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내앞마을
▨ 내앞마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영남 사대길지(四大吉地) 중의 한곳으로, 마을 앞은 반변천이 둥글게 환포하며 흐른다.
'내앞'이란 지명도 천전(川前), 즉 반변천 앞의 마을을 의미한다고 한다.
의성 김씨 동족마을로 형성돼 50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16세기에 화재로 소실된 후 학봉 선생이 다시 지었다고 전해지는 의성 김씨 종택은 보물 제450호다.
이웃에 문화재로 지정된 소종택들이 즐비하다.
특히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거나, 독립운동을 지원한 애국지사들이 많이 배출된 것으로 유명하다.
마을 앞에 최근에 건립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무릇 수구가 엉성하고 널따랗기만 하면 비록 좋은 밭 만이랑과 넓은 집 천칸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버텨내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사라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봐서 구해야 한다.
' 이중환의 저서 '택리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살집을 구하는 데 있어 제1조건으로 수구를 꼽았단 얘기다.
수구는 청룡과 백호 사이를 흐르는 물의 통로다.
바람의 통로이기도 하다.
풍수에서 수구와 물은 재물로 통한다.
따라서 수구가 넓으면 그 터의 기운, 즉 재물이 새는 것이 된다.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 풍수다.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단 의미다.
수구가 터져 있으면 장풍이 되질 않는다.
물도 거침없이 빠진다. 명
당국세의 기본이 엉성해질 염려가 있다.
내앞마을의 한가지 흠이 이 수구다.
이곳엔 서쪽에 수구가 있다.
백호 쪽이다.
그런데 이곳의 백호는 짧다. 게다가 터를 보듬지 못하고 달아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자연히 수구가 넓어지게 된다.
수구가 열렸다면 막아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모자람을 채우는 것, 즉 비보다.
마을 초입 반변천이 휘돌아 나가는 곳, 임하댐의 보조 댐이 있는 곳에 조그만 섬이 있다.
그 속엔 수백년은 됨 직한 노송들이 줄지어 섰다.
이 소나무 숲이 내앞마을의 터진 수구를 막아주는 수구막이다.
개호송(開湖松), 내앞마을의 의성 김씨 문중이 '이 숲이 없으면 내앞마을도 없다'며 문중의 이름을 걸고 수백년을 가꿔온 숲이다.
홍수로 유실되고, 함부로 베어지는 일이 발생했을 땐 완의(完議)까지 만들어가며 문중 차원서 보호해 왔다고 한다.
즉 이 개호송이 부실한 마을 서편을 채우고, 마을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하늘이 낸 명당에 인공을 보태 완벽을 기했다 하겠다.
내앞마을을 풍수형국으로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이라고 한다.
비단은 고귀한 이들이 입는 옷이다.
따라서 이런 형국에 살면 부귀를 다하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고관이 나온다고 본다.
이 형국의 혈처에 의성 김씨 종택이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이 '조선의 풍수'에서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으로 소개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의성 김씨의 중시조인 청계 김진의 다섯 아들이 이곳에서 태어나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地處)란 말도 있는데 여기엔 전해지는 얘기가 있다.
어느 날 김진이 한 관상가를 만났는데 '살아서 벼슬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자식 기르기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라 말해 자신의 벼슬보다 자손의 영예를 택했다고 한다.
그 결과 아들들의 영달로 자신은 이조판서에 증직됐다고 한다.
개호송, 예전엔 반변천변에 조성된 숲이었을 터지만 지금은 접근조차 여의치 않다.
옛 사진 속 그 아름답던 노송 군락, 지금은 잡목의 침범으로 많이 훼손된 상태다.
하지만 그 의연한 자태는 변함이 없다.
내앞마을 인걸들의 강직했던 성품은 선조들의 정성이 밴 저 소나무의 기상을 이어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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