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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林寺

초암 정만순 2018. 11. 23. 22:50



松林寺


송림사, 그 이름을 미루어 짐작하면 솔숲이 퍽도 장했으련만 지금은 이름에 값하는 송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아무 절집에나 그 입새에 크든 작든, 길든 짧든 있게 마련인 숲과 숲길도 여기서는 볼 수가 없다.

팔공산 순환도로의 일부가 되는 908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길 옆 이런저런 식당이나 가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아무 예고도 없이 자태를 내보이는 게 송림사다.

길과 나란히 길고 높직하게 쌓은 돌담만이 절과 찻길을 가르는 유일한 구조물이다.

어느 한적한 절집을 둘렀더라면 퍽도 생색이 났을 이 돌담장은 그러나 쉴새없이 오가는 자동차들의 소음을 가리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송림사 전경

송림사 전경비교적 평탄하고 넓직한 터에 자리잡은 송림사는 그 역사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 된 고찰이다.


돌담장 안으로 들어서면 비교적 평탄하고 널찍한 터에 자리한 절 모습이 한눈에 잡힌다. 뜰 가운데 솟은 유명한 오층전탑 뒤로 삼성각과 산신각을 옆으로 거느린 대웅전이 의젓하고, 명부전 또한 탑을 바라보며 서향하여 앉았다. 그 주위로 새로 지은 몇 채의 건물들이 드문드문 제 몫만큼의 터를 차지하고 섰고, 탑의 왼쪽에 비켜선 석등을 비롯한 깨진 배례석, 또 다른 석등 부재들, 부도의 몸돌, 그밖의 해묵은 석물들이 마당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신라시대까지 절의 역사가 거슬러 오르는 송림사의 오늘은 이것이 전부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을까?

절측에서는 신라 눌지왕 때 아도스님이 절을 창건했다고 말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다. 공식적으로는 진흥왕 5년(544) 진나라에서 귀국한 명관()스님이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 절을 창건하고 탑도 세웠다고 알려지고 있다. 고려 선종 9년(1092)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중창된 송림사는 고종 22년(1235) 몽골병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다. 복구된 절은 1597년 임진왜란 당시 왜병들의 방화로 소실, 재차 빈터만 남게 된다. 그뒤 숙종 12년(1686) 기성대사(), 철종 9년(1858) 영추()스님에 의한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전란을 겪고 홍역을 치를 때마다 차츰 사세()가 기울어왔을 테니 지금의 모습이 크게 이상할 것도 없겠다.

이렇듯 두드러지는 것 없는 송림사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향하는 까닭은 오층전탑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니면서 요모조모 뜯어보면 재미있는 것이 대웅전이다.

숙종이 글씨를 쓴 커다란 편액을 이마에 붙인 송림사 대웅전은 같은 임금 12년, 곧 1686년에 세워졌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무미건조하지만 그 내용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썩 재미있다.

대웅전

대웅전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맞배지붕의 건물로 건물의 구조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썩 재미있게 지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보통 우리나라 목조건축에서 칸과 칸, 곧 기둥과 기둥 사이의 너비는 대체로 비슷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송림사 대웅전 앞뒷면은 이런 일반적인 구조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한가운데 칸인 어간()은 넓고, 어간에 이어지는 좌우의 협간()은 이보다 좁고, 가장 구석이 되는 양쪽 툇간은 아주 좁아져서 그 비율이 대략 3:2:1 정도이다. 이에 따라 문짝도 어간에 넷, 협간에 셋, 그리고 툇간에 하나씩을 달았는데 그 구실에 차이가 있어 묘미가 있다. 어간의 문짝 넷 가운데 드나듦에 이용되는 것은 안으로 열리는 가운데 두 짝의 쌍여닫이뿐이고, 나머지 두 짝은 채광의 구실만을 하는 붙박이이다. 좌우 협간은 가운데 문짝이 안여닫이, 양 옆의 문짝은 고정되어 광창으로만 쓰인다. 툇간의 외짝문 또한 여닫을 수는 없고 채광창으로만 쓰임새가 한정되어 있다.

