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典 香氣/入門

조선의 화폐, 상평통보

초암 정만순 2021. 8. 16. 20:00

조선의 화폐, 상평통보

 

 

 

 

 현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돈.

과거 조선시대의 돈이란 엽전의 대명사 상평통보였고, 이는 전국적으로 유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였다.
고려 성종 때부터 화폐유통을 위한 역대 왕들의 수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숙종 17세기 말, 전국적으로 유통된 상평통보는 300여 년 동안 지속되며 조선사회를 변화해갔다.
상평통보는 어떻게 성공적인 화폐가 되었을까?
건원중보에서 상평통보까지. 화폐, 그 천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상평통보  [ 常平通寶 ]

 

 

 

 

상평통보

 

조선시대의 화폐. 화폐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었으며, 모양은 둥근 엽전으로 가운데에는 정사각형의 구멍을 뚫고, 앞면에는 구멍을 둘러싸고 상하좌우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한자를 한 자씩 찍었으며, 뒷면의 구멍 위에 주조한 관청의 이름을 박았다.

 

1633년(인조 11) 김신국(金藎國)·김육(金堉) 등의 건의에 따라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고 주조하여 유통을 시도했는데 결과가 나빠 유통을 중지하였다.

그후 1678년(숙종 4) 정월에 다시 영의정 허적(許積), 좌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의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를 다시 주조하여 서울과 서북 일부에 유통하게 하였다.

그 뒤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 유통하게 했는데, 조선 말기에 현대식 화폐가 나올 때까지 통용되었다. 

평안감영(平安監營)·전라감영(全羅監營)에 명하여 이를 전담 주조하게 하였으며 사주(私鑄)를 금지하였다. 이는 200년 이상에 걸쳐 주조·발행되었는데 그 동안에 주전행정(鑄錢行政)이 문란하였고, 조정에서도 각 관청의 재정상 궁핍을 구제하기 위하여 각 관청에서 이를 주조하여 사용하도록 허용하였다.

이 화폐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었으며, 크기가 다른 것이 3종이 있었다.

모양은 둥근 엽전으로 가운데에는 정사각형의 구멍을 뚫고, 앞면에는 구멍을 둘러싸고 상하좌우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한자를 한 자씩 찍었으며, 뒷면의 구멍 위에 주조한 관청의 이름을 박았는데, 다음과 같다.

 

 

영(營:御營廳)·개(開:開城管理營)·금(禁:禁衛營)·훈(訓:訓練都監)·호(戶:戶曹)
·상(尙:慶尙監營)·향(向:粮餉廳)·선(宣:宣惠廳)·총(摠:摠戎廳)·통(統:統衛營)
·평(平:平壤監營)·기(圻:京畿監營)·전(全:全羅監營)·경(京:漢城府)·함
(咸:咸鏡監營)·심(沁:江華島沁營)·균(均:均役廳)·무(武:武備司)·혜(惠:宣惠廳)
·창(昌:昌德宮)·해(海:黃海監營)·수(守:守禦廳)·진(賑:賑恤廳)·비(備:備邊司)
·병(兵:兵曹)·강(江:江原監營)·공(工:工曹)·초(抄:精抄廳)·충(忠:忠淸監營)·
경(經:經理廳)·송(松:開城)·이(利:利川)·동(同)·원(原)·수(水) 등 36종이 알려져 있다.

구멍 아래에는 천자(千字) 또는 오행(五行)의 한 글자를 박았으며 또 숫자나 기호가 찍힌 것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주조번호를 표시한 것이다

 

 

 

 

1678(숙종 4)부터 조선시대의 유일한 법화로서 조선 말기까지 사용된 전근대적 화폐이다.

상평통보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관찬(官撰) 기록에서는 동전(銅錢)이라 했고, 또는 엽전(葉錢)으로 속칭되기도 하였다.

 

한국 화폐 발달사에서 볼 때, 국가가 정책적으로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려 한 것은 10세기 말, 즉 996년(성종 15) 철전(鐵錢)을 주조, 유통하고자 했던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 후 고려왕조는 동전·은화(銀貨:銀甁·碎銀 등) 및 저화(楮貨)를 법화로서 유통시키려 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초기부터 종이돈이나 동전을 유통, 보급시키기 위한 노력은 거듭 시도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 각종 화폐를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추진된 국가의 화폐유통정책은 당시 왕조 당로자(當路者: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정책적 의욕의 발로에 그쳤을 뿐 소기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즉,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화폐유통을 위한 정책은 당시의 절실한 사회경제적 요청에 부응해서 시도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폐나 동전 등과 같이 국가가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려던 화폐들 중, 그 어느 것도 계속 화폐기능을 발휘하면서 화폐의 역사적 기능을 담당,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상공업에 대한 조선왕조의 통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관영 상공업체제가 무너지는 한편, 사영수공업과 자유상업은 성장, 발전했다.

 

토지소유제 및 지배체제의 문란으로 토지의 상품화가 촉진되어 특수 계층의 토지광점(土地廣占) 대토지 경영의 가능성이 커지고, 영리 위주의 상업적 농경이 확대, 보급되는 등, 농업생산 분야에서 이윤추구를 합리화하는 흐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대동법(大同法)이 확대 실시됨으로써 조세체계가 단순, 합리화되는 동시에, 상품생산 내지 교환경제가 더욱 발달했다.

