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우록동
사슴을 벗 삼아…우록김씨 400년 터전, 산으로 둘러싸인 保身·隱居의 땅
우록마을은 높은 산들이 주위를 에워싼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외부세계와의 교류가 활발치 못해 예로부터 은자(隱者)들의 땅으로 인식돼 왔다.
김충선 묘소. 세 개의 산봉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사진 속 오목한 부분이다.
김충선=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으로 출전했다
귀화한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사가야(沙可也)이다.
귀화이후 왜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 공로로 조선 조정으로부터 김해김씨 본관(本貫)과 함께 '김충선(金忠善)'이란 성명을 하사 받았다.
김해김씨는 원래의 김해김씨와 구별을 위해 우록김씨(友鹿金氏)라고도 한다.
이후 정유재란(丁酉再亂), 이괄(李适)의 난(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 청과의 강화가 이루어진 후 지금의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로 내려와 여생을 마쳤다.
우록에 그의 위패를 모신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있으며, 서원 뒤 삼정산(三頂山)에 묘소가 있다.
전쟁이나 흉년, 전염병 등이 피해가는 땅을 승지(勝地)라 한다.
일반인들이 명당(明堂)과 혼동하는 땅으로, 이중 국내에서 유명한 곳 10곳이 십승지(十勝地)로 묶여 잘 알려져 있다.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이고 출구라곤 오직 한 방향뿐이며, 그것도 바깥에서 보면 쉽게 알아볼 수도 없다.
외부세계와의 단절로 인해 은거하기에도 적합한 땅, 일반적인 양택풍수 이론엔 부합치 않으나 사람들에겐 명당보다 더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우록마을이 그러하다.
동쪽만이 약간 트였을 뿐 삼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였다.
그것도 500~800m의 높은 산들이다.
그렇다고 험악하지도 않다.
사람을 품어주는 푸근한 느낌이 감도는 그런 후덕한 산들이다.
지금은 전원주택과 각종 음식점으로 포화상태를 이루고 있지만 400년 전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사슴을 벗 삼는 마을'이란 말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런 까닭인지 모를 일이지만 우록엔 우리나라를 스쳐간 그 많은 병화(兵禍)가 한 번도 침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록동 더 깊은 산중에 백록마을이 자리한다.
백록(白鹿)은 고려말 두문동현인(杜門洞賢人)이었던 우현보(禹玄寶)의 후손들인 단양우씨(丹陽禹氏)들이 1550년대에 처음으로 은거한 곳이라 한다.
그 뒤 김충선이 은둔을 위해 찾아와 함께 도학(道學)을 연구하였다 하니, 이 우록동 골짜기는 지세(地勢)에 따라 적절히 활용된 곳이라 하겠다.
김충선의 묘소는 녹동서원 뒤 삼정산에 있다.
서원 맞은편에서 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있고 그 가운데에 위치한다.
오목한 와혈(窩穴)의 형태다.
안산(案山)은 산줄기가 여러 갈래로 나뉜 현군사(懸裙砂) 형태를 띤다.
이는 따르는 여자가 많은 사격(砂格)이 되나, 다른 한편으론 자손 번창의 길조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이국땅에 뿌리내려야 하는 입장서 보면 이런 땅을 유택(幽宅)으로 가진다는 것도 하늘이 준 복이라 할 수 있겠다.
참전 당시 김충선은 20대 초반의 약관이었다.
그것뿐 일본 내 고향도, 형제도 지금까지 분명치 않다.
한·일 학자들의 연구 성과로 막연한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젊었을 적에 떠나온 고향이기에 향수나 형제들에게 향하는 그리움은 더하였을 게다.
그러기에 그가 남긴 '남풍유감(南風有感)'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서 회자(膾炙)되고 있다.
남풍이 건듯 불어/행여 고향소식 가져 오는가/
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홀연히 바람소리만 날 뿐 볼 수가 없네/
이 내 생전에 골육지친 소식 알 길이 없어/글로 서러워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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