앞면 문짝 열두 개의 꾸밈새도 다양한 변주를 한다. 가운데 두 짝은 빗살문, 양 옆의 두 짝은 소슬꽃살문이 어간 문짝의 꾸밈이라면, 협간은 가운데 안여닫이가 소슬빗살문, 나머지 두 짝이 빗살문이다. 반면 툇간의 외짝문은 또 달라 정자살문이니, 문 열두 짝이 모두 닫혔을 때 보면 문살의 변화가 다기()하여 꽃살문이 화려한 어느 법당 못지않게 다채로우면서도 점잖은 품위를 겸하여 갖추고 있다. 어간에 둘, 협간에 각각 하나씩 남아 있는 신방목1)도 그냥 지나치기엔 아깝다. 원래 벽 중간에 세운 문설주, 곧 벽선()을 받쳤던 신방목이 지금은 벽선이 없어진 채 양 볼에 새겨진 구수한 태극무늬와 연꽃무늬를 달고 하인방2)에 꽂혀 있다.

신방목에 새겨진 연꽃무늬

신방목에 새겨진 연꽃무늬대웅전 정면 어간의 문설주를 받쳤던 신방목에는 질박한 태극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다포계 맞배지붕의 구성양식도 흔한 것은 아니다. 공포의 짜임이 기둥 위에만 있지 않고 차례로 기둥과 기둥을 건너지르는 창방과 평방 위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놓이는 다포계 공포양식은 대체로 팔작지붕이나 우진각지붕의 건축에서 채택한다. 맞배지붕의 경우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두는 주심포양식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이 집은 맞배지붕이면서 다포계 공포를 짜 올려 두 양식의 조화를 시도하고 있다. 밖으로 이출목3), 안으로 삼출목으로 짜인 공포가 놓인 위치도 미묘하다. 툇간의 평방 위에는 공포가 없고 협간에는 하나, 어간에는 두 개가 놓여 간격을 맞추고 있다. 기둥 사이의 거리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고안된, 자연스러우면서도 재미있는 발상이다.

대웅전의 옆면도 여러 가지로 흥미롭다. 다포계 맞배지붕 양식을 채택했을 경우 옆면 처리는 대개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를 취한다. 앞뒷면과 마찬가지로 공포를 짜 올리는 다포양식이거나, 아니면 안쪽의 두 기둥을 귀기둥보다 높은 고주4)로 세워 마감하는 주심포양식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건물에서는 두 양식의 절충이 시도되고 있다. 기둥 넷을 평주로 세우고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가로지른 것까지는 앞면과 동일한 다포계양식을 따르면서도 그 위에 놓일 공포는 생략하여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수법은 고식에 속하며 보기 드문 예가 된다. 기둥 사이의 폭도 고르게 분할되었다. 이 또한 쉽게 볼 수 있는 기법은 아니니, 대개는 가운데칸이 양 옆칸보다 넓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옆면의 앞칸에는 띠살문을 달아 출입에 이용하고 그 위에 칸을 꽉 채우는 긴 빗살무늬 교창5)을 얹어 앞면의 문짝과는 또 다른 변화를 보이는 것도 눈에 띄는 점이다.

대웅전 옆면

대웅전 옆면대웅전의 앞면처럼 옆면도 쉽게 볼 수 없는 형식으로 꾸몄다.


건물 내부에서는 한결 이채로운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여느 법당과 달리 불단이 앞으로 돌출하여 그 앞의 공간이 아주 협소한 반면 상대적으로 불단 뒷면은 너른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는데, 이는 불단의 후불벽을 이루는 고주가 건물의 중앙선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매우 드물다. 건물의 평면을 반으로 줄여서 쓰는 결과가 되므로 좀처럼 택하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건축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는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아니면 집을 지은 대목이 무슨 다른 의도를 가졌었는지 궁금증이 솔솔 피어오르는 묘한 구조다. 낮은 불단에 모셔진 삼존불은 국내에서는 제일 큰 목불이라고 한다. 그 크기나 신앙적 관점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예술적 안목으로 본다면 그리 후한 점수를 주기는 곤란한 불상들이지 싶다.

이것저것 살피느라 분주하던 눈도 쉴 겸 밖으로 나와 법당을 한 바퀴 돌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처마끝에 나란히 걸린 막새기와의 연꽃무늬는 투박스럽고 모란꽃무늬는 퍽도 복스럽다. 그 위로 지붕을 가득 덮은 기와들, 큼직큼직하고 두툼하여 후덕스럽고 마른 이끼가 고르게 덮여 연청빛 고색이 진득이 배었다. 아, 이게 조선기와의 맛이려니 하는 신음이 절로 새어나온다.

