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典 香氣/入門

조선시대의 도박

초암 정만순 2021. 8. 9. 17:08

조선시대의 도박

 

 

 

● 노름을 좋아하는 한국인

 

우리 민족은 참으로 노름을 좋아했던 민족이다.

 

 

도박과 동의어인 '노름'이 놀이의 '놀음'에서 파생된 것만 봐도 우리 민족에게 놀이는 곧 도박과도 같았던 것이다.

 

1902년 주한 이탈리아 대사 까를로 로제티는 한국인의 내기 풍습을 이렇게 말했다. 

(까를로 로제티, 꼬레아 꼬레아니 p.330)

 

"한국인은 선천적인 도박사이기 때문에 누구를 응원해야 하는지 잘 안다."

"한국인의 도박에 대한 열정은 아마도 천부적으로 간직한 특징인 듯 싶다."

"심지어 생필품조차도 직접 구입하기보다도 내기로 구하려 들 정도이니 말이다."

 

1894년 오스트리아 여행가 헤세 바르텍는 이렇게 말했다. (헤세 바르텍, 조선 1894년 여름 p.169~174)

"조선인들은 이웃해 있는 만주인이나 중국인에 비해 훨씬 더 도박을 즐기는 민족이라고 부르고 싶다."

"조선인들은 열정적인 노름꾼이며, 많은 사람들이 노름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궁궐의 경비실에서 관청의 사무실, 사택이나 사원, 거칠 것 없는 시골길에서 조차 가는 곳마다, 조선인들은 담배를 피우며 노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주로 투전, 장기, 골패를 가지고 도박을 하지만 연날리기, 석전을 가지고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에서 도박이 발달한 이유를 이렇게 진단했다.

"조선에서 도박이 발달한 가장 큰 이유는..중국과 일본처럼 극장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노름이 크게 확산된 이유 중 하나는, 이앙법 등으로 생산이 증대되고 화폐경제가 도래했던 배경과 맞물려 있었다. (유승훈,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p.149)

 

그러니 조선시대의 노름 열풍은 경제가 성장했지만,  아직 마땅한 여가 거리가 없었던 조선 후기의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노름 문화

 

● 삼국시대의 저포놀이와 주사위놀이

 

삼국시대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서 놀았을까?

문헌에 보면 삼국은 모두 놀이문화가 비슷했다.

바둑을 두고 투호를 던지고 저포(윷놀이)를 하고 축국(제기차기)을 즐겼다.

그런데 전통시대의 윷놀이는 도박의 성격이 강했던 모양이다.

"저포는 윷놀이의 한자 표기임."

16세기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 ,저포를 도박이라 명시하고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에서도 저포놀이가 내기 놀이로 소개되고 있다. (유승훈,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p.69)

 

'윷 진 아비 같다'는 속담도 윷놀이에서 지고 계속 달려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윷놀이의 도박성을 의미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저포는 도박으로 간주되었고 일본에서도 저포는 도박이라고 금지하던 놀이였다. (최상수, 한국민족놀이의 연구 p.18)

 

그런데 이러한 저포는 원래 인도에서 시작되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와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유승훈,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p.73)

 

처음 전래되었을 때에 저포는  귀족층에서 행해졌지만, 놀이 방식이 간단했기 때문에빠르게 서민층에게도 확산되었고 토착화를 거쳐 독특한 '윷놀이'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유승훈,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p.79~81)

 

"그렇지! 윷이야! 하하하"

 

한편 실크로드를 통해 한반도로 전래되어진 것으로 '주사위 놀이'도 있었는데, 경주 안압지의 유물을 보면 1천 년이 넘은 신라의 주사위가 발굴되고 있다.

 

당시의 주사위 놀이는 과연 어떠했을까?

 

여기서 잠깐 타임머신을 타고 서기 880년 경으로 돌아가 보자.

 

경주의 안압지 포석정을 건장한 사내가 술에 취해 나서고 있다. 

코가 크고 눈이 움푹 들어간 그는 서역인 무하마드로 불리던 '처용'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끝난 주사위 놀이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고 있다.

취흥이 오르면 매번 헌강왕은 주사위 놀이를 하자고 졸라댔다.

 

헌강왕-"자, 처용군도 어서 주사위를 굴려보게."

하지만 처용의 주사위는 굴릴 때마다 항상 낭패를 보기 일쑤였다.

"헐! 술 세 잔 한 번에 마시기!"

헌강왕-"하하하"

 

그래도 처용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슬람 상인 압둘라에게 받은 로마의 보검과 유리제품을 내밀었을 때 헌강왕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헌강왕-"오! 참으로 고맙네."

"처용군, 급간(19관등 중 9관등)직을 한 번 맡아보겠나?"

처용-"어이쿠, 캄사합니다."

 

벼슬을 받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두근거린다. 

이 생각 저 생각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처용은 자신의 문 앞에 도착했다.

