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칠나무
목공예품을 만들때 색을 칠하거나 표면을 가공할 때 사용되어 황칠나무라 이름 붙었다.
높이 15m에 달하고 어린 가지는 녹색이며 털이 없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 또는 타원형이다.
또한 잎 가장자리가 밋밋하지만 어린 나무에서는 3∼5개로 갈라지고 톱니가 있다.
꽃은 6월 ~ 8월 중순에 연한 황록색으로 피고 암수한꽃이며 산형꽃차례에 달린다.
꽃줄기는 길이 3∼5cm이고 작은꽃줄기는 길이 5∼10mm이다. 꽃받침은 5개로 갈라지고 꽃잎과 수술은 5개씩이며 화반(花盤)에 꿀샘이 있다.
암술머리는 5개로 갈라지고 핵과(核果)는 타원형이며 9월말 ~ 11월에 흑색으로 열매가 열린다.
황칠에 사용되는 나무의 진액은 8월에서 9월에 채취한다.
황칠은 옻나무 수액을 채취하여 칠하는 옻칠과 같은 전통 공예기술이다.
황칠나무 표피에 상처를 내면 노란 액체(진액)가 나오는데 이것을 모아 칠하는 것을 황칠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가구의 도료나, 금속·가죽의 도료로 사용되었다.
역사적으로는 중국에 보내는 조공품으로 분류되어, 황칠나무가 자라는 지역 백성들의 고통도 심했다.
조선시대에는 황칠나무를 자라면 베어버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한국 특산종으로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및 제주도에 분포하며, 일본에는 혼슈 남부, 오키나와까지 분포한다.
과거에는 독립종으로 보았으나, 일본종인 Dendropanax morbiferus H. Lev.와 수액의 색 이외에는 형태적 차이점을 확인하기 어렵다
잎
잎은 어긋나기하며 길이 10-20㎝의 달걀모양 또는 타원형이고 톱니가 없거나 3~5개로 갈라지며 첨두이고 예저 또는 넓은 예저이며 양면에 털이 없고 엽병은 길이 3-10cm로서 표면이 편평하거나 홈이 있다.
전체적으로 광택이 좋다.
꽃
우상모양꽃차례는 가지 끝에 1개씩 달리며 양성꽃으로 6월에 백색으로 피고 화경은 길이 3-5cm이며 꽃자루는 길이 5-10mm이다.
꽃받침은 종형 또는 거꿀달걀모양이고 끝이 5개로 갈라지며 꽃잎과 수술은 각각 5개이고 밀선반에 꿀샘이 있으며 씨방은 5실이고 암술머리는 5갈래로 나뉜다.
열매
열매는 길이 7~10mm인 타원형의 핵과로 10월에 흑색으로 익으며 암술대가 남아 있다.
줄기
큰 것은 높이가 15m에 달하고 수간은 단립으로 올라가 원뿔모양의 수형을 이루고 일년생가지는 녹색이며 털이 없고 윤기가 난다.
용도
• 나무껍질에 상처를 주면 노란색의 수액이 나오는데 이 수액을 가구의 도료로 사용하고 있다.
• 상록성의 아름다운 수형은 자연경관 조성에 좋은 재료가 되며, 수지는 약용으로 사용한다.
• 약용으로 사용될 경우 효능은 거풍습, 활혈에 좋다.
적갈색의 칠액이 나오는 옻나무와 함께 황칠나무는 옛날부터 귀하게 취급되어 황금색을 내는 우리의 전통 도료로서 다른 천연 도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품질이 우수하다.
목재나 금속, 유리 등에 광범위하게 쓰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조나 부착성이 아주 좋고, 진정 · 안정 효과가 있는 물질이 들어 있어 칠을 하고 나서는 상쾌한 안식향이 발산되기도 한다.
황금빛 찬란한 천연 도료로 고품격의 화장도료로 적격이고, 금속공예 중 은 공예품에 칠하면 은빛이 찬란한 황금색으로 되기 때문에 가치를 한층 높일 수도 있다.
물에는 희석되지 않아서 옛날 사람들은 물에 넣어 황칠을 보관했었다.
고려사에 보면 조정의 사정이 여의치 못해 몽고에 조공을 바칠 때 다른 물품은 보내지 못해도 가장 귀한 금칠만은 몇 항아리를 보냈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곧 황칠이다.
『조선왕조실록』(1794년)에 호남지방 관리인 서용보라는 사람이 조정에 올린 글 중에서 이런 글이 있다.
