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典 香氣/入門

조선시대 광업

초암 정만순 2021. 8. 14. 09:25

조선시대 광업

 

 

 

조선조 광업은 김종석씨의 저서 “한국광업개사”를 인용하면, 제 1기는 건국후 세종 12년까지의 40년간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기간 중에는 금의 사용이 승지이상의 고관에 국한되고 금의 채굴도 군인이나 관리들이 직영하였습니다.

철은 19개읍에 민영 야철장을 설치하였고, 그 규모에 따라 일정량을 세금으로 징수하였습니다.

제 2기는 세종 13년에서 중종 25년까지의 100년간으로 이 기간에는 금을 민간인에게 채굴하도록 하되 전량을 관용으로 매입하였고, 노임을 포목으로 지급하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여러 종류의 금속광물이 발견되고 채굴되기 시작하였으며, 철의 산지도 82개소에 달하게 됩니다.

이후 중종 26년에서 영조 48년까지의 240년간을 제 3기로 구분하여, 이 때부터 각종 광물의 민간채굴을 허용하고 각 도에 채광견차관을 파견하여 세금징수를 전담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에는 은전담관 수세관만 해도 41개 읍에 설치되었으나 농경지 피해가 늘어나자 1777년에 이르러 금은광의 채굴이 전면 금지된 때도 있었습니다.

다음은 영조 495년에서 순조 32년까지의 60년간을 제 4기로 구분하였는데 이 때에는 금은의 채굴장이 3,000개소나 되었다고 하며, 이후 현종조에서 한말까지 70여년간을 제 5기라 하여 농경지 이외의 지역에 금은광을 허가하였고 세금으로 거둬드린 금이 부족할 시에는 군이나 관에서 직접 채굴하였습니다.

또한 이 때에 와서 외국인에게도 광업을 허가하게 됩니다.

한국광업사(1986년 광업생산성조사소 발간)에 의하면 1891년에 일본인에게 10년간 기한으로 경남 창원 소재 용장금광산의 채굴권이 허가된 것을 비롯하여 1896년에 러시아인에게 함북 경원 종성의 사금광이, 평북 운산의 금광채굴권이 미국인에게 각각 허가가 되었습니다.

고종 34년인 광무원년(1897년)에는 독일인에게 강원도 금화 소재 금광채굴권이 허가되었는데 25년 기한으로 이익금의 25%를 조정에 납부하는 조건이었고 1899년에 영국인에게 평남 은산금광의 채굴권이, 1900년에 일본인에게 충북 직산의 금광채굴권이 각각 허가되었습니다.

1905년에는 한성광업회사에 황해도 수안광산의 채굴권이 허가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주로 채굴된 광물은 철·유황과 금·은·연광이었으며, 각 광종별 생산활동에 대하여 기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철광업

 

 

15세기 전반기에 조선정부는 새로운 수도건설과 무기제조사업을 위해 철의 생산을 강구하였습니다.

이들 사업에 대한 주무관서로서 선공감과 군기감을 두었으며, 여기서 필요로 하는 철은 농민들로부터 경작면적에 따라 수취하는 염철법을 적용하여 조달하였습니다.

이 염철법은 농민들이 자체로 철을 생산하거나 구입하여 국가에 바치도록 한 공철제도였습니다.

한편, 지방의 각 영·진과 계수관의 도회제하의 무기제조장에서 소요되는 철은 산철읍에 관영철광업장인 철장을 개설하고 정부가 재력과 인력을 동원하여 채취·조달하게 됩니다.

철장은 전국에 20여개소였고, 각 철장에서는 정부가 파견한 철장관이 2백여명의 취련군을 모취하여 일과제 생산을 하였습니다.

15세기 전반의 염철법과 철장제는 정부의 재정적 부담과 농민에게 끼치는 폐해가 컸기 때문에, 15세기 후반에는 이들 제도가 폐지되고, 철장도회읍과 인근 읍의 농민들을 춘추 농한기에만 동원시켜 철을 채납케 한 철장도회제가 채택되었습니다.

철장도회의 수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동되었으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것은 경기·강원도를 제외한 27개소가 있었습니다.

