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풍수지리

여주 세종대왕릉

초암 정만순 2021. 1. 27. 14:59

여주 세종대왕릉

 

 

 

 

▨ 세종대왕릉=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으로 능호(陵號)는 영릉(英陵).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으며 같은 산줄기에 있는 제17대 임금 효종의 영릉(寧陵)과 함께 사적 제195호로 지정돼 있다.

원래 아버지 태종이 묻힌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서쪽에 있었으나 왕실에 닥친 잇단 흉사로 예종 때 이장,

조선 왕릉 중 첫 천장릉이 되었다.

인근에 영릉의 원찰(願刹) 기능을 담당했던 신륵사가 있으며, 신륵사는 여강의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세워진 비보사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세종대왕, 세대를 넘어 이만큼 친숙한 이름도 드물다.

한글 창제에 국토 확장, 거기에다 수준 높은 민족문화를 이룩했기에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그에 걸맞게 잠든 유택도 명당 중의 명당이다.

 

 

▲ 영릉 전경.

앞쪽 높은 산이 주산인 동시에 조산이 되는 북성산이다.

영릉은 이 북성산의 지맥이 한바퀴 돌아 결혈한 회룡고조혈이다.

 

▲ 홍살문과 참도(參道).

왕릉의 참도는 선왕(先王)이 다니던 신도(神道)와 살아있는 임금이 다니던 어도(御道) 등 2도(二道)로 이루어진다.

이곳 영릉의 참도는 3도(三道)로 이것은 황릉에 맞는 격식이 된다.

이는 1970년대 성역화사업 때 잘못 복원된 것이다.

 

 

영릉은 다양한 형국을 가진다.

이는 그만큼 큰 자리란 얘기도 된다.

우선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이다.

주위의 산들이 영릉을 구심점으로 꽃봉오리를 에워싼 듯해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지형이 그러하다.

주위의 봉긋하면서도 나지막한 산줄기들이 모두 영릉을 감싸듯 보듬고 있다.

다음으로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다.

봉황이 날개를 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란 뜻이다.

이때 두 날개는 청룡과 백호가 되고, 알은 곧 혈(穴)이 된다.

영릉이 봉황의 알이다.

능침에 올라보면 확연하다.

어머니의 품속같이 포근하고 정겹다.

또한 군신조회형(君臣朝會形)도 된다.

신하가 되는 주위의 산세가 임금이 되는 혈을 배알하는 모습이란 게다.

또 하나 능 뒤쪽에서 보면 당판은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듯 도톰하다.

이름하여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다.

 

영릉의 주산은 앞쪽에 위치한 북성산(北城山)이다.

북성산이 한바퀴 돌아 영릉 자리를 만들었단 얘기다.

따라서 북성산은 영릉의 주산(主山)이 되기도 하고 조산(朝山)이 되기도 한다.

이른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다.

그만큼 힘이 넘치는 용맥이다.

이게 영릉을 조선시대 왕릉 중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원래의 헌릉 서쪽자리는 흉지(凶地)였다 한다.

생전에 이를 알았지만 부모님 곁에 눕고 싶었던 효심으로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고집했다 한다.

하지만 그 뒤 왕실에 흉사가 겹쳐 일어나자 세조 때 처음 천장 얘기가 나왔으나 무산되고, 뒤이은 예종 때 천장(遷葬)을 하게 된다.

명당에 터를 잡을 땐 항상 뒷얘기가 있듯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예종의 천장 후보지 물색 명령을 받은 대신들과 지관들이 북성산에 올라 지세를 살피던 중 정기가 서려있는 이곳 산기슭을 발견했다.

그들이 산을 내려와 찾았지만 울창한 숲으로 인해 길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개울 건너 돌다리가 있어 길을 찾게 됐지만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또 한번 시련을 맞게 됐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비각이 있어 그곳에서 비를 피했는데, 비가 그친 후 그곳 지세를 본 대신들과 지관들은 그곳이 대명당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다른 사람이 묻혀있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한양으로 돌아온 그들은 예종에게 사실 그대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예종은 그 묘의 후손을 불러 양보를 받게 됐다고 한다.

대신들과 지관들의 눈에 뜨인 지금의 영릉 자리는 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광주 이씨 이인손(李仁孫)의 묘택이라는 설과 한산 이씨로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李季甸)의 묘택이란 설이 엇갈린다.

 

어찌 됐건 영릉이 이곳으로 이장하여 조선왕조가 100년 더 연장됐다는 설도 함께 있으니 이를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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