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김인후 생가
학자·귀인 배출하는 명문가의 터
하서 김인후(1510~1560)가 태어나고 자란 맥동마을은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에 있다.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필암서원에서 약2km 정도 거리다.
맥동마을 어귀 산모퉁이를 돌면 우측에 필암(筆巖)이라 적힌 작은 바위가 나온다.
바위가 붓끝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글씨는 영조 때 판서를 역임한 병계 윤봉구의 쓴 것이다.
마을에서 보자면 필암이 있는 곳은 물이 나가는 수구에 해당된다.
수구에 있는 산이나 바위를 수구사(水口砂)라고 한다.
풍수에서는 수구사의 모양을 보고 안쪽 마을의 특성을 파악한다.
수구사의 모양이 붓 모양이면 학자가 난다고 본다.
하서 김인후가 필암의 기운을 받아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이유다.
필암을 지나 마을에 이르면 주민들의 쉼터인 정자가 나온다.
그 앞에는 문정공 하서 김인후 유허비와 열녀 행주기씨·태인박씨 정려비각이 있다.
유허비는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길이 알리기 위해서 세운 비를 말한다.
정려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서 세우는 정문(旌門)을 말한다.
열녀 두 분은 김인후의 손자며느리 되시는 분들이다.
행주기씨는 기대승의 딸로 김남중의 처다.
태인박씨는 김중총의 처다.
임진왜란(1592) 중 화의교섭이 결렬되자 왜군이 조선을 재침략한 정유재란(1597)이 일어났다.
왜군은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보급로를 확보하려고 전라도를 공격해왔다.
이순신의 파직과 조선수군의 칠전량해전 대패로 말미암아다.
왜군이 장성으로까지 쳐들어오자 남자들은 강원도로 피난을 갔다.
기씨부인은 미처 따르지 못하고 친정인 광산군 임곡면으로 피난했다.
왜군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황룡강가에서 왜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왜군이 부인의 팔을 잡고 추행을 하러하자 부인은 은장도로 팔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나중에 시신은 찾지 못하고 팔뚝만 발견되었다. 할 수 없이 팔 하나만으로 장사 지내 그 묘를 일비장(一臂葬)이라 부른다.
현재는 김인후 묘 아래쪽에 남편 김남중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박씨부인 역시 왜군과 맞닥뜨리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두 부인에 감복하여 열녀 정려각을 세운 것이다.
유허비와 정려가 있는데서 마을 뒷산을 바라보면 둥그렇게 생긴 봉우리가 있다.
마치 단정하게 앉아 있는 귀인과 같다.
그 아래에 김인후가 태어난 터가 있다.
집 바로 뒤에 있는 현무봉은 부모와 같은 산이다.
사람도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냐가 중요하듯 풍수도 현무봉이 중요하다.
현무봉이 귀인처럼 생겼으면 귀한 인물을 배출한다고 본다.
본래 생가는 사랑채인 백화정(百花亭)까지 건물이 있었는데 6.25때 불타 없어졌다.
현재 종택은 그 이후로 지은 집이다.
종택 앞에는 어사리(御賜梨)라는 큰 배나무가 서 있다.
인종이 하서에게 배를 하사하자 고향의 어머니께 갔다 드렸는데 그 씨가 자란 나무라 한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은 하서의 5대조모인 여흥민씨다.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의 사촌언니다.
태종의 외척세력 척결로 민무구·민무질과 함께 남편 김온도 죽음을 당하자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전라도로 피신하였다.
전라도에 연고가 없어 어디로 갈지 몰라 장성 갈재에서 대추나무로 만든 매를 날렸다.
매가 한참을 날아 떨어진 곳이 바로 이곳 생가 자리다.
좋은 터는 하늘이 점지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노력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부인은 무학대사에게서 풍수를 배울 만큼 관심이 많았다.
그 결과 어려운 가운데서도 좋은 터를 잡을 수 있었고, 그 후손들이 최고의 명문을 이룬 것이다.
'四柱命理 風水地理 > 정경연의 풍수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성 여흥민씨 묘 (0) | 2021.01.21 |
---|---|
장성 박수량 묘와 백비 (0) | 2021.01.21 |
장성 김인후 묘 (0) | 2021.01.21 |
의령 남강 정암 (0) | 2021.01.20 |
장성 홍길동테마파크 (0) | 2021.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