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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와 백흥암·운부암 중앙암

초암 정만순 2019. 3. 27. 09:06



은해사와 백흥암·운부암 중앙암











일제강점기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조선 4대 부찰()의 하나 그리고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 역사가 신라 헌덕왕 1년(809)까지 거슬러 오르는 은해사()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 개나 거느린, 등 너머 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 안의 절집들을 대표하는 큰 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광객 아닌 답사객이라면 이렇듯 ‘화려한’ 명성에 주눅들지 말고 은해사 큰절은 담 너머로 대충 바라보고 산내암자의 어느 곳으로 곧장 발길을 향해도 무방하다.

큰 절집이기는 해도 아름다운 절집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건물들을 고치고 옮기고 새로 지은 까닭이다.

그것도 바람직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하여 옹호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불필요하게 크고 뿔뿔이 흩어져 따로 노는 건물들, 뜻없이 넓기만 해 휑한 마당, 이런 것들이 빚어내는 황당한 느낌 따위가 전부다.


1920년대 후반의 은해사 전경

1920년대 후반의 은해사 전경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을 대표하는 큰절이나 지금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고풍스런 느낌이 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은해사에 발걸음을 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는 있다.

추사의 글씨가 있기 때문이다.

추사는 1848년 12월 제주도 귀양길에서 풀려나 이듬해 64세의 나이로 한양에 돌아온다.

그리고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이 무렵, 불과 2년 남짓의 짧은 서울 생활 동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그의 글씨가 다섯 점이나 은해사에 전해진다.

1862년 혼허 지조( )스님이 지은 「은해사중건기」()를 보면 “대웅전·보화루·불광각 세 편액은 모두 추사 김상공()의 묵묘()”라고 했으며, 그뒤 1879년 당시 영천군수이던 이학래()가 쓴 「은해사연혁변」(沿)에는 “문의 편액인 ‘’, 불당()의 ‘殿’, 종각의 ‘’가 모두 추사 김시랑()의 글씨이며 노전(殿)의 ‘’이란 글씨 또한 추사의 예서이다”라고 했다.

이들이 말한 추사의 글씨를 은해사는 지금도 빠짐없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대웅전

대웅전헌종 13년(1847)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로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그 가운데 하나인 ‘은해사’의 글씨를 이렇게 평했다.

“무르익을 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아쉽게도 이 글씨 ‘은해사’와 ‘불광각’, ‘일로향각’의 세 편액은 그것이 걸렸던 건물들이 중건 또는 이전되는 과정에 있는 까닭에 절에서 따로 보관하고 있으므로 당장은 볼 수가 없다.

그래도 은해사를 들어서면 두 점의 추사 글씨를 차례로 음미하는 안복을 누릴 수 있는 셈이다.

더구나 그 글씨들은 9년간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통해 온갖 신산을 겪으며 한결 무르익고 원만해진 추사의 솜씨와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 차츰 노성함을 뛰어넘어 무심함의 경지로 다가가는 그런 글씨들인 것이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에 있다. 선본사에서 다시 갓바위슈퍼 앞으로 나와 왼쪽으로 난 6번 시도로를 따라 3.9㎞ 가면 985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왼쪽 의성 방면으로 난 985번 지방도로를 따라 5.3㎞ 가면 길 왼쪽에 한화에너지 88 제5주유소가 있는 청통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왼쪽 2번 시도로를 따라 2.2㎞ 가면 은해사 입구 대형주차장이 나온다. 은해사에서 산으로 계속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1.1㎞ 가면 두 갈래로 길이 나뉜다. 왼쪽 길을 따라 1.5㎞ 가면 백흥암에 닿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2.5㎞ 가면 운부암에 이른다. 승용차는 은해사·백흥암·운부암까지 갈 수 있으나 대형버스는 은해사 입구 주차장에 주차해야 한다. 하양에서 은해사로 다니는 311번 좌석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영천에서 은해사까지도 시내버스가 하루 9회 있다. 백흥암과 운부암까지는 은해사에서부터 걸어가야 한다. 은해사 앞 주차장 주변에는 음식점과 민박 등이 있다.


[지도] 은해사와 백흥암·운부암 가는 길

[지도] 은해사와 백흥암·운부암 가는 길

백흥암

절집 안에서 쓰는 말에 ‘청정수월도량’()이라는 게 있다. 기도나 불공을 드릴 때 부처님께 고하는 축원에서 빠지지 않고 읊조려지는 구절로, 그 절이 맑고 깨끗하기가 물에 비친 달과 같다는 뜻의 말이다. 어느 절에서나 이 말을 수시로 되뇌고 있지만 청정수월도량이 말처럼 흔한 것은 아니다. 백흥암은 그런 드문 절집 가운데 하나다. 은해사의 북서쪽 골짜기 깊숙이 들어앉은 이 조용하고 조촐하고 정갈한 암자는 언제나 수십 명 이상이 모여 노동과 수행에 여념이 없는 비구니스님들의 수행처이다.


