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보령 김좌진 묘

초암 정만순 2021. 6. 12. 13:38

보령 김좌진 묘

 

사신이 서로 끌어 안듯 감싸주며 보국형성

 

 

김좌진(1889~1930) 장군의 묘는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1(김좌진로 200)에 있다.

김좌진과 홍범도가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대승을 거두자 참패한 일본군은 대대적인 독립군 소탕작전을 폈다.

특히 독립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간도지역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그러자 김좌진 등 독립군들은 우수리강을 건너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달네레첸스크)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비에트(소련)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를 주도한 레닌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 말을 믿고 독립군 부대들이 속속 모여든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으로 적대관계였던 러시아와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동맹을 맺었다.

레닌은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자신들의 배후를 위협하는 한국독립군의 무장해제가 먼저라며 맞섰다.

레닌은 조선독립군에게 무장해제를 주문했다.

그리고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부대를 아무르주 자유시(스바보느니)로 이동할 것을 권유했다.

자신들이 군복과 식량과 무기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김좌진은 이를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어렵더라도 동포들 속에서 일본과 싸워야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홍범도는 여러 조직으로 분산된 독립군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며 자유시로 갔다.

그런데 소비에트 지원을 받는 고려공산당 세력들이 독립군통수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이에 독립군부대가 반발하자 공격을 감행하여 독립군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 적군에 편입되었다.

홍범도도 적군에 편입되었다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이른바 자유시사변 또는 흑하사변이라 부르는 참변이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의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또한 김구와 김좌진 등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극도의 반공주의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주로 돌아온 김좌진은 옛 발해 땅에 신민부라는 군사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정미소를 운영하며 동포들로부터 성금을 거둬들였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적대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공산주의자들은 김좌진 암살을 도모하였다.

1930년 고려공산당 청년당원 박상실이 쏜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41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장군의 장례식은 한족총연합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중국인들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도하였다.

3년 후 장군의 사망 소식을 들은 부인 오숙근은 일제의 눈을 피해 만주로 갔다.

장군의 묘를 찾아 밤중에 무덤을 파서 유해를 이불보따리 속에 넣어 고국에 돌아왔다.

처음은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하였다가, 1957년 부인이 타계하자 김두한이 현 위치로 이장하여 부인과 합장하였다.

김좌진은 고향에 결혼한 본부인 오숙근 외에도 네 명의 첩이 있었다.

첫 번째 나혜국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로서 아들 김철한과 딸 김석출을 낳았다.

 

 

두 번째 김계월은 김두한을 낳았고, 김두한의 딸이 국회의원이던 김을동이고, 그녀의 아들이 인기배우

송일국이다.

이곳 산세는 오서산(790m)에서 비롯된다.

까마귀들이 많이 서식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북정맥에서 가장 높아 서해를 지나는 배들의 이정표가 되었다고 한다.

오서산에서 아차산(423.8m)으로 이어져 내려온 맥의 끝자락에 묘가 있다.

주변 산세는 뒤의 현무, 앞의 주작, 좌측 청룡, 우측 백호가 서로 끌어안듯 감싸주며 보국을 형성하였다.

묘 앞의 들판을 명당이라고 하는데 평탄하고 원만하다.

명당으로 만조백관이 집결하듯 주변의 물들이 모여든다.

풍수에서는 물을 재물로 보기 때문에 부가 있을 땅으로 해석한다.

산은 인물로 보는데 앞의 안산이 귀인봉으로 이곳을 마주보고 있다.

부와 귀를 같이 할 수 있는 자리다.

다만 용의 변화가 크지 않고 혈장이 넓은 것이 흠이다.

혈장이 넓으면 기가 퍼지므로 세기가 약해진다.

큰 발복은 어렵다는 뜻이다.

산세는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순하다.

장군은 생전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거칠고 험하게 살았다.

백골이라도 고향 땅 편안한 자리에 묻혀 있으니 천만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