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세종대왕자태실
▨ 태실=
조선시대 왕자나 공주의 태를 봉안한 곳.
당시 왕실에 아기가 출생하면 이를 관장할 관청이 임시로 설치되고 길일, 길지를 택해 태를 매장했다 한다.
태봉, 태실, 태장 등의 지명이 남아있는 곳은 대개 이 태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1920년대 말 일제는 태실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경기도 서삼릉으로 옮겼는데, 이는 조선 왕실의 위엄과 민족혼을 훼손시키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태실은 드물다.
세종대왕자태실은 현존하는 태실 중 가장 큰 규모이며, 비교적 온전하게 제자리에 남아 있다.
사적 제144호로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다.
특급 명당엔 대부분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는 성주 태봉산도 예외가 아니다.
원래 이곳은 성주이씨의 중시조인 이장경의 묘소가 있던 곳이라 한다.
태실로 바뀐 과정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옛날 어느 도사가 이 자리를 잡아주며 '아무리 자손들이 잘되더라도 재실을 짓지 말 것이며, 주위의 나무도 베어선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높은 벼슬길에 오른 후손들이 성묘를 할 때마다 너무 초라해 보이는 묘소에 결국 재실을 짓고 주위의 나무도 베어 시원하게 꾸미게 됐다.
그 후 세종대왕이 왕자들의 태실을 마련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그 임무를 맡았던 지관들이 이 부근을 지나갈 때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피한 곳이 그 재실이었다 한다.
지관들이 이장경의 묘가 명당임을 알아보고 왕에게 보고했는데, 결국 왕의 명령으로 묘를 옮기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기록엔 이 자리가 아닌 인근에 묘소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태실지로 고시가 되면 왕릉 조성 때처럼 주위의 묘를 이장케 했기에 그 결과는 같다.
특히 이곳은 이장경의 후손인 이정녕이 당시 풍수학제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근에 묘소가 있음을 보고하지 않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태를 중요시한 것은 왕실이나 일반 백성이나 다를 바 없었다.
백성들은 태반을 왕겨 속에 넣고 태워 그 재를 이른 새벽에 강물에 뿌렸다.
태어난 아기의 복을 빌면서 말이다.
왕실에선 왕손의 무병장수 이외 순조로운 왕업 계승 등을 기원하며 전국의 길지를 찾아 태를 봉안했다.
즉 동기감응에 따라 유골처럼 중요하게 취급했단 얘기가 된다.
때론 왕실을 위협하는 인물의 배출을 사전에 막고자 하는 의도로 일반인들의 묘를 수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조성된 것이기에 태실은 당연히 명당일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왕릉은 거리제한에 묶여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태실은 전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그 차이엔 이러한 이유도 한몫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태실의 입지론 일반적인 명당의 제 조건 이외 충족시켜야 했던 것이 하나 더 있다.
반드시 돌혈(突穴), 즉 거북 등이나 가마솥을 엎어놓은 형태인 봉긋한 봉우리여야 했다는 것이다.
전국의 태실봉이나 태봉산이란 지명이 붙은 산은 모두가 이런 형태다.
마치 아이 가진 어머니의 배처럼 둥그스름하고 편안한 그런 산이다.
이곳 태봉산은 교과서적인 명당국세를 갖추고 있다.
주산이하 좌청룡, 우백호 등 주위의 산들이 모두 이 태실을 보듬고 있다.
어느 한곳도 배반된 곳이 없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내려온 물도 이 태실 앞에서 합해져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이룬다.
높이 솟구친 돌혈은 바람을 무서워한다.
하지만 이곳은 잘 짜여진 보국으로 그럴 염려도 없다.
그만큼 큰 자리다.
예전에 그토록 신성시됐던 태,
하지만 요즘은 병원 폐기물 처리장 신세가 다반사다.
심한 경우 건강보조식품을 만들기 위해 밀반출되기도 한다.
인터넷 창에 '태반'이란 단어를 쳐보라. 태반주사, 태반화장품, 태반건강주스…, 줄줄이 엮여져 나온다.
이런 현상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