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마을
문필의 품속에서 현인을 기다리다
▨ 양동마을=
15~16세기 이후 월성 손씨, 여강 이씨 두 가문이 대대로 살아 온 조선시대의 대표적 양반마을로 500년 동족집단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150여 호의 크고 작은 옛집과 20여점의 지정문화재가 있으며,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돼 있다.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영남 4대 길지(吉地) 중의 한곳으로 꼽힌다.
행정구역으론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은 아름답다. 아니 정겹다.
옛날과 현대의 어울림이 그러하고, 언덕배기 기와집과 그 아래 초가집과의 조화가 그러하다.
그 언덕에 한번 서 보라. 오뚝하니 선 앞산, 즉 안산(案山)인 성주산(聖主山)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단아한 문필(文筆)의 모습이다.
그것은 어디서나 한결같다.
관가정의 누마루, 향단의 대문에서 보이는 형태는 '자연의 붓' 그 자체다.
무첨당 지붕에 걸린 그 붓은 금방이라도 먹물을 찍어 거침없이 휘갈겨 써내려갈 것만 같다.
서백당 마당에 가득 차는 성주산은 아예 한폭의 그림이 된다.
건물 자체를 대성헌(對聖軒)이라 이름 지은 고택도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리.
이는 '성주산을 대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성주산은 끝이 뾰족한 문필봉이다.
조선시대 양반마을이나 웬만한 묘소치고 이 문필봉이 없는 곳이 없다.
그만큼 소중히 취급하는 산의 형태다.
문필은 글을 의미한다.
글은 곧 명예요, 때론 권력이 되기도 했다.
그 기운을 받고자함인지 양동의 고택들은 한결같이 이 성주산을 향해 담장을 허물고 있다.
양동은 풍수 형국론으로 보면 물(勿)자 형국이 된다.
마을이 입지하고 있는 형태가 한자의 물자(勿字)를 닮았다는 얘기다.
성주산에서 내려다보면 참으로 흡사하다.
마을 입구서 바로 보이는 관가정이 첫 획이 되고, 주산인 설창산에서 뻗어내린 주능선과 글자의 어깨 쪽
서백당을 품고 있는 산 능선이 두번째 획이 된다.
향단, 무첨당이 자리 잡은 산줄기가 다음 획순이다.
거창한 것 같지만 물자 형국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산과 물이 그만큼 마을을 잘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향단서 보면 관가정이 우백호가 되고, 무첨당이 좌청룡이 된다.
서백당은 청룡과 백호가 여러 겹으로 둘러싼 최적의 입지가 된다.
하지만 관가정에서 보면 청룡은 여러 겹이 되지만 백호는 없다.
안강들의 거센 바람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비보풍수다.
관가정 오르는 길의 노거수들이 모자람을 채우는 비보의 역할을 한다.
이번엔 지도를 보자.
철길이 이 마을을 우회해서 지나간다.
일제 강점기 때 개설된 동해남부선 철길은 원래 이 마을 중심부를 흐르는 개울을 따라 부설하도록 계획됐다 한다.
이럴 경우 철길이 또 한 획이 된다.
물자가 변해서 혈(血)자가 된다.
주민들 반대가 이어져 지금의 형태로 노선 변경이 불가피했다 한다.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이런 명당엔 어김없이 개입되는 일제의 풍수침략 망령이다.
이 마을 가옥들의 맏형격인 서백당은 예부터 삼현지지(三賢之地)의 명당으로 알려져 온다.
세분의 현인이 나는 땅이란 뜻이다.
실제 우재 손중돈 선생과 동방 5현에 꼽히는 회재 이언적 선생이 났으므로 두 분은 이미 태어난 셈이다.
안채 깊숙한 곳에 있는 산실에선 아직 한 분의 현인이 잉태되길 기다리고 있다.
마당 가득히 문필의 기운을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