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 홍유릉
왕기 끊기 위한 교활한 풍수
조선의 마지막 왕릉인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에 있다.
두 능을 합쳐서 홍유릉이다.
능역에 들어서면 기존 왕릉과는 다른 분위기다.
남한에 있는 유일한 황제 능이기 때문이다.
우선 능 아래 제실이 정자각 대신 황제를 뜻하는 일자형 침전으로 바뀌었다.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이어지는 참도도 일반 왕릉과 다르게 양옆으로 석물이 도열되어 있다.
홍살문에 들어서면 말, 낙타, 해태, 사자, 코끼리, 기린, 무인, 문인이 차례로 마주보고 서있다.
이는 중국 남경에 있는 명나라 태조 홍무제(주원장)의 효능을 본떠서 조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묘역 규모는 효릉에 비교하면 매우 작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중국을 사대하였기 때문에 역대 왕들은 황제 또는 천자라는 호칭을 쓰지 못했다.
당시 조선은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 때문에 스스로 중국을 섬기는 제후국이 되기를 자처하였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의 위상은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개화파들이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중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주독립을 추구하였다.
이를 계기로 1894년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였고,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다.
호칭도 전하에서 폐하로 높여 불렀으며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른바 대한제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떠오른 일본은 1904년 고종을 압박하여 한일협약을 체결하고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1906년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 밀사를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고종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황제 자리를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2대 황제에 오른 순종은 재위 3년 1개월만인 1910년 6월 29일 한일합방으로 조선왕조의 종말을 맞게 된다.
고종은 황제에서 물러난 후 태황후라는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지내다가 1919년 1월 22일 숨졌다.
본래 3.1운동은 고종의 인산일(출상일)에 맞추어 계획된 것이다.
순종은 이왕으로 불러졌고 창덕궁에 머물다 1926년 4월 25일 생을 마쳤다.
그해 일어난 6.10 만세운동 역시 순종의 인산일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고종의 무덤인 홍릉과 순종의 무덤인 유릉은 일제에 의해 조성되었다.
3.1운동과 6.10만세운동에 놀란 일제는 조선 백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무덤 조성은 화려하게 했다.
그러나 자리는 풍수적으로 좋지 않은 곳을 골랐다.
조선의 왕기를 완전히 끊어버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곳의 태조산은 천마산(810.2m)이고, 중조산은 백봉(587.2m)이며, 소조산은 수리봉(485.5m)이다.
수리봉에서 고종이 묻힌 홍릉 뒤편까지는 맥이 힘차게 변화하며 내려왔다.
이것만 본다면 황제 능에 걸맞은 용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용맥은 홍릉 자리를 향해 오지 않고 반대로 등을 돌려 유릉방면으로 달아나간다.
그러다보니 홍릉은 용의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위치한다.
비유하자면 팔 뒤꿈치에 해당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풍수에서는 이를 반주(反肘)라고 한다.
반주에 대해 인자수지는 집안이 망하여 가족이 모두 흩어지는 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홍릉에서 보면 좌청룡과 우백호가 잘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앞으로 쭉 빠져나간다.
수구가 열려 있다는 뜻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수구가 좁게 관쇄되지 않고 열려 있으면 다음 대를 잇지 못한다고 하였다.
홍릉은 얼핏 보면 좋아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나쁜 자리다.
그 수법이 매우 교묘하다.
일제가 조선의 왕기를 끊기 위해서 얼마나 교활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에 비해 순종의 유릉 자리는 드러내놓고 나쁜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풍수에서 가장 꺼리는 자리는 과룡처다.
‘과룡지장(過龍之葬)은 삼대내절향화(三代內絶香火)’라고 하였다.
즉 지나가는 능선 위에 묘를 쓰면 삼대를 못가서 망한다는 뜻이다.
바로 그 자리에 유릉이 자리하고 있다.
풍수에 대한 약간의 상식만 있어도 이러한 곳을 피하는 법이다.
그런데 일국의 황제를 과룡처에 묻는다는 것은 일제의 수법이 노골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뜻한다.
풍수를 신봉한 흥선대원군묘도 이곳에서 가까운 화도읍 창현리 산22-1에 있는데 역시 과룡처다.
조선은 결국 풍수로 망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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