“완도를 중심으로 인근에 황칠이 생산되나 금년에 기상재해가 있어서 황칠나무가 많이 죽었을뿐더러 징수량이 너무 많아서 백성이 무리하게 채취하느라 나무가 상하게 되니 이 점을 유념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이 200년 전부터 황칠나무가 널리 재배되고 이용되어 왔으나 지금은 인공 합성 도료의 등장으로 인해 거의 맥이 끊겨 오다가 최근 전통 황칠의 우수성을 알게 되어 그것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칠은 옻나무 진에서 얻어지는 옻으로 짙은 적갈색을 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금은 없어져 버린 칠공예의 한 기법으로 황금빛이 나는 황칠이 있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인 황금빛을 낼 수 있는 황칠은 바로 황칠나무에서 얻어진다.
일부에서는 황금으로 도금한 것 같다 하여 아예 금칠(金漆)이라 부르기도 한다.
황칠나무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本紀)〉 ‘보장왕 4년(645) 조’에 등장한다.
이해 봄, 당 태종은 명장 이세적을 선봉으로 삼아 직접 요동성을 공격하여 12일 만에 함락시킨다.
이 작전에 “백제는 금 옻칠한 갑옷(金髹鎧)을 바치고 군사를 파견했다. 태종이 이세적과 만날 때 갑옷의 광채가 햇빛에 번쩍거렸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금 옻칠은 바로 황칠을 말한다.
실증자료도 있다.
2007년 경주 황남동 통일신라시대 유적지에서 나온 항아리 밑바닥의 유기물 덩어리를 분석하였더니 황칠이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황칠은 중국 쪽에 더 잘 알려졌다.
《계림지(鷄林志)》라는 고문헌에 보면 “고려 황칠은 섬에서 나고 본래 백제에서 산출된다.
절강성 사람들은 신라칠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였으며, 《해동역사(海東繹史)》 에는 “백제 서남해에서 나며 기물에 칠하면 황금색이 되고 휘황한 광채는 눈을 부시게 한다”라고 하여 삼국시대부터 귀중한 특산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황칠을 직접 구하기 어려웠던 발해는 서기 777년에 사신 사도몽을 보내 일본 황칠을 수입하기도 했다.
고려에 들어서는 원나라에서 황칠을 보내달라는 요구가 여러 번 있었다.
원종 12년(1271)에 왕은 “우리나라가 저축하였던 황칠은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올 때 모두 잃어버렸으며 그 산지는 남해 바다의 섬들이다. 그런데 요사이는 역적들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으니 앞으로 틈을 보아서 가져다가 보내겠다. 우선 가지고 있는 열 항아리를 먼저 보낸다. 그 역즙(瀝汁)을 만드는 장인은 황칠이 산출되는 지방에서 징발하여 보내겠다”라고 하였으며, 이어서 충렬왕 2년(1276)과 8년(1282)에는 직접 사신을 파견하여 황칠을 가져다주었다.
조선왕조 때는 정조 18년(1794)에 호남 위유사 서용보가 올린 글 중에 “완도의 황칠은 근년 산출은 점점 전보다 못한데도 추가로 징수하는 것이 해마다 더 늘어나고, 아전들의 농간이 극심하니 엄격히 규제하여 섬 백성들의 민폐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황칠과 관련된 기록은 잠깐 훑어보아도 이와 같이 수없이 나온다.
불과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장 품질 좋은 황칠 생산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안타깝게도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백성들이 심기를 꺼려 하여 아예 맥이 끊겨 버렸다.
최근에 들어서야 전통 황칠을 다시 살리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황칠나무는 남부 해안 및 섬 지방에서 자라는 늘푸른 넓은 잎 큰 나무로 키가 15미터에 이른다.
껍질은 갈라지지 않아 매끄럽고 어린 가지는 초록빛이며 윤기가 난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며 처음에는 3~5개로 갈라지나 나이를 먹으면서 긴 타원형에 톱니가 없는 보통 모양의 잎만 남는다.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6월에 흰빛으로 피며, 타원형의 열매는 30~40여 개씩 공처럼 모여 달리고 10월에 검게 익는다.
황칠나무에는 우리나라 천여 종의 나무 중에서 유일하게 ‘수평수지구(水平樹脂溝)’라는 세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황칠은 음력 6월쯤 나무줄기에 칼로 금을 그어서 채취한다. 매우 적은 양이 나오며 처음에는 우윳빛이나 공기 중에서 산화되면 황색이 된다.
황칠을 하면 금빛을 띠고 있으면서도 투명하여 바탕의 나뭇결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금빛을 더욱 강하게 내기 위하여 먼저 치자 물을 올린 다음 황칠로 마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