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식물이야기

고화 중 수목 (‘사문탈사(寺門脫蓑)’)

초암 정만순 2021. 9. 24. 09:38

고화 중 수목 (‘사문탈사(寺門脫蓑)’)

 

 

정선 '사문탈사'(1741), 비단에 채색, 21.2x33.1㎝,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 이름이 좀 어렵다.

‘사문탈사(寺門脫蓑)’의 ‘사'는 도롱이를 나타내는 말이며 ‘절 문 앞에서 도롱이를 벗는다’는 뜻이다.

볏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띠로 만든 옛날 비옷이 도롱이이다.

그림처럼 눈 오는 날 입으면 방수는 물론 방한복의 기능도 해준다.

소한과 대한의 중간인 지금이 바로 그림 속의 그 계절이다.

 

절 앞에 길게 늘어선 여섯 그루 고목나무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맨 왼쪽의 연하게 줄기만 그러져 있는 나무는 또 다른 ‘사문탈사도’에 나무 전체가 다 그려져 있어서 전나무임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다섯 그루는 모두 측백나무이다.

사람 크기와 비교해 볼 때 두 아름이 넘는 고목나무이다.

땅에 맞닿은 줄기 아랫부분에는 모두 고깔 모양으로 나무 속이 썩어 있다.

나무 크기나 속 썩음으로 봐서 나이는 적어도 300~400년으로 추정된다.

측백나무의 줄기 껍질은 원래 세로로 깊이 갈라지므로 그림에서도 약간 굵은 빗금으로 처리했다.

측백나무는 침엽수로 분류하지만 날카로운 바늘 모양 잎이 아니다.

작디 작은 비늘잎이 여러 겹으로 포개지면서 한쪽으로 눌린 것처럼 전체적으로 납작하다.

그림에서 눈이 살짝 덮인 것처럼 보이는 납작한 잎은 측백나무 잎의 실제 모습 그대로이다.

 

예부터 왕릉의 둘레 나무는 주로 소나무를 심었지만 측백나무도 흔히 심었다.

무덤 주위에는 시신을 뜯어먹고 사는 ‘망상(魍像)’이란 괴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망상은 호랑이와 측백나무를 가장 겁낸다고 알려져 있다.

호랑이는 무덤 앞에 석상으로 만들어두고 주위에는 망상을 물리칠 측백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중국 베이징 근교, 명나라 역대 17황제 중 13명이 잠들어 있는 대규모 능묘군인 명13릉 주변은 온통 측백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측백나무는 중국의 사원이나 귀족의 묘지에는 반드시 심는 나무였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절 앞에 하필이면 고목이 된 측백나무가 자리 잡게 되었을까?

절의 성격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다.

문 옆으로 긴 행랑채가 달려 있는데 이런 절 건물 모습은 조선 왕실의 무덤을 관리하는 원찰에서나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절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했으며 나라 제사에 쓰는 두부를 주로 만들었다.

오늘날 수원 융건릉 가까이 있는 용주사가 대표적인 조포사라고 한다.

 

 

그림에서 소를 타고 절을 찾은 손님은 율곡 이이 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선비가 흔히 찾는 왕실과 관련된 사찰에 의미가 있는 나무라면 바로 측백나무를 들 수 있다.

 

 

[ 謙齋 鄭敾 ]

 

출생 - 사망

1676년(숙종 2년) ~ 1759년(영조 35년)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년)이 살던 시대는 진경시대(眞景時代)이다.

진경시대는 숙종대에서 영조대까지인데 겸재의 활동기인 영조대에는 진경시대 중에서도 전성기다.

진경시대란 조선 후기 사회가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 문화인 진경 문화를 이루어 낸 시기를 의미한다.

이 문화의 주도자는 왕조시대의 특성상 군주인 숙종과 영조, 정조지만 구체적인 문화 현장에서 당시대가 진경시대임을 작품으로 실증해 준 이는 정선이다.

그래서 그는 화성(畵聖)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선, 「인곡유거(仁谷幽居)」1740~41년, 종이에 옅은 채색, 27.3×27.5cm, 간송미술관 소장.

 

 

양란 후 조선 사회는 전란 후의 혼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상처받은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는 방안을 강구했으니 명ㆍ청이 교체된 세계 질서 재편기에 무력으로 중원을 제패한 청나라의 야만성을 부각시켰다.

청이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동맹국인 조선을 선제 공격한 것이 병자호란이므로, 조선은 침략자인 청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고취하는 것으로 전쟁 후유증 극복의 장치로 삼았다.

또한 평화 공존하는 세계 질서를 무력으로 파괴한 청나라는 세계(당시의 동아시아)의 주도국이 될 수 없다고 치부하고, 조선이야말로 예의를 숭상하고 인륜을 지키는 도덕적 문화 국가의 핵심이라 자부하면서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국임을 천명했다.

조선 문화의 본질은 평화와 애경을 기본으로 하는 자연 친화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문화의 주도층인 지성들이 숭상하는 선비 정신과 검소 질박한 삶의 방식이 그대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생활 양식의 주류가 되었다.

진경을 절묘하게 묘사한 산수화의 수요가 폭증한 것도 이때였다.

조국 산천을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일컬으며 산천 경개 유람하는 국토순례가 유행을 했는데, 왕을 비롯한 궁중 사람들이나 여행 할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이 그 사실적 산수화의 수요자였다.

그러한 문화계의 흐름 속에서 진경산수화의 화법을 완성한 화가 중의 화가가 겸재 정선이었다.

 

진경산수화가 겸재의 손에서 완성되기까지 조선의 독자성을 형성하기 위해 고심한 여러 인사의 사상적, 문화적 움직임이 있었다. 문학에서는 송강 정철(鄭澈, 1536~1593년)이 가사문학으로서 국문학 발전의 서막을 열었고, 글씨에서는 석봉 한호(韓濩, 1543~1605년)가 송설체를 뛰어넘는 조선 고유 서체인 석봉체를 이루어 냈으며, 그림에서는 창강 조속(趙涑, 1595~1668년)이 전국을 유람하면서 경개 절승의 감흥을 읊고 그림으로써 진경시화의 기틀을 닦았다.

조선 왕조는 중국 송나라에서 형성된 성리학을 국학으로 채택하여 성립한 국가이다.

따라서 조선 왕조의 입국 체제는 송나라의 제반 문물을 모방한 것으로서, 불교 예술이 발달한 고려의 미술이 불상 조각을 중심으로 발달한 점과 비교된다.

고려 말에 성리학과 함께 원나라에서 도입된 중국의 강남 문화는 송의 한족 지식인들이 이어온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였다.

이 문화의 특징은 사대부의 교양 필수로서 시ㆍ서ㆍ화를 겸수하는 것이었다.

이때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와서 조선 전기 서체의 전범이 되었듯이 강남의 산수화가 조선 화단의 주류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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