고 직립한 두 발끝과 발가락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좌·우측 옷자락도 양팔에 걸쳐 넓게 늘어뜨려졌는데 마치 도포 자락을 연상케 한다.

 

이 불상은 손과 발에서 기형적 조법이 나타나기는 하나 거대한 입상에 잘 조화되어 있는 옷주름이나 얼굴 모습 등의 조각 솜씨로 보아 경산시의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 보물 제431호)과 양식적으로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수태골

 

수태골은 옛날 어떤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해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노인이 부인사 근처에 있는 이 계곡에 가서 백일 기도를 드리면 아기를 수태할 수 있다고 했다.

부인이 그 노인의 말대로 백일 기도를 했더니 아이를 수태했다는 이야기에서 수태골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설과 수태골의 물이 유난히 말고 깨끗하여 수태(水台)라고 하게 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

 

 

● 서봉

 

 

 

 

● 비로봉

 

 

 

● 동봉

 

 

 

 

 

◆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