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고구려의 제2수도 국내성 풍수

초암 정만순 2021. 5. 8. 09:59

고구려의 제2수도 국내성 풍수

 

 중국 길림성 집안시… 풍수지리 길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은 현재는 중국 땅인 길림(지린)성 집안(지안)시에 위치한다.

집안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만포시와 마주하고 있는 도시다.

BC 19년 주몽이 나이 40세로 세상을 떠나자 유리가 제2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소서노는 두 아들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유리가 왕권 강화를 이유로 비류와 온조를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련 없이 두 아들과 오간·마리 등의 10여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그러자 졸본의 민심이 술렁이었다.

유리왕은 민심 수습을 위해 다물 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졸본 땅은 본래 소서노의 세력 기반이었다.

백성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부여 왕 대소가 침략해오는 등 위협에 시달려만 했다.

결국 유리왕은 다른 지역으로 도읍을 옮겨 자신만의 새로운 정치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어느 곳이 좋은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재위 21년(서기 2년) 3월 어느 날,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데 쓸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생겼다.

왕이 재물 담당관리로 하여금 뒤쫓게 했는데, 지금의 국내성 환도산성이 있는 위나암에 이르러 이를 잡았다.

100km가 넘는 먼 거리였다.

관리는 돼지를 국내성 민가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는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성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곳 산수가 깊고 험했습니다.

게다가 땅은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고, 산짐승과 물고기 등의 산물이 많았습니다.

만약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면 백성들에게 이로움이 클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말을 들은 유리왕은 직접 국내성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이듬해인 서기 3년 10월 국내성으로 천도를 하였다.

졸본에는 태자 해명을 남겨 지키게 했다.

집안의 땅은 백두산에서부터 내려온 산줄기에서 비롯된다.

동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통구하가 흘러내려와 압록강과 합수한다.

집안은 압록강과 통구하가 만나는 사이에 위치하므로 풍수지리적으로 길지에 해당한다.

풍수 고전인 ‘지리인자수지’는 “양수 가운데는 필히 산이 있고, 양수가 만나면 산이 멈춘다.

대강수와 대하가 만나면 도읍 터로 적당하고, 큰 하천이 만나면 대읍 터, 소하천이 만나는 곳은 소읍 터로 적당하다.”고 하였다.

국내성은 대강수와 대강수가 만나는 곳은 아니지만 압록강 대강수와 통구하 중하천이 만나는 곳이다.

이 정도면 당시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도읍지로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집안은 높은 산봉우리들이 사방으로 둘러싸주며 보국을 잘 갖춘 분지 지형이다.

북쪽은 우산, 동쪽은 압록강 건너 높은 산, 서쪽은 통구하 건너 칠성산이 감싸고 있다.

남쪽은 비교적 낮아 개방감을 준다.

산이 높고 물이 가로막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첩첩산중은 교통이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집안은 60여 개의 소하천들이 통구하나 압록강으로 연결되어 있어 내륙 곳곳으로 이동이 편리하다.

풍수에서는 물을 재물로 본다.

비록 산간이라 할지라도 계곡이 모여들어 물이 풍부하면 부촌을 이룬다고 했는데, 집안이 바로 그런 곳이다.

사람과 물자는 산을 넘어 유통하기 힘들다.

반면에 물길을 따라 이동하면 편리하고 대량운송도 가능하다.

사람과 물자가 모이면 물화가 풍부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수로를 따라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쪽 부여로 갈 때는 통구하와 혼강을 따라 위로 올라갔을 것이고, 서쪽 요동으로 갈 때는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다 단동에서 들판 길을 말 달려갔을 것이다.

연해주로 갈 때는 압록강을 따라 위로 올라가서 백두산에서 발원한 송화강과 두만강을 따라 이동했을 것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으로 집안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우기에 안성맞춤이다.

집안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는 발전을 거듭하여 동북아의 최강자로 발전하였다.

집안은 425년 동안 고구려의 도읍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국을 경영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다.

 

 

토목기술·축성술 장점… 제국으로 성장

 

 

고구려 제2수도인 국내성은 고구려의 독자적인 도읍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중국 도성들은 대개 네모반듯한 방형이다.

