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청암사
▨ 청암사=
신라 헌안왕 3년, 85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에 있다.
1980년대에 설립된 비구니승가대학이 있으며, 경내에 있는 보광전(普光殿)은 조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폐비가 됐을 때 그의 복위를 기원하던 원당(願堂)으로 건립됐다 한다.
경상북도지정문화재로 대웅전, 다층석탑 등이 있다.
인근 수도리 수도산 정상부에 있는 수도암도 청암사와 함께 도선이 창건했다 한다.
동학혁명 당시 전소됐다 1900년대에 중수됐다.
보물 제296호인 석불좌상과 보물 제297호인 삼층석탑, 보물 제307호인 석조비로나자불좌상이 있다.
경내로 수도산 등산로가 나 있다.
▲ 수도암 전경. 가운데 산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는 가야산 상왕봉. 연꽃 봉우리를 닮았다.
수도암을 형국론으로 옥녀직금형으로 보기도 한다.
옥녀가 앉는 자리는 대적광전, 앞마당 쌍탑은 베틀의 두 기둥, 연꽃 봉우리는 끌개가 된다.
▲ 와우형의 배 안에 들어앉은 청암사의 전각들.
와우형은 대개 땅이 후덕하다.
푸른 기와집이 대웅전이다.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鼻祖)로 흔히들 도선국사(道詵國師)를 꼽는다.
한국 자생의 토종 풍수에 중국에서 도입된 풍수를 접목, 집대성한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기도 한다.
도선국사를 얘기하자면 항상 비보사탑(裨補寺塔)이 따른다.
병든 신체에 침이나 뜸을 뜨듯, 허약한 국토 마다마다에 사찰이나 탑을 세워 병든 곳을 치유했다는 게다.
이렇게 건립된 것이 전국에 3천여곳에 달했다 하니 도선과 비보사탑 연계에 무리가 없다 하겠다.
이게 도선의 풍수를 개인 발복을 위주로 하는 오늘날 풍수와는 달리 호국풍수라고도 하는 이유다.
청암사(靑巖寺)나 수도암(修道巖)은 도선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들에 비보의 의미가 부여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록물이 남아있지 않으니 정확하게 고증할 길은 없다.
최근 들어 시도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는 않다.
청암사는 와우형(臥牛形)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평화롭게 누워있는 소의 형태다.
일주문을 막 벗어나 절로 향하다 보면 우비천(牛鼻泉)이란 샘물이 있다.
이곳이 소의 코 부분에 해당되고, 대웅전 등 전각들이 있는 자리가 소의 배 부분이 된다.
대개 와우형의 지세는 후덕하다.
흙이 많고 돌이 없다.
대웅전 뒤의 산세가 이러하다.
둥그스름한 형태가 꼭 소의 등줄기를 닮았다.
이런 와우형은 재물복이 많은 것으로 본다.
내청룡 끝자락엔 바위가 감아 돌아 기운이 새나감을 막고 있다.
이런 지세는 장풍(藏風)에도 제격이다.
들어온 바람은 어느 한 곳으로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 옛날 도선이 수도산 정상부의 명당 터를 보고 7일간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전해지는 곳, 곧 수도암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천년을 훌쩍 넘어선다.
그 역사만큼이나 불상이나 풍수에 얽힌 얘기도 많다.
수도암 풍수의 백미는 앞으로 보이는 가야산 상왕봉이다.
그 모양이 흡사 연꽃을 닮았다.
이 모양은 대적광전 앞마당에서만 제대로 나온다.
안·조산정혈법(案朝山定穴法)으로 제대로 입지했다는 얘기도 된다.
전해오는 형국론으로 따져 이를 베 매는 데 실을 켕기는 제구인'끌개'라 보기도 한다.
이는 수도암을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즉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으로 보기 때문이다.
앞마당의 쌍탑은 베틀의 두 기둥이 되고, 대적광전은 옥녀가 앉는 자리가 된다.
산속에선 장풍이 우선이라 했다.
바람이 무섭다는 얘기다.
그래서 산속에선 평지가 명당이 된다.
높은 곳에선 낮은 곳, 낮은 곳에선 높은 곳을 찾는 게 풍수의 기본이다.
수도암은 높은 곳에 있다.
하지만 포근하다.
산이 다한 평평한 곳에, 청룡과 백호가 적당한 높낮이로 알맞게 감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옛 서적에도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명당이 있다 했다.
청암사 일주문 못 미처 오른쪽으로 옛 도로가 있다.
하지만 이 길은 담장으로 폐쇄돼 있다.
그 까닭이 우비천과 관계가 있다.
길이 소의 목덜미를 짓누르기에 샘물이 마르고 절이 쇠락해졌다는 게다.
이에 그 길을 막고 새 차도를 냈다 하니, 곧 비보인 셈이다.
비보로 창건된 청암사는 비보의 맥을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