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송시열 묘
시장의 사람들로 병졸을 대신하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에 있다.
송시열(宋時烈)은 조선 중기 때의 문신,
학자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호는 우암(尤庵)이다.
노론(老論)의 영수로 효종(孝宗)의 봉림대군(鳳林大君)시절 사부(師傅)이기도 하며,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저서로 송자대전(宋子大全), 우암집(尤庵集) 등이 있다.
원래 수원에 있던 묘소를 후손들이 후에 이곳으로 옮겼다 한다.
충북도 기념물 제10호다.
당시 노론 사림의 중심이었던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이 인근에 있다.
송시열 묘 전경.
앞쪽 깃발이 펄럭이는 듯한 산세로 인해 장군대좌형이라 불린다.
산 아래에 병졸을 모으는 청천장이 개설되어 있다.
청천장에서 올려다 본 주산.
단아한 모습이다.
인물형 형국에 자주 보이는 산세다.
천안시 병천면에 병천시장이 있다.
유관순과 아우내장터로 더 널리 알려진 곳이다.
요즘도 번성하는 이 장터에 꼬리를 대고 있는 산줄기를 따라 오르다 보면 정상에서 하나의 큰 무덤을 만난다.
‘贈領議政忠憲朴公文秀墓’, 어사 박문수의 묘다.
산 아래서 올려다보는 산세는 위엄이 서려있다.
장군의 기세다.
장군과 병졸은 실과 바늘의 관계이지만, 산 중에는 병졸이 없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병천시장이다.
시장을 왕래하는 이들이 병졸을 대신한다.
괴산군 청천면의 청천장도 같은 맥락으로 생겨난 시장이다.
청천장에서 뒷산을 올려다보면 높고 단아하게 솟은 귀봉(貴峰)이 보인다.
풍수에서 인물이 들어가는 형국(形局)에 자주 보이는 산세다.
장터에서 뒤를 돌아보면 마치 깃발이 나부끼는 듯한 산세가 이어진다.
기묘한 형태다.
사람을 나타내는 산에다 깃발을 상징하는 산세가 어우러지니 풍수에서 말하는 이른바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 형국이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맹호형(猛虎形)에 먹이를 상징하는 개나 사슴 따위의 산세가 있어야 하듯이, 장군대좌형에도 반드시 이에 걸맞은 산세가 주위에 포진해야 한다.
우선 장군은 병졸을 거느려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혼자서는 적군을 감당할 수 없다.
진군을 독려하는 북 모양의 바위나 말 모양의 산세가 구비되면 더욱 좋다.
우암 묘소에도 가장 중요한 병졸을 나타내는 산세가 없다.
어떡하든 병졸을 대신하는 뭔가를 찾아야 한다.
우암의 후손들이 수원에서 이곳으로 이장을 할 때 처음으로 한 것이 묘소 앞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이었다 한다.
병졸이 많아야 장군이 위엄을 나타낼 수 있고, 그 위엄은 후손들의 영광을 보장해 준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손들은 거금을 들여 마을 주민들과 상의하여 시장을 개설했다.
청천장의 유래다.
이는 마을과 문중의 상생(相生), 즉 서로의 부족함을 채운 셈이 된다.
그러나 형국을 떠나면 다소 아쉬움이 남는 게 우암 묘소다.
우선 묘소에 서면 발아래가 골짜기다.
계곡으로는 물이 흐른다.
물이 그대로 빠진다는 얘기다.
물은 재물을 상징하는 것이니, 취재에 불리한 측면이다.
바람도 골짜기를 따라 밤낮으로 오르내린다.
풍수에선 직접 받는 바람을 살풍(殺風)이라 하여 기피한다.
묘소 앞 끝맺음도 좋아야 한다.
지기(地氣)를 올바로 갈무리 함이다.
묘소 앞 축대에 눈길이 가는 것은 이를 의식함이다.
두둑하게 솟은 입수처는 지기를 응축한 것처럼 보이나, 여기서 양쪽으로 다리를 벌린 산줄기는 혈을 제대로 보듬지 못한 아쉬움으로 이어진다.
주위를 에워싼 산세는 가히 압권이다.
그만큼 수려한 경관이다.
장군이 세상을 호령하는 듯한 기세, 출중한 사격(砂格)이다.
주산이 그러하고 안조산(案朝山)이 그러하다.
용맥의 기복도 좋고, 깃발의 머리 부분이 혈을 향해 감싸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꼬리가 도망가는 듯한 형태는 다소 거슬린다 하겠다.
풍수에서 중요시 하는 것이 형국론은 아니다.
그러나 정복 대상물이 아닌, 생명체로서의 자연과 우리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이만한 이론도 드물 터이다.
오늘도 청천의 장군은 위엄을 부리며 앉아 있고, 병졸은 200여년간 대(代)를 이어가며 보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