백흥암

백흥암심검당과 진영각의 처마가 극락전의 귀기둥 안까지 들어올 만큼 실제 공간은 좁은데도 전혀 답답하지가 않다.


비단 바탕에 수를 놓은 격으로 백흥암은 많은 보물들을 갈무리하고 있다.

보물 제790호로 1643년 중건된 극락전은 단청이 곱게 날아 은은한 고풍이 살아나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이다.

물빛 하늘을 나는 청자 속의 학처럼 그 자태나 처마선이 고상하고 격조 높다.

극락전 안의 수미단은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불단 가운데 그 구성과 조각솜씨가 가장 빼어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만을 따로 떼어 극락전보다 16년이나 앞선 1968년 보물 제486호로 지정하였으니 그 가치나 아름다움은 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높이 125㎝ 폭 413㎝로 상하대 각 1단, 중대 3단의 5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대와 하대에 갖가지 짐승과 꽃과 새들이 부조되어 있다.

그밖에 후불탱화, 1673년 개수한 것으로 추측되는 단청과 벽화, 아미타삼존 등이 모두 나름대로 품격을 갖춘 보배들이다.

매우 안타깝게도 1762년 제작되어 채색과 구성과 화풍이 독특하여 수작으로 꼽히던 감로탱()은 몇 년 전 도난당해 모사본을 걸어두었다.

그리고 도난의 되풀이를 막기 위해 법당 안쪽으로 천장 가까이에 이르는 철창을 둘렀다.

이 점을 제쳐둔다면 극락전 안은 보물로 그득한 셈이다.


극락전 내부

극락전 내부법당 안에 있는 수미단은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 불단 가운데 그 구성과 조각솜씨가 가장 빼어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된다.



수미단 조각의 일부

수미단 조각의 일부거북등을 하고 있는 상상 속의 사람이 보주를 받들고 꽃밭을 걸어가고 있다.


진영각의 편액과 주련은 추사의 솜씨이다.

’(십홀방장)이란 편액은 ‘홀() 열 개를 이어놓은 길이, 곧 사방 1장(=10척) 되는 작은 방’을 의미하니 큰 산중의 어른인 방장()이나 그가 쓰는 방을 가리킨다. 주련을 통해 이 말의 유래를 거슬러 오를 수 있다.



사방 열 자 유마()의 방


구백만 보살,


삼만 이천 사자좌를


들이고도 비좁지 않고


한 바루 밥 나누어서도


가없는 시방 대중 배불리리라


중국 송대의 문장가 소식()의 글을 옮긴 것으로 그 출전은 줄여서 ‘유마경’으로 부르는 『유마힐소설경』()이다.

경전의 주인공 유마힐 거사는 부처님 당시의 유명한 재가신자. 그가 병을 핑계로 문수보살·가섭존자 등 기라성 같은 많은 불제자들의 문병을 유도하여 자신의 방에서 진리에 대해 일대 토론을 벌인다.

유마거사의 입을 통해 “중생이 앓기 때문에 보살이 앓는다”는 유명한 명제를 낳은 모임이 이것이다.

이 자리에 무수한 보살과 천신과 불제자들이 동참하여 유마거사의 사방 1장 되는 좁은 방에 900만 보살이 들어서고 3만 2천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도 오히려 자리가 넉넉했다는 얘기가 『유마경』에 실려 있다.

편액과 주련의 내용이 똑떨어지게 서로 호응하는 맛도 그만이지만, 특히 ‘십홀방장’의 글씨는 태산이 실려도 끄떡없을 만큼 굳건하고 힘이 가득하다.

역시 추사가 해배()된 뒤 어느 때 쓴 것으로 본다.

극락전·심검당·보화루·진영각이 이루는 네모진 공간은 어쩌면 백흥암이 베푸는 공간미학의 백미인지도 모른다.

극락전은 단청을 입히고 나머지 셋은 백골로 두었지만 네 건물 모두 차분한 고색이 서려 분위기는 그윽하고, 심검당과 진영각의 처마가 극락전 귀기둥 안쪽으로 들어올 만큼 현실의 공간은 비좁은데 느낌은 전혀 답답하지 않다.

여기 안뜰에 서면 저절로 고요하고 단정한 무욕의 세계로 이끌릴 뿐이다.

유마의 방처럼 스무 평 남짓한 공간이지만 그 이상의 깊이와 넓이를 지녔다.

언제나 수십 명이 모여 정진에 여념이 없지만 이곳은 늘 적요하고 정밀()하기만 하다.

반야의 칼을 벼리는 ‘지혜의 품’이다.