아, 아름다운 아내 선화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불끈거리는 마음에 자신도 모르고 문고리를 힘껏 당겼다.(유승훈,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p.46) 

 

위의 글은 신라의 유물과 문헌을 토대로 짜본 가상의 얘기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14면체 주사위에는 술 세 잔 한 번에 마시기, 혼자 부르고 혼자 마시기, 노래 없이 춤추기, 여러 사람이 코 때리기,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 팔뚝 구부린 채 다 마시기, 시 한 수 읊기 등등, 여러 벌칙들이 쓰여있다.

 

발굴된 주사위만 보자면, 도박용으로 사용됐다기보다는 연회를 위한 놀이용,  내기용으로 사용된 듯하다.

하지만 '내기'는 도박의 성격을 강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니, 아마도 주사위를 통한 도박놀이가 당시에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해봄직하다.

 

 

● 고려 시대의 격구

 

경마, 경륜은 흔히 스포츠 도박으로 분류된다.

레저와 도박이라는 이중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건전한 관람에서 끝나지 않고 꼭 배팅이 뒤따른다.

 

경마의 맛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대수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작년에 한국마사회의 매출이 무려 7조 6천억 원을 웃돌았다고 한다.

 

"삼성그룹의 분기 영업이익과 맞먹음."

경마의 상품성은 이 정도로 엄청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경마에 열광하는 것일까?

 

"경마는 단순한 도박이 아님."

"경마의 스릴과 박진감은 어떤 도박에서도 느낄 수 없는 짜릿함이 있거든."

"그래서 경마꾼들은 1분의 순간을 위해 23시간 59분을 산다는 이야기를 하지."

그만큼 손에 땀을 쥔다는 이야기다. 

레이스를 돌진하는 속도감,  부단히 채찍질하는 기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경주마들 ,관객들은 마치 자신이  말을 타고 달리는 착각에 빠진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도 이와 비견되는 스포츠가 있었으니,

바로 페르시아에서 '폴로'로 불리던 '격구'가 그것이다.

격구는 임란 이후, 조선 후기로 가면 명맥이 끊기게 되지만 고려 시대만 해도 가장 대표적인 귀족 스포츠였다

 

왕이 직접 격구를 하기도 하고 신하들을 시켜 격구를 관람하기도 했으니, 고려 중기의 문인 이규보는 당시의 격구를 이렇게 실감 나게 적고 있다. (이규보, 동국이상국전집 제24기)

 

"말들이 서로 뛰고 돌고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용(龍)들이 갈기를 휘날리며.."

"큰 바닷 속에서 하나의 진주알을 놓고 사나운 발톱을 뻗치며 다투는 듯 했다."

 

특히 고려 18대왕, 의종(1127~1170)은 '격구왕'이라 부를 만큼 중독자였는데,

어찌나 격구를 좋아했는지 이틀 동안 내내 격구를 구경하더니 대궐에서 국사를 논한 다음 곧바로 격구장으로 달려가는가 하면, 아예 대궐 뒤뜰로 기병들을 불러다가 북을 치고 격구를 하는 일도 있었다.

 

 

 

또 스스로도 격구를 엄청 잘 해서 아무도 의종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고 고려사에서는 적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종은 무신정변 때 끔찍한 참변을 당하는 비운의 왕이기도 했다.

 

"정사에는 관심 없고 너무 방탕한 생활만 했어.." 

 

그러나 1170년 무신정권이 들어선 후, 격구는 더욱 번창의 길을 걸었다.

특히 최 씨 집안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사설 격구장까지 세워졌으니, 당시 권세가들은 연회를 즐기면서 격구를 감상하곤 했던 것이다.

 

 

최충헌은 축구장 크기만한 격구장에 담을 세우는 큰일을 벌이기도 했는데,

(고려사 129권 열전 제 42 반역3 최충헌)

 

"아놔, 자꾸만 도중에 공이 바깥으로 나가니 경기에 집중하기가 힘드네."

"이참에 경기장을 담벼락으로 확 둘러치라능."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격구장은 대부분 강압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져서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경우 마을 100여 곳을 강제로 철거하고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시켜 격구장을 만든 후, 또 매번 격구를 할 때면 인근 주민들을 동원시키며  먼지가 일지 않게 물을 뿌리도록 했었다.

 

"먼지 좀 안나게 해봐!"

하지만 격구는 오직 상류층만이 할 수 있는 스포츠였다.

 

조선초 태종실록에 보면  이런 글이 있다. (태조실록 1권)

격구를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의복 장식을 화려하게 하는데 이때 '말안장' 한 개의 비용만 중인(中人) 열 집의 재산에 해당됐다.

 

게다가 당시 말 한 필이면 노비 2~3명과 거래되었으니, 노비 목숨보다 말 목숨이 소중한 이처럼 비싼 스포츠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말이다.

 

이러한 격구도 도박성이 다분했으니, 귀족들끼리 승리팀을 놓고내기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왕이 직접 은병을 포상하던지 내탕고(왕실의 재물창고)의 물건을 걸기도 했고 태종과 세종 때에도 승리자에게 말을 하사하기도 했다.