 

왜란과 호란 후부터 조선의 대청·대일 관계는 대체로 안정기에 들어서고, 이에 따라 양국과의 무역거래가 그 전보다 활발해져 국내 생산력이 증진하고 상품·교환 경제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양란 후에 인구는 급격히 증가되고, 이로써 사회생산력이 증진되는 동시에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사회의 경제구조 및 제반 생산양식이 변화,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란을 전후해서 봉건 사회신분제도가 빠르게 해체되어 사회 신분질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전통적 생업관이 변질되었으며, 또한 농업에 의존하는 국가 경제기반의 취약점을 보완할 필요성 등의 한계가 있기는 했으나, 수공업과 함께 상업을 진흥해야 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전란 뒤 사회·사상적 혼란에 대한 반성과 청나라 고증학 및 서양 과학문명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흐름으로서 합리성과 실용·실제성을 강조하는 실학이 발생하여 학문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봉건 조선사회의 생산양식과 가치체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1600년대 후반에 조선왕조가 동전, 즉 상평통보를 법화로 채택, 유통 보급시키게 된 배경은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왜란을 전후해서 사회경제가 급격히 발전함에 따라서 빈약한 농업에 의존해온 조선사회에서 일찍부터 통화기능을 발휘해 온 쌀·포 등 물품화폐와 칭량은화(稱量銀貨)의 화폐기능이 점차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 상품·교환 경제 내지 사회생산력을 증진하기 위해 전근대적 명목화폐인 동전 통용의 필요성이 커졌다.

 

둘째, 전통적으로 빈약한 농업에 경제의 기초를 둔 조선왕조는 양란을 겪으면서 파탄에 직면한 국가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경제정책으로, 또는 급박한 국가재정 조달을 위한 재원확보책으로서 동전 통용, 즉 명목화폐제도 수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셋째, 개성은 일찍이 동전 등 전근대적 명목화폐의 유통을 시도한 고려왕조의 수도였고, 또한 국내외의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화폐수용을 위한 잠재적 가능성이 비교적 컸다.

따라서 1640년대는 국내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앞서서 동전이 통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왕조 당로자나 지식계층으로 하여금 국내의 다른 지방에서도 동전의 통용이 가능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였고, 그와 같은 확신은 화폐유통을 위한 그들의 정책 의욕을 높였다.

 

넷째, 쌀·포 등 물품화폐의 유통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조선사회에는 일찍부터 화폐경제가 발달한 중국의 명목화폐, 즉 동전의 유통에 대한 직접·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이와 같은 중국측의 영향은 동전 유통 의욕을 증진시키게 했던 것이다.

 

다섯째,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사실들, 즉 명목화폐의 유통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배경하에 1678년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제의에 따라 상평통보를 주조, 유통하게 되었고, 이것은 조선 말기까지 법화로서 계속 통용되었다.

 

조선왕조가 상평통보를 법화로 주조, 유통하기로 결정한 뒤, 호조·상평청(常平廳)·진휼청(賑恤廳)·정초청(精抄廳)·사복시(司僕寺)·어영청(御營廳) 및 훈련도감(訓鍊都監) 등 7개 관청 및 군영에서 그것을 주조하도록 하였다.

이후 상평통보는 중앙의 각 관청이나 군영에서 주조, 유통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 지방관청에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주조, 유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평통보가 법화로서 계속 통용될 수 있다고 확신됨에 따라, 조선왕조는 화폐주조 관리체계의 일원화를 시도하였다.

즉, 조선왕조는 ‘화권재상(貨權在上)’ 내지 ‘이권재상(利權在上)’의 전통적 정치이념에 충실하고 화폐 원료 수급을 적절히 조정하며, 상평통보의 주조 및 발행 과정을 합리적이고 철저하게 관리 통제하기 위해 화폐주조 관리체계의 일원화를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숙종·영조대를 거쳐 그와 같은 시도가 거듭되다가 1785년(정조 9), 마침내 호조에서 상평통보의 주조발행 업무를 전관(專管)하게 되었다.

그러나 순조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화폐주조 관리체계의 일원화 원칙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여, 중앙의 각 관청·지방관청 및 군영에서 상평통보를 주조, 발행했다.

뿐만 아니라 국고 전담하에 관청에서 전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화폐주조업이, 민간인 도급제로 전환하는 경향, 즉 화폐주조사업의 민영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상평통보의 무게는 2전(錢)5푼(分)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그 원료의 주종인 동의 공급이 어려워져 2전·1전7푼·1전2푼으로 줄어들었고, 19세기 후반에는 당백전(當百錢)·당오전(當五錢) 등과 같은 고액전이 주조,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상평통보는 1670년대 말부터 조선시대의 법화로서 계속 유통, 보급되면서, 조선사회의 해체 내지 근대 지향을 촉진하는 역사적 기능을 하게 되었다.

 

 

조선왕조가 1860년대에 악화 당백전을 남발함으로써 상평통보 유통체제에 혼란이 일었고, 뒤이어 역시 악화인 중국 동전과 당오전을 유통하게 되어 당백전의 남발로 빚어진 화폐유통 질서의 혼란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상평통보는 조선 말기에 걸쳐 거의 만성이 된 화폐제도의 혼란 속에서 각종 근대 화폐와 겸용되다가 1894년(고종 31) 주조발행이 중단되어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화폐정리사업 추진과정에서 회수, 폐기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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