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박수량 묘와 백비
좋은자리도 나쁜자리도 아닌 무해지지
조선시대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아곡 박수량(1491~1554)의 묘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10(백비길 33-17)에 있다.
그의 묘 앞 비석에는 아무 것도 새기지 않아 백비(白碑)라 부른다.
박수량은 성종 22년 지금의 홍길동테마파크가 있는 황룡면 아곡리에서 태어났다.
23세 때인 중종 8년(1513)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광주향교 훈도로 첫 공직을 수행한다.
그리고 명종 8년(1553) 63세로 호조판서에서 물러날 때까지 40년 동안 관리 생활을 했다.
박수량은 명종1년과 6년 두 번에 걸쳐 청백리로 오른 인물이다.
판서까지 올랐지만 한양에 집 한 칸 없이 셋집에 살 정도로 청렴했다.
자식들이 서울에 집을 지으려고 하자 크게 꾸짖기를 “나는 본래 시골 출신으로 성은을 입어 판서에 올랐으니 분수에 넘는 영광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찌 집을 지으려고 하는가.”면서 꾸짖었다.
그러나 그의 청렴을 못마땅해 하는 세력도 있었다.
참판시절 어머니 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와 삼년상을 치렀다.
이때 상주가 호의호식을 하며 지낸다는 투서가 명종에게 전달됐다.
명종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사실여부를 확인토록 하였다.
암행어사가 보고하기를 집은 비가 새고 굴뚝에서는 한 달에 절반은 연기가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명종은 아곡리에 아흔아홉 칸 기와집을 지어 청백당(淸白堂)이란 현판과 함께 하사했다.
그 집은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지고 현판만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장성군은 2008년 선생의 생가가 있었던 홍길동테마파크 내에 청백당을 건립하여 전통한옥 체험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박수량은 64세로 세상을 떠나면서도 “절대로 시호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죽자 장례 치를 비용이 없을 정도였다.
고향까지 상여를 운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명종이 예관을 보내어 장례비용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운구는 각 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 고을의 관원들이 맡도록 하였다.
또한 비석도 하사하였다.
비석에는 아무것도 적지 말라 하였다.
청백함을 알면서 새삼스럽게 업적을 새기는 것은 오히려 명성에 누가 된다고 하였다.
오늘날 백비라고 부르는 이유다.
북경에 가면 천수산 아래 명나라 13명의 황제릉이 있다.
그중 제13대 신종(만력제)의 정릉이 백비다.
48년 동안 재위하면서 아무 것도 해놓은 일이 없어서 비석 뒤에 쓸 내용이 없었다고 한다.
박수량의 백비는 이와는 완전히 비교된다 하겠다.
이곳 주산은 편백나무 치유의 숲으로 유명한 축령산(622.5m)이다.
호남정맥 정읍 내장산에서 입암산(654.3m)과 방장산(742m)을 거쳐 세워진 산이다.
전남 장성과 전북 고창의 경계를 이룬다.
산세는 험하지 않지만 골이 깊어 6.25당시 빨치산의 은거지로 유명했다.
골이 깊으면 물이 풍부한 법이다.
물은 상류의 유기질이 풍부한 토사를 운반하여 유속이 느린 곳에 퇴적시킨다.
장성이 산간지방이지만 골짜기마다 비옥한 들판이 있는 이유다.
물길을 따라 가면 어디든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물자유통이 용이하여 상업이 발달하고 외부 소식을 접하기 쉽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축령산 자락에 장성지역의 양반들이 많이 살았다.
하서 김인후 생가, 필암서원, 박수량 생가, 홍길동의 생가 등이 있고, 하서 김인후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의 묘들도 자리하고 있다.
박수량의 묘는 축령산에서 내려온 산줄기 끝에 있다.
내려오는 과정에서 산세는 순화되었지만 용의 변화는 크지 않다.
대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더구나 앞으로 능선이 내려갔다.
이는 묘의 기운이 앞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청룡과 백호가 감싸고 있고, 앞의 들판은 평탄하다.
얼핏 좋은 보국처럼 보이지만 이곳이 보국의 중심지에 해당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아주 좋은 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쁜 자리도 아니다.
이를 무해지지(無害之地)라고 한다.
묘도 생전 그 사람의 성격을 닮는 법인가 보다.
박수량이 살아서 욕심이 없었던 것처럼, 죽어서도 욕심이 없는 자리에 묻혔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