 

● 바둑과 장기

 

바둑은 2천 년 전 쯤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

중국의 역사책에서도 '고구려 사람은 바둑을 좋아한다’

 

'백제는 여러 놀이 중 바둑을 가장 좋아한다' 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그리고 바둑을 좋아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바둑으로 빚어진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때는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장수왕은 고구려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둔다는'도림'이라는 승려를 불렀다.

 

장수왕-"듣자 하니, 백제 개로왕이 바둑을 그렇게도 좋아한다고 하던데,"

"스님이 가셔서 ㅡ개로왕 좀 구워 삶아 보라능.“

 

도림-"네, 알겠습니다."

 

그리하여 도림은 거짓으로 백제에 망명한 것처럼 꾸민 뒤 개로왕에게 접근해 자주 바둑을 두었다.

도림-"정말 잘 두십니다."

개로왕-"아니오. 내 스님처럼잘 두시는 분은 또 처음 봤소. 하하하."

 

그렇게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도림은 궁궐을 짓는 따위의  큰 공사를 벌이도록 부추겨 백제의 국고가 텅텅 비게 만들고는 홀연히 다시  고구려로 돌아왔으니, 그리하여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개로왕은 전사하고 만다는  서글픈 얘기가 있다.

 

기록대로라면 개로왕은 바둑에 빠져 나라와 몸을 그르친 인물이다.

 

어쨌든 삼국 시대부터 흥했던 바둑은 고려 시대는 물론 ㅡ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그 인기가 이어지는데, 조선시대의 바둑은 특히 양반과 귀족층에서 인기가 있었다.

 

당시 흰 바둑알은 바닷가에 있는 조개껍데기 검은 바둑알은 바닷가에서 조약돌을 다듬어 만들었는데,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 대군은 옥돌로 바둑알을 만들 정도로, 호사를 즐기기도 했다.

 

안평대군-"내가 워낙 바둑을 좋아해서리."

 

한편 고려 시대에는 송나라를 통해  '장기'가 들어오게 되는데, 원래 장기는  고대 인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것이 서양으로 가서 체스가 됐고 동양으로 가서는 장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장기는 바둑보다 단순했고, 판이 없으면  땅바닥에 그리면 됐고 말이 없으면 대충 종이에 써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민층을 중심으로 바둑보다 훨씬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고 노름의 수단으로도 자주 애용되고 있었으니, 고려가요 '예성강곡'에는 중국인과 내기 장기를 하다가 아내를 잃고 마는 고려 남편의 애처로운 사연도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노름 문화

 

● 쌍륙과 골패

 

쌍륙은 주사위 두 개를 던진 뒤에 나온 수만큼 말을 움직이는 놀이이다.

 

오늘날 보드게임과 상당히 유사하다. 

왜 '쌍륙'이냐하면, 주사위 두 개를 던져서 6과 6, 즉 '쌍육'이 나오면  이긴다는 데서 연유했다.

 

이러한 쌍륙은 페르시아에서 유래되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소개되었으니, 고대 중국에서는 왕이나 귀족계층의 전유물이었다.

 

현종과 양귀비가 쌍륙을 즐겼는가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전기까지 쌍륙은 귀족 전용이었다.

 

 

▲ 쌍륙을 두고 있는 당나라 궁녀들 (8세기)

 

그러나 조선 후기부터 쌍륙놀이는 점차 일상적인 놀이기구가 된다.

조선 후기에 양반들이 첩을 얻는 일이 횡행하고 기생 사업이 발전하면서 기방과 술집이 늘어나는 등 양반들의 풍류생활이 한껏 넓어졌으니, 양반들이 기녀들과 쌍륙을 즐기고자 했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가 1799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다.

"예전에 쌍륙 노름을 하면서 3천 전을 가지고 여러 기생들에게 뿌려주며 즐겁게 놀았던 일을 아

직 기억하십니까?

이제는 벌써 19년이 지났는데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합니다."

 

이런 쌍륙의 대중화에는 여성들의 힘이 컸는데,

16세기 미암 유희춘의 후손 가문에서는 쌍륙을 혼수품으로 지참하기도 했었다.

 

사실 조선의 상류사회 여성들은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놀이가 많지 않았으니, 쌍륙은 여성들이 유희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했고 또 놀이의 장이면서  소통의 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쌍륙은 여성과 남성들이 한자리에 놀았던 도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걸 두고 당시에는 음란하다고 한탄한 사대부들도 있었으니, 심지어 효종이 궁중에서 비빈과 공주들과 쌍륙을 즐겼다는 이유로 송시열은 국왕의 행위를 꼬집는상소문을 올리기도 했었다.

(효종실록 8년 8월 16일)

 

송시열 -"전하, 몸소 폐단의 근원을 하신다면 국운이 기울게 되옵니다."

효종 -"아놔, 송시열.."

 

연암 박지원만해도, 글을 쓰다가 문장이 막히면 쌍륙을 두곤 했다. 

