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典 香氣/入門

조선시대의 사당패

초암 정만순 2021. 8. 14. 13:34

조선시대의 사당패

 

 

 

정의

 

조선 후기에 남성인 거사(居士)와 여성인 사당(社堂)의 남녀혼성으로 구성되어 춤과 노래 등을 연행하며 각지로 돌아다니던 대표적인 유랑예인집단.

 

 

 

역사

 

사당패社堂牌는 거사라 불리는 남사당과 사당社堂, 寺黨, 社黨, 捨堂, 舍當이라 불린 여사당으로 구성된 집단이다.

사당社堂이라는 용어는 원래 국사당國社堂같이 고려 때부터 무당이 나라의 안녕을 위해 굿을 하는 곳인데, 조선 성종 대에 오면 사장社長들이 불사佛事를 행하는 불우佛宇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사당패는 본래 불사를 위해 사당에 모인 일단의 집단이라 할 수 있으며, 갈 곳이 없는 여자들이 많이 모여 사당捨堂이라 칭하며 한자로 다양하게 표기하였지만, 그 어원은 사당社堂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통해 사당패 집단의 성격을 사적史的으로 유추해 보면, 가장 초기인 14∼17세기 초에는 거사 또는 사장이 중심이 되어 염불을 하고 수륙재를 지내는 등 승려와 유사한 행위를 하는 소위 불교의식 집단의 모습이 보인다.

즉, 반승반속伴僧伴俗의 생활을 하지만 사찰의 불경 간행이나 법당 중수, 범종 주조, 사적비 건립, 후불 조성을 위한 시주에 참여하였던 불교의식 집단의 하나였다.

이는 상대적으로 당시 불교에 대한 탄압이 크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반 불자들의 활동 양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에 이르면, 민가를 돌며 염불로 시주를 걷어 사찰의 제반 경비를 충원하는 예능 집단으로 그 성격 및 역할이 서서히 변화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사당의 연희자적 역할이 커지며, 사당패는 사찰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절을 위한 시주자, 즉 화주化主 구실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19세기부터 해체되기 전까지는 사찰에서 거의 독립하여 전국을 유랑하며 춤과 노래를 공연하는 유랑예인집단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는 “여사당들이 매창매기賣娼賣技를 하며 미풍양속을 흐린다.”라는 사회적 지탄 속에 점차 소멸해 갔고, 남자 중심의 단체인 남사당패가 형성되어 20세기 초까지 그 집단 성격을 이어 갔다.

 

걸립패나 사당패를 따라 다니며 춤추거나 노래하는 아이를 무동이라 불렀다.

남사당패는 남자들로만 구성되었는데 35~50명의 구성원이 풍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꼭두각시) 등 주로 6종류의 놀이를 연출하였다.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우두머리로 상명하달식의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구성원의 선발은 자진해서 오는 경우도 있으나 유혹 또는 납치하기도 하였다.

흉년으로 부모를 여의거나 버려진 아이들은 거지가 되어 동냥을 하거나 사당패에 들어가 광대가 되었다.

이들은 철저한 남색조직으로 타인에게 몸을 팔기도 했는데, 연행만으로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사당의 유명한 무동춤은 여장을 한 남자아이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예인집단과 달리 마을 대표의 허가가 없으면 마을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겨우 허가를 얻으면 길놀이를 하며 마을을 몇 바퀴 돌고는 밤에 횃불을 밝히고 남사당 놀이를 진행하였다.


광대와 같은 유랑 집단은 사회적, 자연적 환경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1년의 대부분을 유랑하였으므로 의식주의 해결이 매우 불안정하였다. 특히 떠돌아 다녀야 하는 불안정한 생활은 가정생활을 영위하는데 가장 큰 장애였다. 다만 겨울은 광대의 휴식 시간으로 기술연마을 할 수 있는 정주기간이었다. 그러나 연행을 할 수 없으므로 한 해 동안 벌어 놓은 것이 없으면 각자 생계를 위하여 집단이 흩어지는 때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까지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사람을 광대라고 말하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점차 탈놀이, 인형극, 줄타기, 땅재주, 판소리하는 사람들도 광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공연하는 내용과 구성원에 따라 정주하거나 유랑하는 두 집단을 이루었는데 유랑집단이 더 많았다.

각 지방 관청에는 재인청(才人廳)을 두어 광대를 국가 행사에 동원시켰다.

중국의 사신을 위한 영접행사나 고을 수령의 행차에서 노래와 재주를 부렸다.

또한 관아와 양반층의 행사가 있을 때도 불려 갔다.

따라서 조선초기까지는 관에 소속된 광대의 수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광대들이 직업적으로 쉽게 형성되었는데 주로 상업이 발달된 곳을 다니며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리고 궁중의 행사, 마을의 행사, 환갑과 혼인 등에도 불려 다니며 전문적인 예인 집단으로 발전하였다.

