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익산 이병기 생가

초암 정만순 2021. 6. 12. 19:16

익산 이병기 생가

 

집터·산세의 기운 깃든 학자의 요람

 

가람 이병기(1891~1968) 선생의 생가는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가람1길 64-8)에 위치한다.

현대시조의 아버지라 불리는 선생은 이집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이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진사동로 불리는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조용하고 편안하다.

특히 생가는 대나무 숲속에 있어서 청렴한 선생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집은 크지 않지만 옹색하지도 않아 꼿꼿한 선비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선생은 연안이씨로 변호사인 아버지 이채와 어머니 파평윤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한학을 배웠고, 20세 때인 1910년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닫고 전주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에 입학한 셈인데, 6개월 만에 마치고 곧바로 교원양성소인 한성사범학교 본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인 1912년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1876~1914)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졸업 후 남양·전주·여산보통학교에서 재직하며 시조를 짓기 시작했다.

1921년 주시경의 제자들을 모아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여 간사를 맡았다.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조선어 교사가 되었으며, 1926년 동아일보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했다.

이후 현대시조의 개척자로 이름을 알렸다.

선생은 한글 보급과 선전을 통해 민족정기 고취에 힘쓰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년 동안 복역하였다.

해방이후는 서울대학교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과 대학장, 중앙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선생은 창(唱)의 시조를 현대시조로 바꾼 최초의 인물이다.

이전까지는 시조가 노래 위조였다.

짧은 형식의 노래라 해서 단가(短歌), 가곡으로 부르는 사설이라 하여 가곡창사(歌曲唱詞), 재담·욕설·애욕 등을 노래 형식으로 풍자했다하여 사설시조(辭說時調)라 불렀다.

선생은 이러한 고시조에서 창곡을 빼는 대신 3장 분장형식(초장·중장·종장)의 전통은 유지하였다.

창곡을 뺐다는 점에서 현대시와 같으나 3장 분장 형식을 유지하고 있어 현대시조로 분류된다.

선생은 스스로를 세 가지 복(술복, 제자복, 난초복)이 있다고 자랑했다.

선생의 대표작 〈난초〉는 국어교과서에 실려 전 국민이 암송하는 시조다.

전체 4편 7수의 연시조인데 마지막 4편의 1수가 지금도 저절로 읊조려진다

.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생가 모정에 걸터앉아 이곳 주변 산세를 살피자니 마치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은둔했던 형주 땅 융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 공부를 하면 왠지 제갈량과 같은 현자가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이곳 산세는 금남정맥 왕사봉(701m)을 태조산으로 한다.

여기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용맥(산맥)이 천호산(501.1m)을 세웠는데 중조산이다.

다시 남쪽 갈매봉으로 내려온 용맥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호남고속도로를 건너 용화산(321.2m)을 세웠다.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용리산(306.8m)을 세웠는데 이곳의 소조산(주산)이다.

용리산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용맥은 변화가 활발하며 기세가 넘친다.

 



용맥은 생가 앞을 흐르는 원수천을 만나 멈추고 기를 모아 혈을 맺었다.

맥이 연결된 곳에 안채가 정확하게 자리하고 있다.

생가 앞으로는 중조산인 천호산이 보인다.

이곳처럼 용맥이 한 바퀴 돌아 자신이 출발한 조종산을 바라보는 것을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라 한다. 기가 넘쳐서 지도자나 학문의 기틀을 세우는 종사(宗師)를 배출한다고 하는 대혈이다.

생가 뒤로는 현무, 좌측으로는 청룡, 우측에는 백호, 앞에는 주작이 겹겹으로 감싸고 있다.

특히 대문에서 밖을 내다보면 붓끝처럼 뾰족한 산이 정면으로 보인다.

이를 문필봉이라 하는데 학자나 문장가를 상징한다.

유명한 문인들의 생가에는 문필봉이 있는 곳이 많다.

가람 이병기 선생이 국어학자로 또 현대시조의 종사로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집터의 역량과 산세의 기운도 상당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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