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사계 김장생 묘
조선 예학의 거두 사계 김장생의 묘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흔히 광산김씨, 달성서씨, 연안이씨를 조선3대 명문으로 꼽는다.
이들 문중에서도 달성서씨는 약봉 서성, 연안이씨는 월사 이정구, 그리고 광산김씨는 사계 김장생의 가문이 유명하다.
사계 가문은 세도가보다는 대대로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사계와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은 유학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예학을 집대성하여 문묘에 배향되었다.
문묘배향(文廟配享)이란 문성공인 공자의 사당에 위폐를 같이 모시는 사람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나 학문을 이어 받은 사람이다.
4성인 안자, 증자, 자사, 맹자와 송나라 6현인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와 우리나라 인물 18명이다.
우리나라 인물을 가리켜 해동18현 또는 문묘18현이라 부른다.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로 학문과 도덕이 깊은 인물들이다.
문묘배향은 유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최고의 영예다.
그러므로 문묘배향을 낸 집안은 명문가로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문묘배향을 광산김씨는 두 명이나 냈으니 조선 최고의 명문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광산김씨 가문이 이렇게 번창하기까지는 사계의 7대조모인 양천허씨 부인의 역할이 컸다.
부인은 조선 태조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의 딸로 김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김문은 소년 급제하여 한림원에 근무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홀로 된 딸을 가엾게 여긴 친정 부모는 딸의 재가를 서둘렀다.
당시는 남편이 일찍 죽으면 자유롭게 재혼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부인은 이부종사(두 남편을 섬기는 것)를 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부모 몰래 간난아인 아들 김철산(1393~1450)을 안고 시댁이 있는 충남 연산 땅으로 향했다.
한양에서 이곳까지 오백리 길을 걸어오는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설에 의하면 오는 도중 호랑이가 동행하며 부인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부인은 시댁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림과 자식과 손자들의 교육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였다.
아들 김철산은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손자 김국광은 좌의정, 김겸광은 좌참찬과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양천허씨는 14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이 먼저 죽었다.
그러므로 이곳 묘역에 최초로 묻힌 사람은 김철산이다.
그래서인지 가장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 산맥은 백두대간 장수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으로 분맥하고 다시 완주 주화산에서 북으로 갈라져 나온 금남정맥에서 비롯된다.
주화산을 출발한 금남정맥이 대둔산(878.9m)과 깃대봉을 거쳐 계룡산쪽으로 북진할 때 함박봉(404.4m)에서 황산벌로 불리는 서쪽 평야지대로 한 가지를 뻗는다.
구덕재와 매봉(146m)을 거쳐 논산저수지를 앞두고 고정산(145m)를 세웠다.
산맥이 평야지대로 내려오면서 험한 기운이 모두 순한 기운으로 변했다.
순해진 산맥은 다시 U자를 그리며 계백장군 유적지가 있는 충장산 쪽으로 이어나간다.
이곳은 U자형을 그리는 안쪽에 있어 아늑한 땅이다.
묘지 뒤로 이어진 용맥을 보면 변화가 활발하지는 않지만 밝고 순하고 후덕하다.
한마디로 순룡이다.
고정산에서 내려온 산맥이 묘역에 이르러서는 두 갈래로 산맥을 뻗는다.
왼편 능선 아래에는 양천허씨묘가 있다,
그 위에 담장을 두른 묘가 7대 손자인 사계 김장생 묘다.
후손이 조상보다 위에 썼으니 역장이다.
오늘날 같으면 비판이 많았을 텐데 조선시대에는 역장을 문제 삼지 않았다.
명문가일수록 역장한 집안이 많은 것을 보면 풍수 발복과는 무관하다고 본 것이다.
오른편 길게 뻗어 내려온 능선 쪽에 4기의 묘가 있는데 아래에서 두 번째가 김철산 묘다.
그 바로 위는 김철산의 부인 안동김씨 묘다.
두 묘가 혈장의 요건인 입수도두, 선익, 순전을 갖추고 있다.
청룡과 백호는 이 묘역을 중심으로 겹겹으로 감싸주고 있다,
앞쪽 멀리 보이는 산은 금남정맥이다.
주룡이 그곳에서 와서 다시 그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대혈을 뜻하는 회룡고조혈이다.
좌청룡과 우백호가 끌어안듯 감싸며 보국을 형성하였다.
자연히 물이 나가는 수구가 좁다.
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므로 발복이 오랫동안 유지된다.
오늘날까지 광산김씨들이 사회전반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이곳 조상들의 음덕 때문일 것이다.
권력이나 재물을 물려주는 조상보다는 좋은 자리에 묻힌 조상이 더 좋다는 옛 풍수가의 말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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