혼자서 왼손, 오른손을 양편으로 삼아 대국을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놀이를 하다가 구상이 떠오르면 다시 붓을 들었다.(박종채, 역주와 정록 p.295)

 

그런데 정작 박지원은 그의 소설 '양반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양반은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국을 훌쩍훌쩍 떠먹지 말고 돈을 가지고 노름을 하지도 말 것이다."

 

기생에게 노름판에서 거액을 뿌렸던 정약용도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령과 아전들은 평소 투전, 골패를 하면서도 태연하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자신들이 그럴지언데, 어찌 백성들에게는 노름을 하지 말라할 수 있는가?"

 

"어? 좀 뭔가 이중적인데? 뭐, 박지원은 혼자서 쌍륙을 즐겼고 정약용은 소싯적에 도박을 했던 거니까.. 그걸 가지고  너무 나무랄 수는 없지."

 

어쨌거나 당시 쌍륙은 지방관뿐만 아니라  승정원과 홍문관의 왕실 관료들조차 흔하게 즐기던 킬링 타임용 놀이였다.

 

하지만 1490년, 성종 21년에는 쌍륙 때문에 터진 희대의 사건도 있었으니, 관료들이 술내기로 쌍륙을 두다가 싸움이 벌어졌는데,  싸우다가 그만 화로를 차버렸고 돗자리에 불이 붙어 태조와 태종, 왕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홀라당 태워버린 것이다.

"뜨아!"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사건에 왕실 종친도 연류되어 있어 관료들은 겨우 목숨만은 건사할 수 있었다. 대신 파직되었다

 

남녀가 즐기던 노름으로 조선 후기에는 '골패'도 있었다.

 

사실 조선 후기로 가면 골패는 투전 다음 으로 인기가 있던 도박이었다.

다만 골패는 주로 양반들이 즐겼다.

 

"험~, 골패는 우리같이 높은 신분이 아니면 하기 힘들다능."

 

골패가 귀족 노름이었던 이유는, 동물 뼈로 만들어져 비싼 놀이기구였기 때문이고, 또 놀이 방식이 다소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는 골패의 모양을 복잡하게 바꾼 놀이로 청나라에서 들여온 '마작'이 유행하게 된다.

 

 

● 투전 : 패가망신되고 도적이 될지언정

 

17세기 후반부터 '투전'이 난데없이 등장하더니 조선의 도박판을 순식간에 천하통일하게 된다.

투전이 한번 세상에 돌자 바둑과 장기는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장기나 바둑 한판 둘까?"

"그보다 투전은 어때?"

 

사람들은 신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투전에 빠져들었으며 투전은 점점 놀이에서  노름으로 변했다.

 

윷놀이는 대부분 농사철에는 삼갔던 반면 투전은 농사철이고 뭐고 없었다

저마다 한몫을 잡아보려는 욕심에 때를 가리지 않았고 며칠 밤을 꼬박 세워 가며 노름을 하는 일도 많았고 관청에서 숙직을 할 때나 군대에서 경계를 설 때에도 투전에 빠져 근무를 게을리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 때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어디서나 투전판을 벌였으니, 호젓한 산 속의 절마저 노름판이 벌어졌는가 하면 언제부터인지 노름꾼이 초상집으로 몰려가는 풍조도 생겨났다.

 

"윗마을에 초상났대!"

"윗마을로 가자~!"

초상집은 밤샘을 하는 풍습이 있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초상집에서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까지 닥쳐 투전판을 벌였지만, 상주가 이를 말리지 않는 것이 관습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투전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정약용, 목민심서 형전 육조 금포)

 

"여러 가지 내기 놀이 중에서심보가 나빠지고 재산을 탕진하여..“

 

"가문과 친족들의 근심이 되게 하는 것은 투전이 첫째가 되고, 쌍륙과 골패가 그 다음이다.“

"아전이 공금을 축내고, 장교가 장물죄를 범하는 것도 대부분 투전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정조 15년(1791년) 9월에는 이런 상소문이 올라온다.

"전하, 노름의 피해는 투전이 특히 심합니다."

"위로는 사대부의 자제들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들까지.." 

"집과 토지를 팔고 재산을 털어 바치며,"

"끝내는 투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적의 무리가 됩니다."

정조-"사대부들까지 모두 투전에 빠져 있다니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도다."

"그들의 집안에 부모와 형제들이 있을 텐데 대체 이를 막지 않고 무엇을 했는고?"

라고 말했지만, 한번 투전에 빠지면 가족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17세기 문신 윤기는 투전의 무서움을 이렇게 설명했다. (유승훈,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p.136)

 

"투전빚을 진 자는 옥에 갇히거나 매를 맞을 지언정 그 버릇을 끊기 힘들고,"

"투전판을 절대 떠날 수 없기에 어떤 방식으로 투전 빚을 갚으려 하기 때문에.."

"끝내는 투전 자금을 위해 남의 집을 터는 범죄를 하게 된다."

