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익산 미륵사지

초암 정만순 2021. 2. 5. 11:48

익산 미륵사지 

 

 

 

 

용맥 없어 기가 없거나 약한 땅… 길지는 아냐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한다.

뒤로는 익산·논산·군산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미륵산(429.6m)이 솟아 있다.

앞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만경평야가 펼쳐져 있다.

절은 온데간데없고 석탑만 최근 복원되었다.

국내에서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되었으며, 미술사적으로는 목탑에서 석탑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형태라고 한다.

이곳은 얼핏 배산임수 지형의 명당처럼 보인다.

그러나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용맥이 없다.

용맥을 따라 기가 전달되는데, 용맥이 없으면 기가 없거나 약한 땅이 된다.

사람도 기가 약하면 오래 살 수 없다. 땅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주변 산세가 좋아도 길지로 보기 어렵다.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 때 창건되었다.

당시로는 백제를 넘어 동양 최대의 사찰로 알려졌다.

하지만 언제 없어졌는지조차 모른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태종 7년에 왕실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된 것으로 보아 그때가지는 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조 때 강후전의 여행기인 《와유록(臥遊錄)》은 “탑이 100년 전에 부서졌다”고 적고 있다.

이로보아 임진왜란 전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과 산 사이는 물이 흐르기 마련이다.

이곳을 매립하여 건물을 지으면 배수 공사를 하더라도 땅 밑으로 물이 흐른다.

이를 수맥이라고 한다.

수맥 위는 지반이 약하고 습하다.

수맥은 건물의 수명을 짧게 하고 거주하는 사람의 건강을 해롭게 한다.

미륵사는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 전체가 수맥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륵사지가 물길이었다는 것은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는 도중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불 셋이 못 속에서 나타났다.

이에 부인이 여기에다 꼭 큰 절을 짓도록 해달라며 소원을 말하였다.

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법사를 찾아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미륵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탑을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라는 현판을 붙였다.

이 설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습지를 매립하여 평지를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실재 발굴조사에서 미륵산에서 발원한 물길을 가람의 네 면으로 돌리고 남쪽 정면에는 큰 연못을 조성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물이 나는 곳이다 보니 습기가 많았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을 하였다.

우선 땅바닥에는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1m 높이의 주춧돌을 놓았다.

건물바닥을 땅에서 떨어뜨려 습기가 올라오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다.

일정부분 효과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한마디로 미륵사지는 풍수적으로는 맞지 않는 자리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용맥이 없고, 용맥이 없으니 기가 모인 혈이 아니다.

사는 뒷산은 미륵산이 있어 좋으나 좌청룡과 우백호는 마치 여덟 팔(八)자로 미륵사지를 외면하고 있다.

자연히 앞이 벌어져 기가 빠져나간다.

수구는 좁아야 하는데 넓고, 물이 절터를 감싸지 않고 곧장 앞으로 빠져나간다.

다만 향은 남향으로 하늘이 열려 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볕이 잘 드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골짜기는 물길이면서 바람 통로여서 겨울에는 찬바람이 불어 추운 곳이다.

미륵사지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탑이다.

본래 세 개의 탑이 나란히 있었다.

동쪽과 서쪽에는 석탑이었고, 중앙에는 목탑이었다.

목탑은 소실되어 없어졌다.

동탑은 완전히 무너져 석재들이 주변에 흩어지고 일부는 외부로 유출되어 원형을 알 수 없었다.

현재 있는 것은 복원한 것으로 제대로 복원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서탑은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일부라도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20년에 걸쳐 보수공사를 하여 복원하였다.

백제 무왕은 귀족들에 의해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부여에서 자신의 고향인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하였다.

미륵사지 건설 역시 백제 중흥의 원대한 꿈을 펼치고자 건설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나라가 멸망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풍수지리의 중요성을 세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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