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여흥민씨 할머니묘
▨ 여흥민씨 할머니=
울산 김씨 중시조 김온(金穩)의 부인으로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의 비(妃)인 원경왕후의 사촌동생. 김온은 태종의 외척 척결 당시 원경왕후의 동생들인 민무구·무질 형제의 옥사에 연루돼 화를 당했다.
당시 위기를 느낀 민씨 부인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한양을 떠나 장성으로 피신, 정착했다.
민씨 부인은 부친과 친분이 있던 무학대사로부터 천문과 지리, 복서 등을 배웠으며, 장성군 황룡면 맥동마을의 집터와 이곳 신후지지(身後之地)도 직접 잡았다고 한다.
하서 김인후의 5대 조모가 된다.
인촌 김성수, 가인 김병로 등이 후손이다.
묘는 장성군 북이면 달성리 명정마을에 있으며, 호남 8대 명당의 한 곳으로 꼽힌다.
▲ 민씨 할머니묘 전경.
우리나라 돌혈의 대표적인 곳이다.
오른쪽 봉분처럼 보이는 언덕 위에 묘가 있다. 앞쪽 건물은 재실이다.
▲ 묘 뒤쪽에서 바라본 민씨 할머니묘.
거대한 용(龍)이 하늘로 오르는 형상이다.
이를 풍수용어로 비룡입수라 한다.
풍수에선 산줄기를 용이라 한다.
'여기 백두대간의 한줄기가 서남으로 달려와 온 정기를 뭉쳐 이룩한 복부대혈이 곧 중시조 흥려군(興麗君)의 배(配) 정부인(貞夫人) 민씨 할머니의 유택이다.
할머니께서 친히 잡으신 터로서 말을 탄 자손이 이 앞들에 가득하리라는 말씀 그대로 후손이 번성하고 가문이 흥왕하여 오늘에 이르고 앞으로도 무궁토록 이어지리라.
이곳은 실로 우리 가문 존립의 근원이요, 자손 창성의 원천으로…'. 전북 장성에 있는 울산김씨 문중의 '민씨 할머니 묘역정화' 기념석에 새겨진 문구다.
이는 울산 김씨 문중의 민씨 할머니에 대한 존경심과 친근감, 그리고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도를 잘 표현해 놓은 글이라 하겠다.
대명당엔 전설 같은 얘기가 항상 뒤따르듯이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이곳을 민씨 할머니가 직접 잡았다는 것 외에 이런 얘기도 전해져 온다.
하서의 조부가 명당을 쓰기 위해 당대의 유명한 지사(地師)의 집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는데 갈 때마다 지사가 집에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명당자리를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하도 여러 번 찾아다니다 보니 지사의 부인과 친하게 되었고, 지사의 부인은 하서 조부에게 남편의 신후지지를 알아내 알려주기로 약속하게 되었다.
어느 날 지사가 돌아오자 그의 부인은 남편에게 '당신이 먼저 죽으면 당신이 잡아놓은 신후지지에 묘를 쓸 수 있지 않으냐. 그러니 그곳을 내게 말해 달라'고 말해 그 자리를 알아내게 되고, 이를 하서 조부에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하서의 조부는 그 명당에 민씨 할머니를 모시게 됐다고 한다.
민씨 할머니묘는 복부혈(覆釜穴)로 유명하다.
형태가 마치 거대한 가마솥을 엎어놓은 듯 둥그스름한 언덕에 자리 잡았다.
솥은 재물을 뜻한다.
요즘도 이사를 하거나 새집을 지어 옮길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게 솥단지다.
이사 날이 마땅치 않으면 솥이라도 먼저 좋은 날에 거는 게 일반적인 풍속도다.
따라서 이런 땅에 묘를 쓰면 후손들에게 반드시 부귀가 이어진다고 본다.
가마솥같이 생긴 땅은 혈의 사상(四象) 가운데 돌혈(突穴)을 지칭한다.
돌혈은 산중에 있는 것보다 평지에 있는 것을 더 상급으로 친다.
평지에서 솟구치기에 더욱 힘이 실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돌혈엔 반드시 사방으로 지각(支脚)이 갖춰져야 한다.
솥의 다리인 셈이다.
이를 풍수에선 현침사(懸針砂)라 한다.
이런 곳은 그 가운데가 혈(穴)이 된다.
즉 볼록한 정상에 묘를 쓴다는 얘기다.
민씨 할머니 묘엔 이들 요소가 빠진 게 없다.
돌혈의 대표적 묘인 셈이다.
좌우의 청룡과 백호도 흠 잡을 곳이 없다.
솟을 땐 솟고, 꺼져야 할 곳은 꺼졌다.
묘 뒤에서 솟구쳐 오르는 입수맥은 말 그대로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다.
더욱이 조산(朝山)서 뻗은 맥이 한바퀴 돌아 다시 그 지나온 산을 뒤돌아보고 있으니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도 된다.
그만큼 힘이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너무 넓은 명당이나 희미한 안산, 묘 앞에서 완전히 감싸주지 못한 청룡과 백호는 다소 부족한 요소가 될 수도 있겠다.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좌의정 약포 정탁의 묘도 대표적인 돌혈 중 한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