 

 

● 투전 열풍의 원인

 

투전은 일반적으로 40장을 한 벌로 하고, 특이하게 투전패에는 '만주문자'가 적혀있다.

원래 중국에서 만들어졌을 때에는 수호지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었지만, 이걸 조선에 소개한 역관이 그림 대신 만주문자를 써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조선 후기에 갑작스레 투전 열풍이 불었던 것일까?

(유승훈,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p.148)

여기에는 노름패의 '간소화'가 주효했다.

 

다른 도박 게임에 비해 간단했기 때문에 초짜라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게 된다. 

또 패를 돌리고 확인하는 시간도 즉각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판의 스피드와 순환성이 높아 지루하지 않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 중국의 마조패

 

"빨리빨리 패 돌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사람들의 즉흥적 도박심리와 맞아 떨어졌다.

게다가 투전은 제작과 구입이 손쉬웠으니, 이러한 장점들로 엄청난 파급력을 낳았던 것이다. 

여기에 17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상평통보'도  투전의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유승훈,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p.149)

 

그전까지 교환은 주로 면포를 사용했는데, 그렇게 되면 노름하기가 상당히 불편해 진다.

 

"이번에 내가 이겼으니, 면포 한자(30cm) 가져와."

"달아둬. 한 필(16.38m) 되면 줄게."

 

하지만 상평통보가 나타나자 도박판에 활력이 분다.

"자 5푼씩 내놔."

즉각 즉각 금전이 오고간다. 때문에 투전판은 스릴이 넘치게 되고 도박꾼에게도 강한 심리적 자극과 흥분을 안겨주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백성들의 기호에 맞게 출현한 투전은 수많은 민중들에게 전파되었으니, 투전으로 인해 도박의 주류세력은 지배계층에서 민중으로 변하게 된다.

 

또 상평통보의 등장으로 '장시'가 발달하게 되자, 전문적인 도박판이 성장할 수 있는 적합한 환경을 만들게 되었으니, '장시'에서의 도박은 마을의 조그만 사랑방에서 벌이는 동네 도박과는 그 성격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즉 저잣거리의 도박판에는, 마을의 인정적·지속적 관계 대신도박으로 결합된 '일시적 관계'만 남아 있었다. 

투전꾼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인정사정이 없었다. 

오로지 금전 추구에 집착하는  냉정한 도박판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면서 전문적인 '타짜'와 '사기 도박단'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니, 어수룩한 초년배들이 먹이로 걸려들면 땅문서, 집문서를 날리는 건 순간이었다.

 

때문에 투전판마다 멱살잡이는 말할 것도 없고 폭력을 휘둘러 살인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감히 날 속여?"

"증거 있어?"

 

 

 

▲ 도박 단속 나온 관아의 아전들

 

때문에 영조는 여러 차례 '투전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앞으로 투전을 하는 자는 도둑질보다 더 엄하게 다스리겠노라!"

 

하지만 아무리 엄하게 단속한들, 한번 중독된 도박을 어찌 쉽게 고치겠는가!

단속은 그때뿐이었다.

 

 

희미한 남폿불에 네 사람이 상투를 마주하고 있다.

돌쇠 "자, 다들 까라고. 난 일곱끗"

응삼이 "일삼사! 난 여덟끗이야.

 

응삼이는 앞에 놓인 돈을 쫙 긁어 들였다. 그러자 완득이가 히죽 웃는다.

완득이 "그 손 놓아. 칠칠오 갑오! 아홉끗."

응삼이는 두 눈이 툭 벌거졌다. 여덟 끗으로도 못 먹는 것이 분했다.

응삼이 "..."

 

허생원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뛰놀았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푼이나 모아본 적도 있었지만.

 

허생원  "에겅.."

 

투전에 빠진 바람에 사흘 동안에 전 재산을 털린 것이다.

나귀까지 팔아버릴 뻔했지만 애끓는 정분에 그것만은 이를 물고 단념하였다.

결국 그놈의 투전 탓에 늙어서도 장돌뱅이 신세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中)

 

 

● 석전, 연날리기, 제기차기

 

고려 시대의 최고 스포츠가 격구였다면 조선시대에는 단연 석전(돌싸움)이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가, 거액의 '귀족 스포츠'에서 무일푼의 '평민 스포츠'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석전'이야말로 삼국시대부터 내려져온 우리 민족의 전통 민속놀이였고, 구한말까지만 해도 석전은  서울 사대문 밖 공터에서 매년 두 차례 걸쳐 열렸다.

 

당시 석전은 주로 마을 대항전으로 치러졌지만, 간혹 '원한관계'가 있는 상대를 때려주기 위해 전투에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석전은 국가에서도 '상무정신을'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생각했으니석전을 통해 부상, 사망 사건이 발생해도 크게 문제 삼거나 하지 않았다.

 

포졸들이 현장에 배치되었지만, 어디까지나 구경꾼들이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구경꾼들이 승리팀을 점치며 '내기'를 걸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싸움 방식은 대략 이러했다. 

