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식물이야기

고화 속 수목 ('세한도')

초암 정만순 2021. 9. 24. 09:56

고화 속 수목 ('세한도')

 

김정희 '세한도'(1844), 종이에 수묵, 23.3x108.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는 흔히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고 할 만큼 최고의 명작으로 꼽는다.

 

‘세한도’란 이름은 논어 자한편의 겨울이 되어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 뜻의 ‘세한송백(歲寒松柏)’에서 왔다.

그림 속의 오른쪽 고목나무는 소나무, 나머지 3그루는 잣나무라고 흔히 해설한다.

‘송(松)’이 소나무인 것은 틀림없으나 ‘백(柏)’이 무슨 나무인지는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잣나무와 측백나무를 똑같이 ‘백(柏)’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측백나무 종류 전체를 말한다.

잣나무는 우리나라 중북부에서 중국 동북부와 아무르강 북쪽 러시아에 걸쳐 분포한다.

중국 문화의 발상지인 황허나 양쯔강 유역 등 중국 내륙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공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 선비들은 잣나무를 평생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중국 문헌에 나오는 송백을 소나무와 잣나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참고로 추사가 귀양 가서 살았던 제주도에는 아예 잣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중국에는 측백나무 종류가 여럿 있지만 이들 중 우리나라에는 측백나무만 자란다.

결국 ‘세한송백’의 나무는 소나무와 측백나무로 보는 것이 맞는다.

 

그렇다면 ‘세한도’에 그려진 실제 나무는 무엇인가?

문인화로서 마음속의 풍광을 그렸을 터이지만 그림의 모델은 있었을 것이다.

추사는 귀양지였던 제주 서귀포 대정마을에서 만나 익숙한 나무를 대상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대정 일대에는 침엽수로서는 소나무와 바닷가에 주로 자라는 곰솔[海松]이 흔하다.

 

그림에서 보면 집 앞의 비스듬히 자라는 오른쪽 고목은 껍질이 거북 등처럼 갈라지고 잎은 짧으나 부드러운 맛이 난다.

소나무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바로 옆 나무는 굵기가 소나무의 3분의 1 남짓하며 껍질이 세로로 길게 갈라지고 줄기도 곧다.

잎이 촘촘하고 솔잎이 억세다는 느낌이다.

곰솔을 떠올려 보면 바로 그 나무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집 왼쪽의 두 나무는 오른쪽 두 나무보다 지름이 가는 젊은 나무이다.

줄기가 곧으며, 가지는 거의 수평으로 뻗고 잎은 상하 짧은 직선으로 처리하였다.

역시 곰솔의 특징과 일치한다.

 

따라서 ‘세한도’ 속에서 만나는 나무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와 3그루의 곰솔이다.

‘세한송백’의 본래 뜻으로 읽으면 소나무와 측백나무, 그림 속의 실제 나무로 보면 소나무와 곰솔이라고 추정한다.

 

 

 

 

 

추사 김정희 [ 秋史 金正喜 ]

시ㆍ서ㆍ화에 능했던 천부적 학자

 

 

출생 - 사망

1786년(정조 10년) ~ 1856년(철종 7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는 18세기 말에 태어나서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 활동한 조선 예원의 마지막 불꽃 같은 존재이다.

조선이 고유 문화를 꽃피운 진경시대의 세계화에 성공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진경시대의 학문 조류인 북학 사상을 본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조선 사회의 변화 논리에 힘을 실어준 장본인이다.

그는 영조가 지극히 사랑한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자이다.

왕실의 내척(內戚)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경축 분위기에 싸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비스러운 탄생 설화도 갖고 있다.

아버지 노경(魯敬)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의 장남으로 24개월 만에 출생했는데, 그가 태어난 향저(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뒤뜰에 있는 우물물이 말라버리고 뒷산인 오석산의 원맥 팔봉산의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 샘물이 다시 솟고 초목이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가 어린 시절 서울 집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의 글씨를 우연히 보게 된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그의 아버지에게 충고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아이는 글씨로서 대성하겠으나 그 길로 가면 인생 행로가 몹시 험할 것이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하시오.”

천재성이 그의 인생에 빛과 그림자를 아울러 드리우고 있음을 노재상이 알아본 것이다.

그가 살다간 19세기 조선 사회는 18세기의 진경문화에서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조선 문화의 보편성으로 흡수해야 하는 전환기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추사고택

김정희는 조선 후기 교목세가의 하나인 경주 김씨 출신으로,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의 남편 김한신의 증손자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소재.

 

실사구시 정신을 실현한 학문세계

 

김정희의 학문세계는 한마디로 ‘실사구시’로 요약할 수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청나라 고증학자 고염무가 주창한 것으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김정희는 실사구시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 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천문학에 대한 식견도 괄목할 만한 정도였다.

일식과 월식 현상 등 관측에 근거하여 서양천문학의 지식을 받아들였다.

 

1821년 34세의 김정희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출셋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10여 년간 김정희와 부친 김노경은 각각 요직을 섭렵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어지러운 정국과 정쟁의 파고 속에서 1830년 부친 김노경이 탄핵받는 일이 발생했다.

아들로서 김정희는 꽹과리를 치며 부친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노경은 강진현 고금도에 절도안치(絶島安置,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하는 형벌)되었다가 1년 뒤에야 겨우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들 부자는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1838년 김노경이 세상을 떴고 김정희는 그 이듬해 병조참판에 올랐다.

훈풍도 잠깐, 김노경을 탄핵했던 안동 김씨 세력들이 이번에는 김정희를 공격하여 그를 관직에서 끌어내렸다.

 

추사체와 세한도를 완성한 예술혼

 

김정희는 혹독한 고문 끝에 제주도에서 서남쪽으로 80리나 떨어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

위리안치(圍離安置)는 유배형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으로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이다.

현재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옛 대정현 현청에 이웃한 김정희의 적거지는 복원된 것으로 유허비와 함께 조그만 유물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판전 - 봉은사에 있는 추사 친필의 현판.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편지를 통해 육지에 있는 지인과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했다.

특히 유배 기간 중 부인과 며느리 등과 주고받은 40통에 달하는 한글 편지는 그의 인간적 면모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유배 기간 동안 화가이자 제자인 소치 허유(1809~1893)가 세 차례나 제주도로 건너가 수발을 들어준 일은 유명하다.

소치는 충심으로 스승인 추사의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제주도 유배기간을 통해서도 그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최고의 걸작품인 ‘세한도’도 이 시기에 그려졌고, 흔히 추사체라 불리는 그의 독창적인 서체도 이때 완성되었다.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 그림이다.

1844년 그의 나이 59세에 수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은 것은 유명하다.

 

유배 기간 중인 1842년 11월 13일, 유배생활 내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였던 아내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1849년 9년간의 유배를 끝으로 마침내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 후 서울 용산 한강 변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는데, 다시 모함을 받아 1851년 북청으로 유배 길에 올랐다. 다행히 귀양은 1년으로 끝났지만, 그는 이제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칠십 평생 열 개의 벼루 밑을 뚫고, 1천 자루의 붓을 망가뜨릴 정도의 예술혼을 지녔던 김정희는 말년을 경기도 과천에서 지내며 일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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