백흥암은 신라 경문왕 9년(869)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 백지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명종 1년(1546) 천교화상()이 백흥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은해사에서 팔공산에 이르는 산세가 용이 등천하는 기세이므로 등 너머 운부암()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더욱 많이 일어나서 용의 승천을 돕도록 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중종 15년(1520), 암자 부근의 태실봉에는 뒷날 인종이 되는 왕세자의 태가 봉안된다.

이로써 백흥암은 ‘막중한 것을 수호하는 곳’()으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고, 정조 22년에는 완문을 하사받아 관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태실의 수호와 완문의 수장을 계기로 백흥암은 그 모습을 일신하고 사세를 탈없이 유지하게 되었던 듯하다.

아쉽게도 백흥암은 평소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1년 중 다만 하루 사월 초파일에만 출입이 허용된다.

달리 생각하면 이 점은 아쉬워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귀한 물건은 귀하게 다루고 곱게 지키고 가꾸어야 더 귀해지는 법이다.

흔전만전 쓸 수 있다면 누가 그 귀함을 알며 어떻게 그 귀함을 오래 지킬 수 있으랴. 게다가 그곳에는 열심히 일하고 힘써 지혜를 닦는 수행자들이 늘 수십 명 이상 모여 살지 않는가.

그러니 한 해에 한 번 백흥암의 대문이 열리는 일은 조금 불편하기는 할망정 불만스러워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깨어지기 쉬운 옛 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런 접근은 오히려 우리의 배려와 예의인지도 모른다.

조선 초 시문으로 문명이 높았던 유방선(, 1388~1443)은 「백지사」()라는 시의 말미를 이렇게 맺고 있다.

“방 따뜻하여 새벽잠 안온하고()/등불 밝아 밤 이야기 길어라()/스님네 마음씨 속되지 않아()/ 반 달이 넘도록 돌아갈 줄 모르네().” 백흥암은 그때의 분위기가 남은 고풍한 절이다.

어딘가에 우물이 감추어져 있어 사막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절다운 절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드문 이 시대에 백흥암은 달고 시원한 감로수가 샘솟는 옛 샘 같은 절이다.


운부암

백흥암에서 산등성이 하나 너머에 운부암()이 있다.

신라 진덕여왕 5년(651) 의상()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기도 하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을 연 홍척국사()가 초창했다는 말도 있어 그 시작을 종잡기 어렵다.

애초의 이름은 운부사(). 절을 처음 지을 때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 떴다 하여 그렇게 이름지었다 한다.

유방선의 「운부사」라는 시에 “홀로 찾은 운부사()/선방 고요하여 마음 붙일 만하네()”라는 구절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운부사’로 소개되어 있으니 16세기 초까지는 운부사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은해사가 태실의 수호사찰로 규모가 커지면서 그 산내암자로 사격이 낮춰진 듯하다.

본전인 원통전, 현재는 요사채로 쓰이는 좌우의 심검당과 우의당() 그리고 정면의 누각인 보화루로 이루어진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암자이다.

 ‘고사무거승’()이라더니 절을 지키는 스님네가 없는 듯 집채들에 퇴락의 기미가 짙다.

누각의 이름이 ‘보화루’이니 큰 절인 은해사, 백흥암 그리고 운부암의 경우가 모두 같다.

짐작으로는 그 뜻을 ‘화엄경()을 보배로 여긴다()’로 풀 수 있으니 세 곳 모두 『화엄경』을 사상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고, 실제로 영·정조대에 걸쳐 화엄교학으로 이름을 떨치던 영파 성규( , 1728~1812)스님이 이 산중에 머물기도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꼭 그런지는 모를 일이다.

원통전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좌상은 보물 제514호이다.

높이 102㎝에 이르는, 1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불상으로 커다란 보관과 온몸을 덮는 복잡한 영락장식이 특징적이다.

화려할지는 몰라도 정교하거나 섬세하지는 않은 보관은 얼굴이나 몸체에 비해 지나치게 커 무거워 보이며 불상의 느낌을 둔하게 만든다.

가슴은 물론 두 어깨와 팔, 배, 양쪽 무릎과 다리에까지 골고루 늘어진 영락들도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기는 하나 생동감도 없고 입체적이지도 않아 그야말로 장식을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커다란 보관이나 어지러운 영락장식은 원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은 고려 후기 불상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 잔재가 원통전 불상에까지 남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청동보살좌상은 은해사의 운부암 원통전(殿) 안에 있는 주존불이며 보관()은 따로 나무로 만들어 얹었고 꽃무늬·화염무늬[]·극락조 등으로 장식하였다.

불상의 높이는 1.02m, 재료는 청동이다.

얼굴은 사각형으로 넓적하며 무표정하고 눈은 가늘고 코와 입은 작은 편이다.