먼저, 두 팀은 서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마주한다.

이때 전투원들은 돌과 몽둥이를 지참하고 볏짚으로 만든 갑옷, 나무 방패,  투구로 사용되는 새끼줄 모자로 무장하는데 투석꾼들이 맨 앞줄에 서고 몽둥이를 든 장정들은 둘째 줄에 서서 대오를 구성한다.

 

그리고 나면,  양측의 선수 대표가 나와 각각 상대를 비방하며 욕설을 하고 그러면 관중들도 크게 환호를 한다.

그리고 경기 시작과 동시에 돌들이 하늘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것이다.

전투는 보통 여러 시간 동안 지속되고,  마을 공터 곳곳에서 벌어진다.

               

 

▲ 새끼줄을 똬서 만든 일종의 헬멧 

 

때문에 너무 가까이서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날아오는 돌을 피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도망가야 했고 구경꾼들은 우르르 도망가다가 인파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도 흔했다.

보통 경기는 한 팀이 도망가면 끝이 난다.

 

석전의 승리자들은 아이들에게는 존경하는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패배자들은 울분을 삼키며 6개월 후의 경기에서 복수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경기 결과는 왕실에까지 신속하게 전해졌다.

"전하, 올해 석전은 남산골이 이겼다고 하옵니다."

 

그러나 석전이 끝나면 뼈가 부러지거나 코가 망가지거나 이빨이 조각나고, 온몸이 타박상을 입는 등부상당한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 중에 사망자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들의 죽음으로 인해 처벌받지는 않았다.

경기는 경기일 뿐이다.

 

그런데 어른들만 석전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석전도 따로 있었다.

아이들의 석전은  주로 개천가에서 이뤄졌는데 이때도 구경꾼들은 몰려들어 내기 돈이 걸리는가 하면, 아이들을 격려하기도 하는 등 마치 오늘날 유소년 축구 경기를 방불케 했다. 

어떤 어머니는 8살 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직접 석전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헐! 조기교육인가?"

 

한편 '연날리기'도 빠질 수 없는 내기 수단이었는데, 특이한 건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연날리기를 즐겼다는 것이다.

당시 연줄에는 특별히 '유리 가루'를 아교에 섞어 발랐는데, 그렇게 하면 상대방 연을 쉽게 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1894년 한 서양인의 얘기다.

(헤세 바르텍, 조선 1894년 여름 p.177~178)

 

"공중에서 상대방 연을 끊어버리는 것을 수많은 군중들이 흥분하여 지켜보는데,"

"이때 내기에 따라, 상당한 액수의 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런 내기에 '제기차기'도  빠지지 않았으니, 1905년 스웨덴 기자의 얘기다.

(아손 그렙스트, 100년 전 한국을 걷다 p.287~288)

 

"코레아 사람들 중, 할 일 없는 사람이 둘이 모이면 제기차기를 하곤 했다.“

 

"이때 먼저 제기를 땅에 떨어뜨린 사람이 상대편에게 한 푼을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20 푼을 먼저 딴 사람이 상대편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이 스포츠의 규칙이다."

 

 

● 국민 도박, '화투'의 등장

 

1895년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조정에서는 노름 금지 조치를 내렸다.

"앞으로 투전과 골패와 같은 잡기를 엄금하노라!"

 

하지만 투전과 골패를 하지 말라고 했지 도박 자체를 전면 금지하지는 않았으니,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인 거류지에서는 화투(하나후다)가 들어와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갑오경장의 조치가 떨어지자 투전을 대신하여 화투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화투로도 투전을 할 수 있다니깐."

 

 

오히려 화투패는 알록달록한 그림 때문에 인기가 더 높았으니, 사람들은 예전의 투전보다 화투패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투전은 이제 시시해."

"화투가 훨씬 재미있지."

 

1910년 일본인 이마무라 모토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종래 조선의 도박은 매우 살풍경한 것인데 화투는 다소 미적인 취향도 있어..“

 

"한때 양반 등 상류사회 또는 화류계에서 대단히 유행했다."

 

그렇다고 해도 투전의 놀이 방법만큼은 고스란히 화투에 적용됐다.

"화투의 섯다가 예전 투전놀이의 방법임."

그리고 이런 화투는 10년도 안돼서 다시 전국을 '화투 열풍'에 빠지게 했으니.

 

1904년 12월 대한매일신보의 내용은 이렇다. (대한매일신보, 1904년 12월 13일자)

"최근 고위 관리들에서 어린 아이들까지 화투놀이를 즐기고 있어 큰일이다."

"단속을 하면 화투 노름으로 잡혀가는 자는 가마꾼, 지게꾼, 아이들일 뿐.."

"큰 판을 벌여 노는 대관 집에는 오히려 순검이 파수를 하느라, 감히 들어가지도 못한다."

"음, 유전무죄 무전유죄."

 

그렇다면 일본의 화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1571년 포르투갈 선원이 가지고온  서양의 트럼프에서  유래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다만 일본의 화투는 유곽에서 은밀히 즐기던 놀이로 건달들이나 하는 천한 놀이로 여겨져 왔었다.