대웅전과 같은 해에 건립된 명부전 역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지만, 대웅전과 달리 홑처마에 주심포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 집도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앞면의 문치레가 다양하다. 어간에는 빗살문 세 짝을 달았지만 여닫을 수 있는 것은 가운데의 안여닫이뿐이다. 양쪽 협간에는 기둥 중간에 중방을 질러 그 위에 문얼굴을 내고 두 짝의 정자살창을 내었다. 가장자리 좌우 툇간에는 벽체 중간쯤에 교창을 닮은 빗살문 붙박이 광창을 두었다. 정면 5칸이 이처럼 변화로우니 보는 이의 눈이 지루하지 않다.

명부전

명부전대웅전과 같은 해에 지어진 건물로 대웅전처럼 앞면의 문치레가 다양하다.


그림솜씨를 접어둔다면 명부전 앞면을 제외한 3면 벽에 그려진 지옥도의 내용은 대단히 계몽적이다. 염라대왕을 포함한 저승의 판관, 시왕들이 죄의 경중을 심판하고 그에 따른 갖가지 고통을 묘사한 그림들이지만 생각만큼 끔찍하거나 무시무시해 보이지 않는 것은 ‘조잡한’ 그림솜씨 탓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저승에서 시왕이 죄를 심판한다는 개념은 불교의 정통적인 사상은 아니며 도교의 강한 영향과 우리 고유의 내세관이 혼합된 형태로 불교 속에 이입된 것이다. 절집 안 어디에나 보이는 명부전은 그것이 외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만해스님 같은 이는 이를 저급한 불교문화의 한 예로 꼽으면서 절집 안에서 추방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또한 불교 속에 스며든 우리 민간신앙의 한 흐름이니 막무가내로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송림사에서는 명부전 벽화가 우리 조상들의 서민적인 정서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 있는 유산일지도 모른다.

명부전의 벽화

명부전의 벽화명부전 정면을 제외한 3면의 벽에는 우리 고유의 내세관과 도교의 영향을 받은 지옥도가 그려져 있다.


오층전탑 서편에 오롯이 서 있는 석등은 간주석이 지나치게 세장()해 보이고 화사석도 중대석에 비해 너무 커서 원래의 모습인지 의심스럽다. 신라시대의 양식을 보이는 하대석과 중대석, 옥개석 등에서 송림사의 긴 역사를 더듬을 수 있다면 그대로 좋을 듯하다. 그밖의 온전치 못한 석물들은 마당 여기저기서 정원석 하나 정도의 구실만을 해내고 있다.

석등

석등석등의 각 부분들이 신라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어 송림사의 긴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송림사의 부도밭은 절 밖에 있다. 절문을 나서 담장을 끼고 길을 거슬러 200m쯤 가면 길가에 쌓은 축대 위에 작고 낡은 비각이 하나 섰고 그 옆으로 윗부분이 달아난 석종형 부도 네 기가 나란하다. 부도밭이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 송림사의 사역()이 많이 줄어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각 안에 옹색하게 들어선 비는 대웅전과 명부전을 건립한 기성대사의 비이다. 1772년에 세웠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에 있다. 노석동 마애불상군에서 다시 왜관으로 나가 왜관교를 건너 왜관 읍내로 들어서면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앞으로 난 길을 따라 0.5㎞ 가면 나오는 왜관병원 앞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908번 지방도로를 따라 15.3㎞ 가면 중앙고속도로 다부동IC와 함께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길 오른쪽에 있다. 전적기념관에는 넓은 주차장과 매점 등이 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5번 국도를 따라 약 8.5㎞ 가면 동명 면소재지인 금암리 입구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 우회도로를 따라 0.5㎞ 가면 나오는 사거리에서 왼쪽 팔공산으로 가는 908번 지방도로를 타고 2.4㎞ 가면 길 왼쪽에 송림사가 나온다.

송림사 입구에는 대형버스도 여러 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왜관에서 직접 송림사로 가는 대중교통은 없다. 대구남부버스터미널에서 동명을 거쳐 송림사로 가는 16번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절 주변에는 숙식할 곳이 많이 있다.

