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典 香氣/入門

조선의 제염

초암 정만순 2021. 8. 14. 09:14

조선의 제염

 

 

 

예부터 전라도는 소금의 생산지였다. 

그중에서도 ‘나주염(羅州鹽)’을 가장 으뜸으로 평가했다.

 ‘나주염’이라고 불렸던 이유는 지금의 신안군에 해당하는 여러 섬들이 당시 나주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전남의 섬은 오래전부터 소금생산지였다. 

전통적인 소금생산법은 바닷물을 갯벌 위 염전에 올려서 짠물을 더 진하게 한 후 가마에 넣고 끓여서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을 ‘화염(火鹽)’ 혹은 ‘자염(煮鹽)’이라 불렀다. 

전남 지역은 염전 조성에 필요한 갯벌과 해안 습지가 발달했으며, 기후가 더 따뜻하여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제염의 시기가 길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어업이 성행하여 소금의 수요가 많다는 점도 염전 발달의 배경이다. 

자연스럽게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은 섬사람들의 중요한 생활 기반이 되었다.

조선 시대 섬 지역 소금생산의 내력은 다양한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조선 초기인 ‘태종실록’ 1408년 2월 3일 기사에 “암태도 염간(鹽干) 김나진과 갈금이 침입해 온 왜적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 ‘염간’은 염전에서 소금 만드는 일은 전담하는 사람을 칭한다. 

조선 초기는 섬에 주민들이 살지 못하게 했던 공도(空島) 정책의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에도 일부 섬 지역에서는 소금을 생산하고 있었고, 그들이 우리 국토인 섬을 지키고 있었다. 

소금을 만드는 사람들이 섬사람들의 중요한 뿌리였음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1637년 국란을 피해 지도(智島)에서 피난 생활을 했던 나주 출신 김선(金璇)의 기록인 ‘타래염촌(他來鹽村)’·‘논풍속(論風俗)’ 등에 소금생산과 밀접한 섬사람들의 생활상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1901년부터 1907년까지 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 김윤식의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에는 “섬사람들이 소금을 구운 후 돈으로 바꿔 세금을 낸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마을 인근에 소금가마가 많다는 등의 내용이 남아 있다.

 

부안군과 고창군 사이에 있는 곰소만 (옛 줄포만)은 조선시대의 부안현, 무장현, 흥덕현 지역으로, 소금생산을 위한 지리적 입지조건이 좋아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의 주요한 소금 생산지였다. 

이곳에서 전오염이 많이 생산 된 것은 첫째로 염전조성을 위해서 넓은 갯벌이 필요한데, 이곳은 해안을 따라 갯벌이 넓게 발달되어 있고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염전조성에 유리하였다. 

둘째로 주변에 쌍선봉, 경수산, 옥녀봉등 300~400미터 정도의 산지가 발달해 있어 연료조달이 비교적 쉬웠다…..

현재 이 지역은 대부분 삼양사 염전으로 개발되었으며, 일부는 논으로 개답되었으나 옛 섯등자리는 가뭄때 염분이 올라와 벼가 고사하는 경우가 많다.

 

간수를 24시간 이상 가열하면 한솥에서 15가마 정도의 소금을 생산하였다….

토염을 생산하지 않고 바닷물을 직접 염부에 넣고 끓이는 해수직자법이 간혹 행해졌으나 소금의 질이 염전식 전오염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고 연료소비량이 많아 함경도 일부지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행하여 지지 않았다.

 

바닷물은 염분함량이 높아야 하므로 육수의 유입이 많은 곳은 바닷물의 염도가 낮아 염전지역으로 부적당하다. 

따라서 서해안에서는 바닷물의 염도가 높고 넓은 갯벌이 발달 된 메판지역이 최적의 염전지역이나 시장, 지본조달, 연료등 사회적인 요인에 의해 염업발달 지역이 제한되어 있었다.

 

 

1907년 인천 주안에 태양열과 바람을 이용해 수분을 증발 시킨 뒤 소금결정을 얻어내는 천일제염법이 처음으로 소개 되었다. 

일제에 의해 도입 된 천일제염은 불을 지펴 소금을 구워내던 전통적인 자염법(煮鹽法)과 한동안 공존했으나 연료를 별도로 준비할 필요가 없고 생산량도 상대적으로 많아 후자를 뒤엎고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산업발달의 자연스런 흐름으로 기록 될 수 있는 사건이지만 한편으로는 근 천년넘게 유지되어 온 전통적 생활양식의 하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순간이기도 하였다.

 

줄포만은 지금의 부안군 산내면 궁항 서남쪽 해상에 위치한 견도와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를 잇는 선을 저변으로하여 동쪽으로 좁아드는 삼각형의 만입이다.

 

먼저 자염업의 성립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형이라고 하겠다. 

제염작업장은 간석지의 일부를 염전으로 조성해 활용하는데, 익히 알고 있는대로 간석지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황해에 넓게 발달한다. 

국지적으로 보면 파랑의 영향이 미치지 않고 해저경사가 완만하며, 조용한 주머니모양의 내만에 모식적으로 발달한다. 

줄포만은 조차가 클 뿐더러 이상의 제 여건을 만족시키고 있어 해성 및 하성 물질이 퇴적되기 쉬운 유리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서해상의 위도는 북서쪽에서 접근하는 동계의 거파를 막아주어 간석지의 발달을 돕는다.

 

염전법을 거쳐 생산된 재래염은 형태상 가는 소금에 비견되며, 맛에 있어서도 천일염과 비교되지 않을정도로 우수했다 한다. 

현지주민들은 구워서 만든 재래염을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중국에서 천일제염법으로 생산, 수입 된 청염(淸鹽)에 대비하여 火鹽, 혹은 陸鹽으로 명명하였다. 

줄포만 화염의 생산기간은 3월말부터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10월까지로서 중간의 장마기를 제외하면 전업생산자의 경우 근 6개월간 염업에 종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소금 생산량은 일차적으로 가마의 크기와 간수의 농도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일례로 염도가 26도라 했을 때 생산량은 염수의 26%정도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염도가 높으면 그만큼 소금도 많이 얻을 수 있지만 결정이 커져 질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반면 염도가 낮으면 연료의 투입량이 많아져 비용이 늘게 되나 입자가 가는 소금을 얻을 수 있었다. 

두가지 대안을 적절한 선에서 조화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던 것이다.

 

간수는 단백질을 고화시키는 성질이 있어 민간에서 두부를 만들 때 활용하였다. 

소금을 건조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간수는 일종의 염즙으로서 인근 주민에게 무료로 배급되는 한편으로 염수와 섞어 재차 자염하는데도 간혹 사용 되었다. 

그렇지만 반복해서 만든 소금은 맛이 쓰고 색도 짙어 소비자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는 없었다. 

구워낸 고운 소금은 맛이 뛰어나 참기름만 있으면 밥 한공기 정도는 순식간에 비울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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