 

이러한 일본 화투는 한국 화투와 거의 흡사하나,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는데

"한국 화투는 11월이 '똥', 12월이 '비'지만 일본 화투는 11월이 '비', 12월이 '똥'임."

"또 한국 화투에는 광(光) 자가 있지만 일본 화투에는 없음."

"우산 쓴 영감은 10세기에 유명한 일본의 서예가라고 하고,"

"문짝과도 같은 비피는 원래 귀신을 상징한 것이라고 함."

 

그런데 이러한 화투 놀이를 '을사오적'으로 알려진 친일파들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이완용의 집에서는 틈만 나면 화투판이 벌어지는가 하면 (유승훈,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p.177) 

'화투대왕'이라는 이지용은 화투판에서 1만7천 원을 3,4일 만에 날려먹었다고 한다. (경향신문, 1910년 10월 21일자)

참고로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던 때 조선의 국채 총액이 1300만 원이었다.

 

화투대왕 이지용은 한일합병의 대가로 백작의 작위를 받았으나, 이후에도 상습적 도박병을 고치지 못해 1912년에는 도박사건으로 재판을 받기까지 했다.

어쨌든 단군 이래 최대의 '국민도박'이라는 '화투'에는 이러한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무일푼과 개평

 

상평통보를 흔히 '엽전'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상평통보를 만드는 형틀 모양이  나뭇가지와 잎사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상평통보의 주형틀

 

"엽(잎사귀 엽 葉)전"

이러한 상평통보의 낱개를  보통 '푼'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무일푼'이란 상평통보 1개도 가지지 못한 상태를 말했다.

 

도박을 하다보면 무일푼 신세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럴 때 사정이 딱하다고 '개평'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개평(個平)이란 말에서, 평은 상평전을 의미하고 개는 낱개를 뜻했다.

즉 개평은 '상평전 몇 개'를 쥐여 주는 경우를 말했다. 

 

 

투전 [斗钱] 

 

 

 

정의

 

여러 가지 그림이나 문자 따위를 넣어 끗수를 표시한 종잇조각을 가지고 노는 놀이.

 

내용

 

남자들의 전통적인 실내놀이의 하나로, 각종 문양·문자가 표시된 패를 뽑아 패의 끗수로 승부를 겨루는 노름놀이이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투전을 ‘鬪錢’, ‘鬪牋’, ‘投牋’ 등으로 기록하였다.

투전패 재질이 종이였으므로 지패紙牌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투패鬪牌, 투엽鬪葉이라 하였다.

 

투전은 두꺼운 종이에 기름을 먹여 만든다.

길이는 10∼20㎝ 사이이며 너비는 손가락만 하다.

한 면에 동물 문양 및 문자를 적어서 끗수를 표시하였다.

25·40·50·60·80장이 한 벌이 되며, 일반적으로 40장 한 벌을 많이 사용한다.

 

투전을 ‘投箋’이라고도 쓰는데,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조선 정조 때 학자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 도희조賭戲條에 간단한 설명이 있고,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희구戲具 변증설에는 17세기 조선 숙종 때 역관인 장현張炫이 중국의 노는 법을 고쳐 만든 것이라 하였다.

장현은 희빈嬉嬪 장 씨의 부父인 장형張炯의 종제從弟 되는 사람이다.

장씨 집안이 역모에 연루되었을 때 장현도 옥살이를 하였는데, 옥중에서 투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장현은 당시 당상통역관堂上通譯官으로서 중국어뿐만 아니라 여진어女眞語까지 할 수 있었는데, 투전에 적힌 문자는 여진어라고 추측한다.

팔목八目 80장을 ‘수투전數鬪牋’, 육목六目 60장을 ‘두타頭打’라 한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의 수투전은 장현이 중국 명나라의 마조패馬弔牌를 간략화한 것으로서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간단하게 되어 오늘날의 40엽葉 투전이 된 것으로 파악된다.

 

투전은 영조 초기부터 크게 퍼져서 사람들에게 큰 폐해를 입혔으며, 관아에서 아무리 단속 하여도 효과가 없었다. 항간의 서민들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자제들도 투전에 빠져 재산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노름꾼들은 상가에 대한 경계가 소홀한 것을 이용하여 생판 모르는 집의 초상에도 문상객으로 가장하여 들어가 투전판을 벌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최남선催南善은 투전이 대중성을 갖게 된 이유로 규칙의 간소화를 들었다.

 골패는 놀이 방법이 복잡한 데 반하여 투전은 규칙이 간단하여 금방 놀이 방법을 익힐 수 있다.

또한 투전패를 만드는 방법이 매우 간단하므로 한양에서는 물론 지방에서까지 성행할 수 있었다.

이 투전은 남성들이 주로 즐기던 놀이이다.

그래서 투전꾼 하면 흔히 남성 노름꾼을, 투전판 하면 남성 노름꾼이 모인 노름판을 떠올리게 된다.