오층전탑과 그 안에 있던 유물들

만드는 재료에 따라 탑을 분류한다면 기본적으로 목탑, 석탑 그리고 전탑의 세 가지로 나누어지고, 여기에 모전석탑을 덧붙일 수 있다. 목탑은 법주사의 팔상전이나 쌍봉사의 대웅전처럼 목조건축을 여러 층으로 포개 올린 것을 말하고, 석탑은 석가탑이나 다보탑처럼 돌을 다듬고 짜맞추어 만든 탑이다. 이에 비해 전탑은 점토를 가마에서 구워 만든 전(), 즉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만든 탑이다.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가공하여 전탑과 같은 수법으로 세운 석탑이니 모양은 전탑에 가깝고 재료로는 석탑에 속한다.

이 가운데 전탑은 인도에서 발생하여 불교의 전파와 함께 중국으로 전해진 뒤, 건축재로 워낙 벽돌을 즐겨 사용한 중국사람들에 의해 크게 유행을 보게 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지지만 이땅에서는 그리 많은 전탑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현존하는 1,500기 이상의 탑 대부분이 석탑이고 전탑은 오직 다섯 기가 남아 있다는 데서 그 사실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벽돌이라는 재료가 갖는 상대적인 취약성 때문에 만든 것도 전해지는 것도 적겠지만 그보다는 끝내 벽돌과는 생활 속에서 밀착되지 못했던 우리 민족의 기질 탓이 더 컸던 듯싶다.

다섯 기의 전탑 가운데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경북지방에 남아 있고, 그중에서도 안동지방에만 세 기가 분포하고 있다. 잔해 일부가 전해지거나 기록에서 확인되는 전탑을 포함해서 보더라도 안동지방에 전탑이 집중된 현상은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안동지방에 집중적으로 전탑이 세워졌는지 아직 그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 지방에 지질적으로 퇴적암지대가 뒤섞여 있고 화강암지대에는 단층선이 지나는 관계로 탑을 쌓을 만큼 덩어리가 큰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기가 어려운 반면, 벽돌을 구울 수 있는 좋은 개흙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것이 그 이유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널리 공인된 견해는 아니다.

재료가 다르고 축조방법이 같지 않다보니 탑의 외형도 석탑이나 목탑과는 많이 다른 게 전탑이다. 그 형태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나열하면 이렇다. ① 주로 화강암으로 된 단층기단을 채택한다. ② 탑신에는 우주나 탱주의 표시가 없다. ③ 1층 탑신에는 흔히 인왕상 등이 지키는 감실이 마련된다. ④ 지붕에는 아래위로 많은 층단을 두되 언제나 낙수면의 층단이 처마 아래의 층단보다 많다. ⑤ 각 층의 지붕이 짧고 가파르다. ⑥ 5층 이상의 다층탑이 많다. 이러한 특징은 모전석탑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송림사 오층전탑은 앞서 말한 대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다섯 기의 전탑 가운데 하나이고 안동지역에 있지 않은 두 기의 전탑 중 하나이다. 전탑의 일반적인 특징대로 화강암과 토축으로 이루어진 단층기단 위에 탑신을 세웠다. 한 변이 27㎝, 높이 6.2㎝ 되는 방형의 벽돌과 이것을 반으로 나눈 크기의 장방형 벽돌을 사용하여 쌓아올린 탑신은, 두드러지게 육중하고 높은 1층 탑신에서 갑자기 낮고 작아진 2층 탑신으로 올라가면서 급격한 체감을 보인 뒤 그 이상은 체감률이 비슷하다. 1959년 탑을 해체·수리할 때 밝혀진 바에 따르면 1층 탑신에는 원래 감실이 있었다고 하나 과거 어느 땐가 막아버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벽돌을 한 장씩 나란히 놓아 처마를 삼은 옥개는 1층부터 차례로 처마 아래의 받침은 9·7·7·6·4단으로, 낙수면의 층단은 11·9·8·7·5단으로 줄어들고 있다.

오층전탑

오층전탑금동제 상륜부를 갖춘 거대한 탑으로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지만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을 크게 잃지 않은 탑이다.