결가부좌()한 하체는 역시 굴곡이 없이 수평으로 처리되었으며 천의()는 양어깨를 덮은 두꺼운 통견()이며 법의()와 유사하다.

가슴·배·어깨·하체 등에 강조한 전신의 달개[] 장식은 장엄하다.

목에는 형식적으로 삼도()를 표현하였고 가슴 밑에는 띠로 묶은 매듭이 있으며 옷주름은 양 다리에 대칭으로 흘러내려져 있는데, 조선 초기에 유행한 화려한 장식에 단엄한 보살상이다.
이 관음보살상은 아담한 크기의 안정된 자세로 조선시대 보살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반영한 작품이다.


청동관세음보살좌상

청동관세음보살좌상커다란 보관과 온몸을 덮고 있는 복잡한 영락장식이 특징적이다.



환재 박규수( , 1807~1877)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김옥균·유길준·박영효·김윤식 등 개화파의 선봉에 섰던 인물들을 길러낸 개화사상가이다.

운부암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그의 글씨 두 점이 이 암자에 전해진다.

원통전 편액과 심검당에 걸린 ‘’(운부난야).

원통전 편액은 단아정중하고, 심검당의 그것은 부드럽고 넉넉하되 묵직한 무게가 담겨 있다.

두 편액에 ‘계해년 한겨울’()이라 방서()했으니 이 해가 1863년, 아마도 박규수가 철종 13년(1862)의 임술농민항쟁 때 안핵사(使)로 임명되어 사건 실상의 조사와 수습을 맡아 경상도를 오르내리던 무렵에 쓴 듯하다.

박규수의 글도 한 점 운부암에 남아 있다.

보화루 안의 현판에 새겨진 ‘팔봉대사진찬’()이 그것이다.

글의 말미에 ‘ ’(환재거사 박규수)라는 관지()가 있지만 글씨에 밝은 분의 얘기로는 틀림없이 그의 글씨는 아니라고 한다.

아마도 그의 글을 받아다 글씨에 능한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쓴 듯하다.

비록 환재의 솜씨는 아니지만 미늘 달린 창처럼 날카롭고 꺼끌꺼끌한 글씨가 여간 아니다.

진영()에 있어야 할 진찬이 어떻게 해서 현판으로 걸렸는지, 또 팔봉대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팔봉대사진찬’은 그 내용이 재미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하다.


길게 선 것은 코 가로 누운 것은 눈썹이요,
모난 입 튀어나온 광대뼈가 닮지 않은 것이 없다.
문도들이 와서 보고 ‘진짜 우리 스님’이라 한다.
그림 그린 이가 크게 웃으며 여러 스님들에게 말했다.
그림으로야 아무래도 이 정도일 뿐이니
그대들 스승을 진정 보고자 한다면 어찌 그림 밖에서 구하지 않는고.
물결 없는 맑은 못에 둥두렷한 가을달이요,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한 떼의 두루미로다.

, .
. .
, .
, .

보화루의 편액은 해관 유한익( , 1844~1923)의 글씨이다.

워낙 추사·환재의 글씨에 눌려서 이야기 대상에서 빠지기 일쑤지만 요즘 서예가들의 글씨에 비하면 격이 다르게 선이 굵은 글씨이다.

은해사·백흥암·운부암은 글씨 구경만으로도 자못 눈과 마음이 바빠진다.


중앙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자 산내 암자이다.

 신라 때 원효대사가 토굴을 짓고 정진하던 곳에 834년(신라 광덕 9) 심지왕사()가 창건하였다.

은해사 뒤편으로 산길을 오르다 백련암을 지나 1시간 정도 오르면 팔공산 동쪽편 칠부능선에 있는 자그마한 암자로서 은해사에서 4.9㎞ 떨어져 있다.

커다란 돌 사이를 지나가야 절에 이를 수 있으므로 '돌구멍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돌구멍을 지나면 바위 틈의 좁은 공간에 법당과 요사채가 있다.

돌구멍절이라는 별칭처럼 여러 형태의 돌구멍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극락굴()이 유명하다.

굴이라기보다는 돌 틈이라고 하는 것이 알맞을 이곳은 보통 몸집의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공간밖에 없어 몸집이 큰 사람은 선뜻 들어서기 어렵다.

힘들게 굴을 빠져나오면서 느끼는 쾌감이 극락을 다녀온 기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서쪽으로 약 200m 지점에 바위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려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만년송()을 비롯하여 삼국시대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화랑시절 이곳에서 심신을 단련하며 물을 마신 터라고 전하는 장군수(), 암자로 떨어지려 하던 바위가 부처의 신력으로 멈추었다는 전설이 깃든 건들바위 등 명소가 있다.

암자 뒤편의 산중턱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32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3층 석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