투전은 이에 쓰는 투전 목의 수나 참가 인원 또는 내용에 따라 ‘돌려대기’, ‘동동이’, ‘가구’, ‘우등뽑기’ 등으로 나뉘며 한 가지 방법에도 몇 가지 세목이 있다.

가령 ‘가구’ 중에도 다섯끗 석장으로 15끗 내는 것을 ‘대방신주’, 1과 4로 되는 것을 ‘여사’, 2와 1로 되는 것을 ‘뺑뺑이’라고 한다.

 

앞의 방법 중에 돌려대기가 가장 널리 놀리며 40장의 투전 목을 쓴다.

선수가 판꾼 다섯 사람에게 한 장씩 떼어 모두 다섯 장씩 나누어 주며, 판꾼들은 각기 세 장을 모아서 10·20·30을 만들어 짓고 나서 나머지 두 장으로 이루어지는 수에 따라 승부를 결정한다.

세 장을 모아도 지을 수 없는 사람은 실격하며, 두 장의 숫자가 같으면 이를 ‘땡’이라 한다.

이 중에는 ‘장땡(10의 숫자가 두 장인 경우)’이 가장 높으며 9땡, 8땡 등의 순서로 낮아진다.

땡이 아닌 경우에는 두 장을 합한 것의 한자리 수가 9가 되면 갑오라 하여 가장 높고, 9·8·7·6 등의 차례로 내려간다.

그리고 갑오가 되는 수 가운데 1과 8은 ‘알팔’, 2와 7은 ‘비칠’이라 하고, 5가 되는 수 중에 1과 4는 ‘비사’라고 부른다.

두 장을 더한 수가 10처럼 한자리 수의 끝이 0이 되는 경우에는 ‘무대’라고 하여 제일 낮은 끗수로 친다.

 

투전의 놀이 방법은 매우 다양하나 공통적으로는 끗수를 맞춰서 그 크기에 따라 승패를 결정한다.

우등뽑기는 네다섯 사람이 한 조로 판을 돌리고 한 장씩 더 뽑아서 우열을 다투는 놀이이다.

투전의 놀이 방식은 화투에도 도입되었다.

예를 들면 짓고땡(‘땅’이라도고 함)은 패 세 장으로 10·20·30을 만들고, 나머지 두 장의 끗수로 승부를 겨루는 투전놀이이다.

투전장은 한 손에 쥐고 한 장씩 서서히 뽑는데 콩기름을 먹인 만큼 서서히 빠져 나온다. 투전장을 한 손으로 쥐고서 마치 엿가락을 뽑듯이 하므로 투전장을 ‘엿방망이’, 투전꾼을 ‘엿방망이꾼’이라고도 한다.

원래 투전은 투기성이 강한 노름이 아니었다.

수투전의 경우는 문아文雅한 양반들이 즐기는 놀이였다고 한다.

또한 금전 추구에 집착하기보다는 우열승부를 결정하는 놀이였다.

즉, 수투전은 각종 동물이 표시된 본패와 그에 해당하는 장수將帥패가 있어서 일정한 규칙대로 우열승부를 가리는 놀이이다.

그런데 점차 수투전의 오락적 기능은 사라지고 투전의 도박성이 커지게 되었다.

투전의 도박성이 확대됨에 따라 조선사회에서는 집, 토지, 재산을 팔아야 하는 큰 폐해가 생겨났다.

또한 투전꾼들이 전문적인 도박단을 형성하여 다니기도 하였다.

 

투전이 이처럼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먼저 화폐의 통용과 활성화를 들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보면 으레 투전판에는 동전 묶음이 놓여 있다.

1678년(숙종 4) 이후에는 각도各道 감영監營에 주전鑄錢을 허가함으로써 많은 양의 주화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화폐 경제의 발달은 투기성을 높일 수 있었다.

물물교환에 비하여 즉자적으로 교환되는 동전은 심리적으로 강한 자극과 흥분을 주었다.

또한 상업이 활성화되고 장시가 발달하는 것도 투전 확산의 배경이 된다.

전문적인 도박판은 인구가 집중된 한성부나 지방에서는 장시, 기방 등 저잣거리에 형성되었다.

이곳에서는 마을의 인정적·지속적 유대 관계가 배제되었다.

도박을 통한 일시적 관계에서는 인정을 배제하고 오직 금전 추구에 집착하게 되었다.

‘같잖은 투전에 돈만 잃었다.’라는 속담의 표현 그대로 재물을 걸고 하는 투전판은 한국인에게 패가망신하는 장소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왔지만, 화투가 대세를 형성하게 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특징 및 의의

 

투전은 다양한 민속문화의 갈래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탈춤에 등장하는 투전판, 농악의 도둑잡이굿, 숫자풀이·사시랭이소리 등에 투전이 등장하거나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투전이 미친 사회적 파장이 매우 컸기 때문으로 보이며, 향후 건전한 민속놀이로의 발전 가능성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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