탑신 위에는 상륜부가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그 구성을 보면 벽돌로 네모지게 쌓아올라가다가 네 귀에 풍령(풍경)이 달린 동판을 얹어 노반으로 삼은 위에, 금동으로 만든 복발, 앙화, 세 개의 보륜, 용차, 보주가 찰주에 차례로 꽂혀 있다. 찰주는 특이하게 나무를 다듬어서 겉에 동판을 씌웠다. 높이가 4.5m에 이르는 상륜부는 전탑에 남아 있는 유일한 신라시대 작품이었는데, 지금 것은 1959년 보수하면서 원형대로 모조한 것이다.

송림사 오층전탑은 몇 번인가의 보수가 있었지만 통일신라시대의 형태를 간직한 탑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가 16.13m이고, 보물 제189호이다.

1959년 탑을 해체·수리할 때 세 군데서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상륜부의 복발에서는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청자상감원형합(, 높이 7.8㎝, 입지름 18㎝)이, 2층 탑신에서는 사리장치와 그밖의 유물들이, 그리고 1층 탑신에서는 목불상 2구가 수습되었다.

청자상감원형합은 분묘가 아닌 곳에서 출토된 청자의 예로서도 의미 있고, 또 탑이 고려시대에 보수된 적이 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거두어진 유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사리장치이다. 얇은 금동판을 이용하여 장식이 가득한 집처럼, 또는 화려한 가마처럼 만든 틀의 한가운데 열두 개의 고리가 붙은 녹색 유리잔이 놓이고 그 안에 역시 유리로 만든 녹색의 사리병이 안치된 이 사리장치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것 가운데 아름답기로 몇 손가락 안에 든다. 찬란한 금빛과 조화를 이루며 눈을 황홀하게 하는 녹색 유리잔은 다른 의미로도 중요하다. 일본의 왕실 재산처럼 관리되는 정창원()의 보물들 가운데 유명한 감색() 유리잔이 있는데, 이것이 송림사 사리장치의 유리잔과 대단히 흡사하다. 일본 학계에서는 두 유리잔이 모두 당나라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우리 쪽에서는 백제 양식을 발전시킨 신라의 작품이라 맞서고 있는 문제의 물건이자 고대 한일관계의 비밀 한 자락을 간직한 유물이다. 탑 안에서 거두어진 사리장치를 비롯한 유물들은 일괄해서 보물 제325호로 지정되어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층전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치

오층전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치1959년 탑을 해체·수리할 때 2층 탑신에서 발견된 사리장치로, 우리나라에 전하는 사리장치 중 아름답기로 몇 손가락 안에 든다.


그밖에 탑을 쌓을 때 사용한 벽돌 가운데 고누가 그려진 것도 있다. 벽돌공의 꼬챙이로 그려지고 와공의 불길에 의해 구워져서 조탑공의 손길에 장대한 탑을 이루는 하나의 벽돌로 쌓이기까지 많은 장인들이 힘든 노동의 짬짬이 고누를 두면서 왁자지껄했을 모습을 상상케 하는, 즐거운 미소가 떠오르는 민중적인 유물이다. 사리장치가 들어 있던 석함도 있다. 거북형의 몸체에 뚜껑도 거북 모양이라 마치 큰 거북이 작은 거북을 업고 있는 듯했던 이 석함은, 그러나 지금은 제 뚜껑을 잃고 어색한 새 뚜껑을 등에 얹은 채 대웅전 신방목 곁에서 그 어리무던한 표정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올려다보고 있다.

전탑 벽돌에 그려진 고누

전탑 벽돌에 그려진 고누탑을 해체·수리할 때 나온 벽돌에 그려진 고누로, 장인들의 노동의 즐거움을 상상케 하는 민중적인 유물이다.

사리장치가 들어 있던 석함

사리장치가 들어 있던 석함거북형 몸체에 거북 모양의 뚜껑을 얹고 있었는데 뚜껑을 잃어버려 지금은 새로 만든 뚜껑을 얹은 채 대웅전의 어간 앞에 놓여 있다.


현재 안동지방에 전탑 세 기가 분포하고 있다. 안동댐 입구에 있는 신세동 칠층전탑, 안동역 옆에 있는 동부동 오층전탑, 일직면 조탑리 사과과수원 안에 있는 조탑동 오층전탑이 그것이다. 이들 전탑은 송림사 오층전탑보다 조금 빠른 8세기경의 전탑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