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한밤마을
▨ 한밤마을=
부림홍씨 가문이 950년쯤에 개척한 집성촌으로 팔공산 산간 분지에 형성된 마을.
예부터 대식(大食), 대야(大夜) 등으로 불려졌다 한다.
처음엔 여러 성씨들과 함께 마을을 이뤘으나 고려 말 홍씨들이 득세, 600여년을 이어왔다고 전한다.
마을 입구의 숲은 임진왜란 당시 홍천뢰 장군이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던 곳이라 한다.
보물 제988호인 대율리 석불 입상이 마을 안에 있으며, 인근에 국보 제109호인 군위 삼존석굴이 있다.
돌담이 유명하며, 부계면 대율리가 행정구역명이다.
▲ 팔공산 한티재에서 내려다 본 한밤마을.
북풍을 피해 산줄기가 다하는 곳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왼쪽 절벽에 군위 삼존석굴이 있다.
▲ 솟대. 행주형인 한밤마을을 지탱해주는 비보물.
돛이 되기도 하고 닻이 되기도 한다.
풍수의 목적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
자연과 인간 간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셈이다.
좋은 땅에 집을 앉히고, 조상을 모심이 그 예가 된다.
그것은 자연에의 역세(逆勢)가 아닌 순응(順應)이 기본이 된다.
흔히 말하는 발복(發福)은 그 후의 문제다.
한밤마을은 사방이 팔공산 준령이다.
북쪽만이 물길을 따라 숨통을 틔우는 완만한 경사지형태다.
마을이 앉은 방향은 북쪽이다.
굳이 북향을 원치는 않았겠지만 지세에 따르다 보니 자연스레 잡힌 틀이다.
자연에의 순응이다.
북향 명당의 지세는 대개 마을로 내려오는 산줄기(來龍)가 길다.
햇볕을 잘 받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형성된 땅이다.
아산에 있는 맹씨행단이 그러하고, 고창에 있는 김성수 생가가 그러하고, 북향을 하고 있는 묘소들이 그러하다.
이 원칙을 벗어나면 좋은 땅이라 할 수 없다.
북향의 제1요건이 되는 셈이다.
북향 마을은 북풍이 매서운 곳이다.
한밤이 완만한 경사지 대신 산줄기가 다하는 구릉지에 자리 잡은 이유 중의 하나다.
경사지는 바람에 노출된 지역이 된다.
차가운 기운이 밤낮 없이 몰아친다.
이런 곳은 생기(生氣)가 모이지 못한다.
풍수용어로 산기처(散氣處)다.
한밤마을의 동구엔 숲이 조성돼 있다.
북풍을 막는 기능이외, 풍수적으로 큰 의미가 내포된 숲이기도 하다.
풍수에선 물이 마을에서 곧 바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이면 재물이 새는 것으로 본다.
대율리 숲은 새는 재물을 막는 비보림(裨補林)으로 조성된 것이란 얘기다.
한밤에는 옥소덤이니, 보경들이니 하는 지명들이 눈에 띈다.
풍수 형국론으로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지명들이다.
주산격인 오재봉의 봉긋한 봉우리가 옥녀의 머리가 되고, 여기에서 뻗어 내린 지맥은 머리카락이 된다.
머리를 빗기 위해 필요한 빗이 청룡에 있는 참빗모양의 바위로 된 산자락, 즉 옥소덤이다.
백호쪽 물 건너 보경들은 옥녀가 보는 거울이 된다.
한밤마을 숲 들머리엔 진동단(鎭洞壇)이란 명패를 붙인 돌 솟대가 서 있다.
한밤의 또 다른 형국인 행주형(行舟形)을 설명하는 유물이다.
배는 돛대와 닻과 키가 필요하다.
진동단은 출렁대는 마을을 진정시켜주는 닻이 되기도 하고, 배의 순항을 보장해 주는 돛이 되기도 한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물이 넘쳐나지만 예전 이 마을엔 변두리에 서너개의 우물이 전부였다 한다.
이는 행주형의 또 하나의 특징인 '마을 복판엔 우물을 파지 않는다'를 실천한 것이라 봐도 되겠다.
배에 구멍이 생기면 배가 침몰한다.
그것을 막자는 의도였던 게다.
솟대 꼭대기엔 오리 한 마리가 덩그렇게 앉아 있다.
언젠가 그 오리까지 떼 간 사람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