한말 흥행의 총봉산이라고 할 수 있는 사당패는 우두머리인 모갑을 중심으로 일단을 조직하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절이나 광장 근처에서 춤과 노래, 그리고 매춘으로 생활의 방편을 삼았다.

사당이라고 하면 원래는 여사당을 의미하였으나 남자들만의 사당패가 출현, 이를 남사당이라 불렀다.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계급으로 대부분 가난한 농가 출신과 고아들로 이루어진 조직이었으나 규율이 엄격했으며 흥행을 통해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사당패들은 한일합방 이후 흥행 회재를 노린 일본인들이 들여온 서커스와 활동사진에 밀려 하나 둘 사라졌다

 

 

 

내용

 

사당패의 주요 공연 종목은 춤과 노래였다.

풍속화첩 또는 탱화들에는 사당이 주로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하고 거사들은 손북이나 소고를 두드리며 흥을 돋우는 장면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사당패는 소고 및 손북의 반주에 맞춰 춤과 노래를 많이 연행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현행 경기 입창•서도 입창과 그 공연 형태가 흡사하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이르면, 남성 중심의 단체인 남사당패가 형성되어 사당패의 성격 및 공연 내용을 계승하면서, 풍물•버나•살판•탈놀이 등 다양한 기예를 도입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최근 향토민요에 수용된 사당패 소리를 통해 과거 사당패의 노래 장르로 염불 계통(판염불)과 함께 산타령과 민요 계통 소리가 존재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염불 계통 소리는 현재 음악이 제대로 발견되지 않아, 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민중 음악에 해당하는 후자의 두 계통 소리는 확인되는바, 모두 서서 흥겹게 부르는 선소리 특유의 특징이 나타나지만 세부적인 음악 특징이나 전승양상에 다소 차이가 있다.

 

산타령 계통 소리(<산타령>•<산천초목>•<녹양방초> 등)는 사당패 계승 집단인 산타령패山打令牌의 주요 레퍼토리 <산타령>계 음악(<놀량>•<앞산타령>•<뒷산타령>•<자진산타령>)으로 조선 말 이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민요 계통 소리(<방아타령>•<오독도기>•<양산도>•<도화타령>•<매화타령>•<개구리타령>•<길군악>•<배꽃타령>•<동풍가> 등)는 각 지역의 민요 가락 및 해당 지역의 음악 어법(토리)을 토대로 형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각 지역에서 활동했던 사당패의 활동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즉, 경기 음악 어법(경토리)을 중심으로, 남도(육자배기토리)와 서도 음악 어법(수심가토리)으로 된 민요들도 다수 발견되어, 경기•서도•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당패의 활동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조선 말기 사당패의 본거지가 경기도 안성安城의 청룡사靑龍寺를 비롯하여 전라남도 강진康津 대구면의 사당리沙堂里,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의 패엽사, 경상남도 남해南海의 화방사花芳寺 등으로 전국 각지에 퍼져 있었던 기록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민요 계통의 사당패 소리는 20세기 벽두 이후 현재 상당수가 경기와 서도의 통속민요로 계승되고 있으며, 최근 이에 대한 일련의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다.

 

 

특징 및 의의

 

사당패는 본래 조선 전기 무렵 불사를 위한 일종의 불교의식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사찰의 승려들을 대신하여 민간에서 재•의식을 통해 시주 및 불사를 많이 담당하였고, 이러한 활동은 불교의식 및 음악을 민중에게 폭넓게 전파하고 대중화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7∼18세기에 사당패는 사찰과 더욱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화주로서의 역할을 해 나간다.

조선시대 감로탱에 사당패의 공연 모습을 그린 자료들이 많이 발견되는 사실도 그 긴밀한 관계를 잘 반증한다.

이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 이 시기에 더욱 강화되어 사찰의 재정 기반이 약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불교에서 사당패의 소임이 더욱 대두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 불교의 탄압이 더욱 거세지며 사찰로부터 점차 분리되고, 최하급 계층의 유랑예인집단으로 전락하여 모진 사회적 멸시를 받게 된다.

급기야 사당들이 매창매기를 통해 풍습을 문란하게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며 이들 집단은 조선 말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향토민요 및 여러 민속악 장르(탈춤, 산타령, 통속민요잡가 등)에 유입•전승된 그들의 소리를 통해, 과거 대중음악의 선봉자로서 민중에게 막대한 음악적 영향을 끼친 사실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감로탱(강우방 외, 예경, 1995),

사당(심우성,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40,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8),

사당고(송석하, 한국민속고, 일신사, 1960),

사당패의 집단성격과 공연내용에 대한 사적 고찰(장휘주, 한국음악연구35, 한국국악학회, 2004),

 향토민요에 수용된 사당패소리(손인애, 민속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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