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가일마을
▨ 가일마을=
안동 권씨 집성촌. 입향조인 권항(權恒)이 15세기에 정착한 후 안동 권씨 역사만 500여년이다. 하회마을 입향조 류종혜(柳從惠)의 숙부인 류개(柳開)가 처음으로 마을을 개척했다 한다. 이후 류씨와의 혼인관계에 의해 순흥 안씨, 안동 권씨, 광산 김씨 등이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습재, 수곡고택 등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주산인 정산(井山)을 사이에 두고 이웃에 안동 김씨 총본산격인 풍산읍 소산마을이 있다. 풍천들 건너에 하회마을이 있고, 정산은 경북도청 이전지의 청룡이 되기도 한다. 행정구역은 풍천면 가곡리.
▲ 정산과 가일마을 전경.
주민들은 정산의 세 봉우리가 학이 날개를 접고 둥지에 앉는 형상이라 했다.
왼쪽 긴 능선이 학의 부리가 된다.
정면으로 보이는 짧은 능선에 안동 권씨 입향조 권항 묘소가 있다.
고택들은 주맥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 잡았다.
▲ 마을의 기운이 새는 것을 막는 저수지.
고목은 보호수로 지정된 버드나무다.
그 옆의 돌이 남근석이다.
뒤에 앙증맞게 생긴 작은 남근석이 하나 더 있다.
주산은 한 나라의 국운에서부터 작게는 한 묘소에 이르기까지 그 흥망성쇠를 좌우한다.
풍수 잣대로 보면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조선 초기 인왕과 북악의 한양 주산 논쟁을 실례로 들어도 되겠다.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마을이나 유명 묘소를 찾을 때 참고로 하는 것도 이 주산이다.
긴가민가한 경우 빼어난 산형을 보고 그 지점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때론 혈처(穴處)를 찾을 때 적용되기도 한다.
주산이 균형 잡히고,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이 혈이 된다는 게다.
가일마을 앞 도로에서 보면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저수지의 둑만이 덩그렇다.
다만 둥그렇게 솟은 정산의 세 봉우리가 학이 날개를 펼친 듯 그 모습을 보일 뿐이다.
주산만을 보고 작은 오솔길 같은 시멘트 포장길을 올라가면 마을이 있다.
주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풍수이론이다.
저수지에 비친 마을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마을 주민들은 가일을 학이 내려앉는 형국이라 믿는다.
마을이 학의 보금자리란 얘기다.
주민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위성사진을 보면 뚜렷하다.
학이 날개를 접는 모습에다 긴 주둥이도 영락없다. 형국론으로 따져 마을 어귀 저수지는 학이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수원처라 보면 되겠다.
가일의 앞마당은 드넓은 풍산들이다. 앞이 확 트였다는 의미다. 뚜렷한 안산(案山)이 없다는 얘기도 된다.
이럴 땐 앞을 막아줘야 기운이 새지 않는다. 저수지는 설기(洩氣)를 막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옛 책에 안산은 물로 대신할 수 있다고 했다. 수주작(水朱雀)이 그것이다.
이래저래 동구의 저수지는 맡고 있는 역할도 많다.
주민들의 말을 빌리면 정산은 바위산이라 한다. 마을 어느 곳을 파더라도 물이 난다고도 했다. 정산 정수리에 언뜻언뜻 보이는 암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오행의 법칙에 따르면 돌(金)은 물(水)을 생(生)한다. 그리고 금과 수는 음양(陰陽)으로 따지면 음(陰)이다.
저수지 옆 보호수로 지정된 버드나무 아래엔 크고 작은 남근석(男根石)이 두개 서 있다.
만물 중에 남자는 양기(陽氣)를 대표한다.
그러기에 이 남근석은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것 이외에 왕성한 음기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되겠다.
음양의 조화를 위한 비보물로서의 의미도 가진다는 얘기다.
정산은 부봉(富峰)이다.
그것도 아주 부드럽다.
정산과 같은 정감을 주는 주산도 보기가 쉽지 않다.
전형적인 부자가 나는 산이다.
지세도 삼태기 형상이다.
삼태기는 곡식을 담는 기구다.
말 그대로 이곳 지형은 재물을 모으는 형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산세가 단조롭다는 것.
하지만 들 복판에 솟은 산은 힘이 있다고 본다.
편편한 땅에서 솟구치기에 그렇다.
거기에다 산과 물, 들과 인위적 요소들이 조화를 이뤘다.
그러기에 인간과 자연이 한 몸이 돼 600년이 넘는 긴 시간을 이어오지 않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