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밀양 사명대사 생가 풍수

초암 정만순 2021. 6. 5. 07:34

밀양 사명대사 생가 풍수

 

생가 앞까지 감아 도는 '좌청룡 우백호'

 

 

사명대사(1544~1610)의 생가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사명대사생가로 642)에 있다.

대사는 풍천임씨로 속명은 임응규, 자는 이환, 법명은 유정이며, 법호는 사명당·송운·종봉이다.

대사의 조상들은 풍수적으로 명당인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대를 이어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

증조부인 임효곤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구 수령을 역임했고, 조부 임종원 역시 문과 급제하여 강계부사를 지냈다.

아버지 임수성은 진사에 합격했으며, 대사도 불과 18살에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승과에 급제했다.

승과는 고려와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문과·무과·잡과와 함께 실시했었다.

승과에 합격하면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로 승진하였다.

왕의 자문을 맡게 되면 왕사·국사로 추대되었다.

억불숭유가 강화되면서 유신들의 반대로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가 명종 때 문정왕후에 의해서 잠깐 부활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승과를 실시하였다.

이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급제한 것이다.

문정왕후가 죽자 승과는 곧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때 뽑은 승려들이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동했으니 역사적으로는 대박이 난 것이다.

 



사명대사는 승려로는 드물게 종2품인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명석한 두뇌와 담력, 그리고 도력까지 갖추었는데 인걸은 지령이라 했으니 생가 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생가는 복원한 것이다.

사명대사 유적지를 관광단지화 하면서 정확한 터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원한 방법이 풍수지리였다.

본래 생가가 풍수적으로 좋았을 것으로 가정하고 그 조건을 갖춘 땅을 찾았던 것이다.

복원 자료에 의하면 뒷산의 주맥이 399번지로 흘러내려왔다는 점을 첫째 조건으로 꼽았다.

이곳은 대구 비슬산에서 이어진 영취산(738.8m)을 주산으로 한다.

주변 산들은 높지만 위압적이지 않다.

특히 사명대사 생가로 내려오는 맥은 점차 순해진 후 안채 뒤쪽에 야트막한 현무봉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맥이 나와 생가로 이어진다.

현무봉에서 좌측으로 갈라진 것은 청룡이 되고, 우측으로 갈라진 것은 백호로 집 앞까지 감아 돌아 조밀하게 국세를 형성했다.

마을 밖으로는 영취산에서 뻗은 산맥이 종암산과 덕암산을 만들고, 동쪽으로는 황산과 하서산을 만들었다. 이들은 팔을 벌려 안아주듯 큰 보국을 만들었다.

산 모양도 특이한 것이 많다.

뒷산은 금형으로 부를 뜻하는 솥뚜껑 같기도 하고, 장군을 의미하는 투구봉 같기도 하다.

좌측 산은 예술을 뜻하는 거문고이고, 앞에는 문장을 상징하는 일자문성이 있다.

산은 인물을 관장하므로 산세와 같은 인물이 나는 터라고 보면 된다,

생가 앞의 연못은 주맥을 따라 내려온 물은 아니지만,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모여 생긴 것이다.

내수가 아닌 외수가 모여 생긴 연못은 집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좋다.

다행히 사명대사 생가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물은 재물을 뜻하므로 사명대사 집안은 재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는 연못 주변에 사명대사기념관 및 수변광장을 조성하여 관광단지화 하였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협상가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협상은 기 싸움이 중요한데 왜장들을 항상 제압하였다.

울산성에 주둔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협상을 할 때다.

가토가 “조선의 보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명당은 “조선의 보배는 조선 것이 아니라 일본 것”이라고 했다.

가토가 의아해하자 “지금 조선은 당신의 머리에 거액의 포상금과 벼슬을 내걸었으니 보배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가토가 놀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 갔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명당을 조롱하는 시를 읊었다.

“돌 위에 풀이 나기 어렵고, 방안에 구름이 일기 어려운데, 너는 어느 산의 새이기에, 봉황이 노는데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명당은 “나는 본디 청산의 학이어서, 항상 오색구름 위에 놀았는데, 하루아침에 운무가 사라져서, 꿩들이 노는 대로 잘못 떨어졌다”라고 응수하여 도쿠가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