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기생
우리나라 기생의 대표 브랜드는 누가 뭐라고 해도 황진이(黃眞伊)다.
생몰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중종 6년(1511)에 태어나 중종 36년(1541) 30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명은 진랑(眞娘)이고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기에 '개성기생 황명월'로 불러야 맞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6세기를 살았던 황진이는 약 270년이 지나서 19세기 화풍으로 풍속화를 그린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에 의해 '풍속화 기생 이미지'로 치장하게 된다.
또한 1909년 기생조합에서 일제강점기의 권번 기생으로 이어지는 '전통예악의 기생 이미지' 역시 오늘의 입장에서도 황진이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에게 황진이의 기생 이미지는 '16세기에 태어나 19세기 옷으로 치장하고 21세기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퓨전형 기생'이다.
기생 황진이는 아무리 다른 기생을 비추어도 늘 항상 '황진이'만 보이는 거울과 같은 존재다.
우리나라 기생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조선해어화사』(1927)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다.
기생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다루면서,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천민층으로 취급받은 기생들의 자료를 역사서와 각종 문집에서 모았다.
기생의 기원과 각 시대별 제도, 기생의 생활, 유명한 기생들, 기생의 역할과 사회적인 성격 등을 다루고 있다.
또 각종 일화와 시조 및 시가 등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기생이 비록 천민층이었으나 매우 활동적인 여성들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전통문화의 계승자였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의기나 의료에 종사한 의녀도 있었으며, 우리 문학사에 적지 않게 공헌했음도 재확인시켜주었다.
기생을 부르는 별칭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미인'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해어지화(解語之花)'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생(妓生, a gisaeng girl; a singing and dancing girl)은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호칭이다.
지난날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춤 등으로 흥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를 일컫는 말로 '예기(藝妓)'와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우리나라 문헌에서 조선시대 와서야 비로소 출전을 찾을 수 있다.
'기생'의 '생'은 일부 명사 뒤에 붙어 '학생'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또한 성씨 뒤에 붙어 '젊은이' 또는 '홀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예컨대 교생, 서생, 선생, 학생, 이생, 허생 등과 같은 경우이다.
기생의 원류는 신라 24대 진흥왕 때에 여자 무당 직능의 유녀화에 따른 화랑의 '원화(源花)'에서 찾는다.
무당의 유녀화는 인류의 매춘 역사를 논의하는 일반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약용과 이익은 기녀의 문헌 기록을 들어 고려 때에 그 기원을 찾았다.
백제 유기장의 후예인 양수척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는 노예로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다.
고려 때에는 관기(官妓)를 기첩(妓妾)으로 맞고 사대부들이 집마다 둔 기록이 있어 공물이면서 사물로도 여긴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기제도를 한층 정비하였으나, 표면상으로만 '관원은 기녀를 간奸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의 명문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는 관기는 공물이라는 관념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막료의 수청기(守廳妓) 구실로 삼았다.
관비(官婢)와 관기(官妓)는 엄연히 구별되었지만, 세종 때는 관기가 모자라 관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관기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으며,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어머니가 관기이면 딸도 관기가 되었다.
이것은 비인간적이면서도 고약한 경우이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한 지방 수령관이 관기 모녀와 관계를 맺고, 모녀가 번갈아 가면서 수청을 드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세습되는 기생이 아닌 때는 고아거나 빈곤하여 팔리는 것처럼 외적 환경에 의했다.
그밖에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은 허영심에 본인이 희망하거나, 과부가 되어 자원하거나, 양반의 부녀로서 음행하여 자녀안(恣女案)에 기록된 경우가 있었다.
『고려사』의 기(妓) 출전(제129권 열전 제42 반역3 최충헌)
조선시대의 교방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시·서화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혜원 신윤복의 '전모를 쓴 여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8, 9살이 된 기생은 동기(童妓)라 하는데, 교방에서는 12세부터 교육을 시켰다.
춤을 잘 추는 기생은 무기(舞妓), 노래를 잘 하는 기생은 성기(聲妓) 또는 가기(歌妓)라 불렀다.
또한 악기를 잘 다루는 기생은 현기(弦妓) 또는 예기라 하였다.
외모가 뛰어난 기생은 미기(美妓), 가기(佳妓), 염기(艶妓) 등으로 불렀다.
특히 사랑하는 기생은 애기(愛妓), 귀엽게 여기어 돌보아 주는 기생은 압기(狎妓)라 하였다.
나이가 지긋한 기생은 장기(壯妓)라 했고, 의로운 일을 한 기생은 의기(義妓)로 칭송받기도 하였다.
물론 기생의 우두머리는 행수 기생으로 도기(都妓)다.
어두운 호칭으로 노래와 춤과 몸을 파는 기생인 창기(娼妓), 천한 기생이라는 천기(賤妓), 퇴물기생이라는 뜻의 퇴기(退妓)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 두드러지는 기부(妓夫), 즉 기생서방으로 종8품 벼슬인 액례·별감·승정원 사령·의금부 나장·포교·궁가·외척의 겸인 청지기·무사 등이 등장하여 후대에 오랫동안 지속된다.
대원군 시절에는 금부나장과 정원사령은 오직 창녀의 서방이 되는 것으로 허락하였을 뿐 관기의 서방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생을 첩으로 삼으려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기생서방에게 돈을 주고 그 몸을 속량(贖良)해야 한다.
이는 그동안 먹여 살린 비용을 갚는 것으로, 사회적 합의였다.
조선시대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은 서울·평양·성천·해주·강계·함흥·진주·전주·경주 등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이 지역에서 이러한 역할을 이어갔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었다.
비로소 일반인도 요릿집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된 기생은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쳤으며, 이들 권번 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었다.
그 당시 기생에 대해서는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함께 있었다.
한쪽에서 보면 기생들은 봉건적인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상은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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