남북을 축으로 주작대로를 내고 성 밖에는 해자를 파는 것이 공통점이다.

중국은 평시나 전시나 모두 성안에서 생활한다.

반면에 고구려는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생활하다 전시에는 평지성을 비우고 산성에 들어가 싸운다.

이러한 도성체계는 그대로 전래되어 평지성과 산성이 한 세트가 되었다.

하남위례성과 남한산성, 한성과 북한산성, 부여 사비성과 부소산성 등이 한 세트다.

고구려 성은 중국과 달리 지형을 고려하므로 마름모꼴 또는 곡선형이 많다.

도시 공간 역시 중국처럼 남북축으로만 하지 않는다.

지세에 따라 동서축 등 자유롭다.

해자를 파는 대신 강이나 하천을 이용하여 성을 쌓았는데, 하천가는 습지대로 연약 지반이다.

성을 쌓기가 쉽지 않을 텐데 고구려 사람들은 습지대에 통나무를 박았다.

그리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걸치고 나뭇잎을 깐 다음 흙을 덮어 성을 쌓았다.

위로부터 하중이 가해지더라도 흙속의 물이 지반을 압밀하여 지탱해주는 방식이다.

오늘날로 치면 샌드 드레인(sand drain) 공법인데 고구려의 토목기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가 제국으로 성장했던 것은 단지 군사력만 가지고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샌드 드레인 공법과 같은 토목기술과 축성술로 대표되는 건축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성을 쌓을 때 돌을 쐐기 모양으로 다듬어서 사용하였다.

밖에서는 네모반듯한 직사각형으로 보이지만 안쪽으로 길게 쐐기가 박힌 모양이다.

치아가 잇몸 깊숙하게 박힌 모양과 같다.

특히 하나의 돌이 6개의 돌로 둘러싸인 6합 쌓기를 했다.

설사 돌이 하나 빠지더라도 주변 돌에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성이 무너지지 않는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토목·건축 기술이 세계 최고인 것은 고구려 조상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성곽의 또 다른 특징은 옹성과 치성이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항아리처럼 둥글게 쌓은 방어시설이다.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항아리에 가두어 놓고 공격하는 방식이다.

치성은 성벽에 사각으로 돌출된 부분을 말한다.

치(雉)는 꿩을 말하는데, 꿩이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하기 쉬우며, 간격은 150m 정도인데 화살의 유효사거리를 감안한 것이다.

이러한 축성술로 인해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에 맞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내성의 주산은 우산(禹山)이다.

여기서 맥이 내려와 국내성 가운데서 멈추었다.

옛날에는 궁궐 터였는데 현재는 고구려유적공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육안으로 우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맥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풍수의 ‘고일촌산 저일촌수(高一寸山 低一寸水)’라는 논리를 적용하면 의외로 쉽게 맥을 찾을 수 있다.

산과 물이 없더라도 손가락 하는 굵기만큼만 높아도 산맥으로 보고, 그 보다 낮은 곳은 물로 보면 된다.

이는 분수령(分水嶺)하고도 통한다.

빗물은 땅에 떨어지면 분수령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된다.

지표수의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일촌만 높아도 물을 갈라지게 하는 것이다.

국내성은 크게 통구하와 압록강 사이에 있어 삼면이 물로 감싸여 있다.

그런데 궁궐터도 비록 작지만 삼면이 물길이다.

지금도 고구려유적공원 둘레에 물이 흐르고 있다.

이는 맥을 사이에 두고 위에서는 물이 갈라져 내려오다 궁궐 앞에서는 합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물 사이에는 반드시 맥이 있고, 두 물이 만나는 곳에 산이 멈추어 기를 모은다.

기가 모인 자리가 혈이다.

그곳에 고구려 궁궐이 있었고, 지금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길 때 직접 가서 지세를 살핀 기록이 있다.

정확하게 혈을 정한 것을 보면 풍수지리 전문가를 데리고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풍수는 신라말기 도선국사 때보다 천년 앞선다는 것을 뜻한다.

어쩌면 고구려 풍수가 중국 풍수보다 몇 백 년 빨리 시작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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