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전봉준 고가
문인의 터서 태어난 혁명가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 살았던 옛집이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조소1길 20)에 있다.
전봉준은 여기서 30km 정도 떨어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59 당촌마을에서 태어나 13살 때까지 살았다.
이곳 집은 고종15년(1878)에 지어진 것으로 전봉준의 나이 24세 때다.
그때부터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까지 살았다.
그러니까 이집에 살면서 동학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전봉준의 본관은 천안이며 아버지는 고부군 향교 장의를 지낸 전창혁이다.
장의(掌議)란 성균관이나 향교에 기숙하는 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임원을 말한다.
성균관이나 향교에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와 서재에 기숙하는 학생들 중에서 각각 1명씩의 장의라는 대표를 선출하였다.
대개 문벌이 출중한 집안의 자제가 선출되었다.
이로 보아 전봉준 가문도 한때 잘나가는 양반 집안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후기 세도정치로 극소수 양반들만 권력과 부를 장악하는 시대가 되었다.
벼슬을 할 수 없는 양반들은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몰락한 양반들은 체통은 커녕 생계조차 이어가기 힘들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서당 훈장이 되는 일이었다.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수준이다 보니 처우가 좋을 리 없었다.
대개가 가난했으며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이도 어려운 양반들은 부농 밑의 소작농으로 들어갔다.
전봉준 아버지도 그랬던 것 같다.
전주 봉동읍 구미리, 정읍 감곡, 태인 산외면 동곡리 등으로 이사를 다녔다.
서당 훈장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동곡리는 전봉준의 나이 18살 때였다.
그곳에서 두 살 위의 김개남을 만났다.
동학혁명의 두 지도자는 이렇게 인연이 되었다.
그 후 전봉준네는 평야지대인 고부로 이사하여 소작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재물을 다 빼앗겼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의 동생 조규순의 서자로 고종29년(1892) 고부군수가 되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원래 농민이 쌓았던 제방을 허물고 만석보를 쌓았다.
동원된 백성들에게는 임금을 한 푼도 주지 않았고, 수세를 과도하게 징수하였다.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공적비를 세운다고 금품을 징수 하였고, 모친상을 당해서는 부조금으로 2천 냥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봉준의 부친이 대표로 나서서 항의하다가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었다.
당시 전봉준은 고부지방 동학접주였다.
조병갑에게 가렴주구를 멈추라고 여러 사람의 서명을 받은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1894년(갑오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그는 조선사회를 완전히 바꾸는 폐정개혁안을 내놓았는데 조선 조정이 받아들였다.
동학농민의 봉기가 난이 아니고 혁명인 이유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로 피신했으나 부하접주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된 다음 교수형을 당하였다.
마흔 한 살의 나이였다.
그 후 그의 생가와 고가는 소각되어 없어졌다. 지금의 집은 복원한 것이다.
이곳의 태조산은 호남정맥 내장산(763.5m)이다.
중조산은 입압산(654.3m)과 방장산(742m)이며, 소조산은 두승산(445.2m)이다.
두승산의 정상은 작은 봉우리들이 물결처럼 솟아나 있다.
이러한 산세를 풍수에서는 문곡수성이라 한다.
문곡 수성체 산자락에서는 문인이나 예술인을 많이 배출한다고 하였다.
만약 세상이 태평했다면 전봉준은 인문이나 예술 방면에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승산에서 천태산(198m)을 지나 평지로 내려온 맥이 덕천천을 만나 멈춘 곳에 조소마을이 있다.
산세는 야트막하지만 기세는 있어 보인다.
마을 앞은 야트막한 시루봉 자락이 감싸준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마을이다.
풍수는 천기와 지기를 논하는 학문이다.
천기는 하늘의 기운으로 해와 달이 변하는 세월이다.
사람은 지기가 좋은 터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세월도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을 세삼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