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풍수지리

화성 융릉

초암 정만순 2021. 1. 25. 09:24

화성 융릉

 

 

 

▨ 융릉=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의 아버지 추존 장조(莊祖·사도세자)와 헌경왕후 홍씨(혜경궁 홍씨)의 합장릉.

경기도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에 있다.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인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 제206호로 지정돼 있다.

원래 수은묘(垂恩墓)로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에 있다가, 정조가 즉위한 후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되면서 묘도 원(園)으로 격상되어 영우원(永祐園)으로 되었다.

그 뒤 다시 지금의 곳으로 천장(遷葬)하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칭하고 왕릉에 준하는 규모를 갖췄다.

고종 때 장조(莊祖)로 다시 추존되면서 능호(陵號)도 융릉(隆陵)으로 되었다.

인근에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가 있다.

 

 

 

▲ 융릉 전경.

뒤 불룩하게 솟은 부분이 지기(地氣)를 응축했다 혈로 공급해주는 입수처(入首處)다.

이를 잉(孕)이라고도 한다.

어느 왕릉이나 이 잉이 발달해 있다.

 

▲ 정자각. 제각(祭閣)이다.

중앙의 계단 중 왼쪽은 선왕(先王)의 혼령이 다니던 계단이고, 오른쪽 평범한 계단은 왕이 다니던 계단이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 영조(英祖)에 의해 영조의 서장자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됐던 정조가 즉위 후 처음으로 내린 교지다.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연민을 정조는 이 한마디에 담았다.

임금이었던 할아버지 영조 뿐 아니라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어머니, 여러 고모들까지 모두 합세하여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런 와중에 열한 살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웠으니 그 긴 세월동안 그들에 대한 감정은 오죽했을까.

 

조선의 왕들은 모두가 풍수에 관심이 많았다.

풍수가 왕실의 번영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봤기 때문이다.

빈번했던 천장은 당파 간 권력투쟁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 왕실의 안녕과 직결이 된다.

세종의 영릉 천장도 흉지(凶地)가 겉으로 드러난 첫 이유다.

 

정조의 풍수실력은 웬만한 풍수를 능가할 정도로 박식했다 한다.

왕이 못되었기에 초라할 수밖에 없었을 아버지의 묘, 자신의 손으로 이장할 결심을 했을 수도 있다.

당파간의 이해와 맞물린 천장이 아니라 참된 명당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풍수이론을 습득했을 수도 있다.

어쨌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좌향(坐向)과 안대(案對) 등 자신이 직접 지휘해 수원의 명당으로 옮긴다. 이렇게 보면 풍수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아들인 정조 임금을 이어준 매개체 역할을 한 셈이다.

지금의 융릉자리는 이전 효종(孝宗)의 능지로 윤선도가 추천한 곳이었다.

그때 윤선도는'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누워있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지세)의 대길지'라 했다.

그러나 반대파의 힘에 밀려 채택되지 못하고 만다.

효종의 능은 결국 동구릉(東九陵)에 자리했다가 뒤에 세종의 영릉 곁으로 천장된다.

 

왕릉도 왕릉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답답한 마음이 먼저 드는 곳도 있고, 힘이 먼저 느껴지는 곳도 있다.

예산에 있는 남연군묘는 평안함보다 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융릉은 평안한 자리다.

견준다면 세종의 영릉(英陵)에 섰을 때의 그 느낌이다.

 

우선 융릉은 전체 보국(保局)의 짜임새가 일품이다.

좌우의 용호(龍虎)는 첩첩으로 에워싸고, 물도 이상적으로 능 앞을 감고 흐른다.

안산과 조산도 적절히 능을 보듬어 생기를 북돋워 준다.

혈 자리는 능침이 된다.

이도 주산인 화산(花山)서 기세 좋게 내려온 산줄기의 끝에 맺혔다.

이른바 중출맥(中出脈)에 산진처(山盡處)다.

이렇게 안정된 지세(地勢)도 보기가 쉽지 않다.

하늘이 아들의 효심에 감동해 이런 큰 자리를 보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융릉은 왕릉 중에서 세종이 잠든 영릉과 쌍벽을 이루는 대명당이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원릉(元陵)이 영조왕릉이다.

하지만 신후지지(身後之地)는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홍릉(弘陵)이었다.

영조가 홍릉이 아닌 동구릉으로 간 것엔 사연이 있다.

정조의 개입이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할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원인이 된다.

 

원릉 자리는 원래 천장하기 전 효종의 능이 있던 자리다.

즉 파묘(破墓) 자리에 할아버지를 밀어 넣은 것이다.

따라서 원릉은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할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낳은 산물이 된다.

지금의 홍릉은 짝을 잃어버린 영조의 원비(元妃) 정성왕후 능만이 홀로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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