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주구산 덕사
개 콧등에 쇠말뚝…군민들 열패감 조장
▲ 청도읍 쪽에서 바라본 주구산. 달리는 개의 형상이다.
산의 오른쪽 정상부분에 있는 건물이 '떡절'이다.
그 아래에 쇠말뚝을 제거한 뒤 세운 표지석이 있다.
▨ 주구산=
청도군 화양읍에 있는 산.
그 형상이 달리는 개의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200m의 높지 않은 산으로 '덕사(떡절)'이 있다.
삼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예부터 전략상 요충지로 여겨져 왔다.
옛 이서국의 수도 방위의 전초기지로 추정되는 산성도 이곳에 있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된 쇠말뚝 제거현장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 쇠말뚝 제거 표지석.
이곳에서 지름 4cm, 길이 1m 정도인 쇠말뚝이 발견됐다.
쇠말뚝은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제거됐다.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는 말발굽 명당이다.
삼면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만이 들판으로 트여져 있는 마을이다.
기록으로조차 희미한 옛 이서국(伊西國)의 도읍지이기도 하다.
이 이서국이 신라에 병합되기 전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곳이 폐성(吠城), 즉 지금의 주구산(走狗山)이다.
패망한 신라의 잔병들이 이곳에서 고려의 왕건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주구산이란 이름은 조선 명종 때 청도군수로 부임한 황응규가 지었다 한다.
이름 그대로 이 산의 형태는 영락없이 달리는 개의 모양이다.
그런데 쫓아가든 쫓기든, 달리는 형상은 뭔가 불안하다.
주저앉혀야 한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개의 머리 부분에 떡을 상징하는 절을 세웠다.
떡절(德寺)이다.
개가 떡을 먹기 위해선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
떡절이 생긴 연유다.
그 뒤로 이 근방에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늘고 인물도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넘치는 것을 억누르거나 깎아서 완벽한 땅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비보(裨補)의 반대개념인 염승(厭勝)이다. 그만큼 주구산은 전략상으로나 풍수로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청도의 명산인 셈이다.
일제는 조선침략을 위해 수십년에 걸쳐 한반도의 지형과 조선인들의 풍수관을 조사했다 한다.
전국적으로 수집한 그 자료들을 토대로 혈처라 여겨지는 곳에다 쇠말뚝을 박거나 신사(神社)를 세웠다.
도로나 철도를 놓아 맥을 끊기도 했다.
대다수 조선인들이 믿어왔던 풍수를 역이용한 셈이다.
풍수에서 자주 언급되는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의 저서 '조선의 풍수'도 그 출간 목적에 이러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포함됐다고 본다.
이 책은 일제의 문화침략이 활발히 전개됐던 1931년 조선총독부가 관권을 총동원해 자료를 수집, 출간한 풍수개괄서이기도 하다.
좋은 땅의 기운을 받으면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고 부자가 난다고 보는 게 풍수다.
이를 뒤집어보면 좋은 땅의 기운을 꺾으면 더 이상의 발복이 없다는 게 된다.
일제의 풍수침략 의도는 '이 곳 명당은 쇠말뚝을 박아 혈을 파손시켰다.
그러니 이 곳에서 더 이상의 인물이나 재물을 기대하지 마라'라는 것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예로 경복궁 앞의 조선총독부 건물이나, 도로로 인해 궁궐과 동떨어지게 된 종묘를 들 수 있겠다. 모두가 정신적, 문화적 패배의식이나 열등의식의 조장이다.
이 쇠말뚝 정기 끊기는 일제의 독창물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그 원조라 한다.
조선의 산세를 본 이여송이 데리고 온 지관들을 시켜 혈맥이라 여겨지는 곳에다 쇠말뚝을 박거나 불을 피워 뜸을 놓았던 것.
빼어난 산천의 기운을 받아 인물이 속출됨을 두려워했다는 게다.
주구산 떡절 밑 절벽 위엔 표지석이 하나 서있다.
일제 때 박았던 쇠말뚝을 제거한 흔적이다.
그 위치가 개의 콧잔등이다.
콧등에 박힌 철심, 개는 떡이 있어도 먹을 마음이 없었을 게다.
아니 삶 자체가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지금쯤 상처는 다 아물었을까.
싱그러운 아침 햇살에 표지석이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