철장도회는 대부분 석철보다는 사철산지읍에 설치되었으며, 농민들은 강의 모래에서 철을 채취하였습니다.

철장도회제를 통하여 국용의 철물을 수취하는 과정에서 야장들에 의한 사경영의 야철수공업이 성장하게 됩니다.

이들 야철수공업자 중에는 정철(시우쇠)만을 채굴·제련한 정철장, 정철의 채굴·제련뿐 아니라 정철기구까지 제작한 주철장, 수철(무쇠)을 채굴·제련하고 부정과 농기구를 생산한 수철장, 동생산지에서 놋그릇을 생산한 유철장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수철장들이 가장 광범위한 판로를 가지고 성장하여, 세종 초에는 10내지 20인 이상의 장인을 거느린 상당한 규모의 야장을 경영하게 됩니다.

이들 야철수공업의 성행과 농민의 심한 피역저항으로 인해, 철장도회제도 15세기 말에 폐지되고, 철장소재읍에만 공철을 부과하고 철물수공업자들로부터는 장세를 징수하여 국용에 충당하기에 이릅니다.

15세기 이후 철물수공업이 성장함에 따라 철광의 개발도 촉진되어 <세종실록> 지리지에 67개 읍이던 산철지가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83개 읍으로 증가되는데, 이들 산철지에는 주로 사철광이 많았습니다.

조선 초기 이후 철물수취체제가 변질되는 상황에서 임진왜란(16세기 말)을 맞게 되었고, 조총 등 군사무기의 대대적인 생산을 도모하기 위하여 도회제 생산이 강요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총 제조를 위한 군수철광의 생산실태는 군아문 소관의 철점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 등 경내의 오군문은 조총 등 무기제조를 위한 철물의 조달 경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야철수공업자들이 자리잡은 산철지를 절수하거나 야철수공업자들을 군오에 편입시켜갔습니다.

이에 따라, 1594년(선조 27)에 재령의 철현둔, 1659년(현종 1)에 장연의 왕제둔, 1715년(숙종 41)에 재령의 갈산둔 등 당시 산철지로 유명했던 황해도 재령·장연 등지는 오군문의 절수지가 되었고, 그곳의 야철수공업자의 일부는 취철아병으로 편입되어 신철을 상납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철의 종류는 크게 생철과 숙철로 구분됩니다.

생철(수철 즉 무쇠)은 주로 부정·농기구 제작에 쓰였고, 숙철은 병기류와 견정을 요하는 각종 도구의 제작에 사용되었습니다.

생철과 숙철을 제련하는 도구는 모두 풍상(풀무)과 야로(용광로)였지만, 풍상과 야로 간에 연결되어 있는 풍혈수에 따라 제련 과정이 달랐습니다.

같은 규모의 야로에서 생산되는 숙철량이 생철량에 비해 다소 적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숙철의 초출품을 신철이라 하여 신철 1근을 타련하면 정철의 열품 4냥이 생산될 정도였습니다.

 

 

유황광업

 

 

조선시대에 유황광의 채굴이 국가의 정책적인 뒷받침을 받게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일로서, 병기용 화약제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국내에서의 유황생산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황의 국내 생산을 서두르게 되어 광산을 발견 보고하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는 시상법까지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661년에서 1712년 사이에 발굴된 전국의 유황지는 무려 20여개나 되었고, 유황산지는 경내의 오군문, 비변사와 지방의 병영에서 설점수세하였으며, 이들 관아는 광산의 운영자금을 마련해주고 광산의 운영은 광산을 발굴한 감관에게 의뢰하였습니다.

유황군의 노동은 일부의 부역 노동과 임금노동의 복합적인 것이었습니다.

유황점에 대한 군아문의 설점수세체계는 18세기 초·중엽에 화약 수요가 격감되고 화약의 제조권이 공인에게 이속됨으로써 붕괴되었습니다.

 

 

금·은·연광업

 

 

 

15세기 조선 정부의 금·은 광산 개발은 국용과 명나라에 대한 금·은 세공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채굴된 산금지는 33개 읍이었고, 산은지는 29개 읍으로서, 금광은 대부분이 사금광이었으나 은광은 석광으로서 연광에 수반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태주은광에서는 채은군 30 인이 연간 100냥을 채납하고, 단천·영흥·안변·정선·회양 산금지는 춘추농한기에 400여냥을 채취하는 등 생산성이 낮았던 것은 아니지만, 금·은 광산의 경우에도 부역 농민의 피역 저항이 극심했기 때문에, 은광은 1429년 명나라에 대한 세공이 면제되면서 중단되고, 금광은 왜금 유입이 시작된 1484 년에 폐쇄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16세기에는 은의 제련기술이 개발되고 명·일본과의 무역이 확대됨으로 인해, 정부의 은광정책과 경영형태에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16세기 초 김감불과 김검동에 의한 연은분리법의 개발로 은의 함유량이 가장 풍부한 단천 광산이 채굴되기 시작했으며, 영흥·북청·문천·홍천·회양·김화·금성·청송 등지의 은광들이 개발되었습니다.

대외 무역이 활기를 띠면서 은의 수요가 급증하자 역관과 부상대고들은 은광의 민영화를 끈질기게 추진하였고, 한편으로는 은산지 주민들에 의한 잠채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잠채에 의해 은이 명나라에 유출되어 명나라에 대한 은세공제가 부활될 것을 염려하여 정부는 은광을 모두 봉치하고 필요시에만 일시 채굴하는 임시관채제와 춘추농한기를 이용한 춘추관채제로 이끌어나가고자 주장하게 됩니다.

이 제도는 모두 농민의 부역에 기초한 관영광업이었으나, 정부가 예상 밖의 군량과 진곡 등 많은 양의 미곡을 일시에 충당하기 위해서는 부상대고의 힘을 빌려야했기 때문에, 부상대고들의 요구에 의해 이들이 직접 은광을 채취할 수 있도록 민채납세제나 민채납곡제를 허가하기도 하여 민영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은 민영광업 발전에 큰 장애가 되어 17세기간에는 군영문의 감관제하의 군수광업이 지배적인 형태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군영문에서는 17세기말까지 68개소의 연광을 개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17세기에 번창했던 군영문의 군수광산도 무기제조업과 함께 17세기말 이후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17세기 말부터 18세기 후반기에는 공인들에 의한 관청 선대제적인 민영수공업이 발달했듯이 광업에도 일종의 관청수공업제적 민영광업인 호조 별장제하의 광업이 발달하기에 이릅니다.


1651년 제정된 호조별장제의 「설점수세법」은 영세한 광산의 소생산자들로 하여금 광산개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호조가 은광의 채굴제련장과 부대시설까지 마련하는 한편 광산 개발자들이 부근의 제목과 연료를 채취할 수 있고 광군들을 임의로 고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호조의 별장들은 대개 서울에 거주하는 부상대고들로서 설점 수세업무를 대행하고 그 대가로 생산량의 상당부분을 수취하였던 일종의 수세청부업자였습니다.

은점의 실질적인 경영자는 당초 은점개설을 호조에 요청할 때 참여한 20∼30인의 점장들 중 우두머리격인 두목이었습니다.

두목은 은점의 생산물을 수합·분배하고 점역도 총괄하였으며 점장과 광군들을 지휘 감독하여 분업과 협력하에 광물을 채취하였습니다.

호조별장제의 은광업도 18세기 중엽부터는 쇠퇴하기 시작하여, 1702 년에 60∼70 개소에 달했던 은점이 점차 줄어들어 1775년에는 23개소 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이에 호조는 같은 해에 별장제를 혁파하고 수령수세제를 채택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상인물주 즉, 상업자본가가 호조의 설점 허가를 받아 자기 자본으로 점소를 설치 운영하고, 당해 지역의 수령이 호조가 정한 세금을 수납하는 제도였습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기에는 이러한 물주제하의 광업 경영 형태가 금·은광 및 동광에 적용되었고, 특히 사금광은 전국 각지의 하천에서 개발되었습니다.

이처럼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기에는 물주가 자본을 투자하고 광주나 덕대가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여 분업과 협력 하에 광산을 운영하는 자본주의 경영형태가 보편화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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