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목본(사)

석류나무

초암 정만순 2018. 7. 20. 10:21



석류나무



마시는석류콜라겐  


소낙비 지나간 어느 아침, 장독대 옆에 핀 붉은 석류꽃이 싱그러운 여름을 알린다.

붉은 비단 주머니를 리본으로 꼭 여며 놓은 것 같다.

석류는 중부 이남의 따뜻한 지방에서 잘 자란다. 남도지방에 운치 있는 석류 고목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석류가 익으면 껍질을 터뜨린다.

그 속에 촘촘히 박힌 투명한 알맹이는 루비처럼 반짝인다.

보석을 간직한 주머니 같다고 하여 사금대(沙金袋)라고 한다.

익어가면서 꼭지 끝을 안으로 오므린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꼭 참겠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다.

고된 시집살이에서 오는 서러움을 남몰래 삭이는 새댁 같은 모습이다.

사랑과 미움과 격정의 여름을 그렇게 다 보내고 찬바람 부는 가을날 끝내 분노를 터뜨린다. 안으로 안으로만 삭여온 서러운 사연들이 부풀어 제 살갗을 찢고 속마음으르 드러낸다.

핏빛으로 멍든 가슴은 산산이 부서져 내린다.

석류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꽃과 열매가 달려있는 기간이 4~5개월이나 된다.

봄철 잎이 돋을 때는 붉은 빛을 띠고 입하(立夏)에 꽃이 피어 중추(中秋)에 붉게 익는다.

가을에 물드는 노란 단풍이 곱고 낙엽이 진 겨울에도 열매는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다. 석류는 열매의 모양이 독특하고 꽃 또한 재미있게 생겼다.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석류의 진기한 모습을 시로 읊었다

그 중에서 조선 초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이 지은 〈안석류(安石榴)〉가 돋보인다.


석류향기 바람 타고 담 넘어 오자

꽃소식 전하는 이 먼 여정부터 생각하네

그대에게 맡김이 어찌 이재만을 꾀함이겠는가

자식이 많다는 것 또한 무엇보다 좋은 일이지

비단 주머니 열고 보니 옥구슬 가득하고

황금방마다 겹겹이 꿀맛을 저장했구나.

바라보는 것만 즐기다 글쓰기마저 잊었는데

수많은 별 매달려 새벽 서리에 반짝이네

安石香風度紛墻

緬榬擄使遠傳芳

封君肯要謨澊利

多子應順表吉祥

錦穀乍開排玉粒

金房重隔貯瓊漿

望來己失文園渴

萬點星懸映曉霜


석류는 붉은 꽃이 피어 빨간 열매로 익고 속에 든 씨껍질도 새빨간 색이다.

석류나무 / 화려한 꽃무리 뒤로  


예로부터 붉은 색은 사귀를 제압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열매마다 주홍을 가득 품고 있는 석류야말로 재액을 막아주는 든든한 믿음이다. 그래서 장독대 옆에는 반드시 한 그루의 석류나무를 심었다. 어른의 보호를 받는 아기라 해도 질병 앞에서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귀자모신(鬼子母神)은 아기를 보호하는 신이다. 귀자모 신당(神堂)에는 반드시 석류나무를 심어 아기와 어머니에게 귀자모의 가호(加護)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게 했다.

석류는 주머니 속에 자잘한 씨를 무수히 보듬고 있다. 그 모양을 자손의 번창으로 보았다. 따라서 시집가는 딸의 혼수품에 석류가 수놓아져 있다면 부귀다남(富貴多男)을 뜻한다. 열매의 맛이 시어서 임산부들이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석류를 많이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도 알고 보면 상당히 과학적인 데가 있다.

《북사(北史)》 위수전(魏收傳)의 석류 기록이다. 제(齊) 나라의 안덕왕 연종(延宗)이 새로 왕비를 맞아들였다. 왕비는 이조수(李祖收)의 딸이었는데 용모가 단정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왕비의 어머니 송씨가 왕께 석류 두 개를 바쳤다. 그러자 왕은 그 뜻을 여러 대신들에게 물어 보았으니 아는 이가 없었다. 왕은 "이런 시어 빠진 과일을 어디다 쓴담." 하고 던져 버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이조수가 입을 열었다. "석류는 알맹이가 많은 과일입니다.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바친 것으로 압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러자 왕은 이조수에게 벼슬을 높여 주고 고운 비단 두 필을 하사하였다.

석류, 불수감(佛手柑), 복숭아를 삼다식물(三多植物)로 여겨 왔다. 삼다란 자식을 많이 두라는 다남(多男), 복을 많이 받으라는 다복(多福),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다수(多壽)가 그것이다. 《장자(莊子)》 천지편(天地篇)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국경을 지키는 관리가 요(堯) 임금에게 축원의 말씀을 올렸다. "성인으로 하여금 부유하게 하시고, 장수하게 하시고, 아들을 많이 낳게 하십시오(使聖人富 使聖人壽 使聖人多男子)"

또 송의 구양수(歐陽修)는 그의 글 〈삼다설(三多說)〉에서 "서왕모(西王母)가 가꾼다는 선도(仙挑)는 삼천 년마다 열매를 맺는다 하여 오래 사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불수감은 그 모양이 부처의 손과 같은데다 불(佛)과 복(福)이 음이 비슷하여 다복(多福)을 뜻하다. 석류 속에는 씨가 많아서 다자(多子)로 해석된다."

삼다사상이 보편화되면서 복숭아, 석류, 불수감은 십장생도(十長生圖)에도 같이 그려지는 수가 있다. 또 이들 삼다식물을 함께 그려 다복(多福), 장수(長壽), 다남(多男)을 염원한다. 조선시대 민화(民畵) 속에도 이들 삼다식물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 석류와 불로초가 함께 그려질 때는 백자장생(白子長生)을 뜻하며, 꾀꼬리(黃鳥)와 함께 그려지면 금의백자(錦衣白子) 즉 출세한 자손을 뜻한다.

그 외에도 석류와 연밥을 함께 그리거나 석류와 포도를 그려 다산과 다복을 빌었다. 복숭아밭에서 노는 동자 100명을 그린 백자도(白子圖)나 포도덩굴에 매달려 노는 동자 그림은 모두 삼다사상(三多思想)을 반영한 작품이다. 중국에서는 신혼 축하 선물로 석류를 보내는 풍습이 있다. 모두 아들 낳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석류는 재배 역사가 긴 과일나무다. 석류의 원산지는 이란, 인도 북서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키르키스탄 공화국 등 해발 300~1000m 지대이다. 인류가 재배하는 과일나무 중 가장 건조한 지역에서도 견디는 나무이다. 낙엽성 관목 또는 아교목이다. 원산지에서는 기원 전 2000여 년에 이미 과일을 먹기 위해 재배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지중해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이집트의 18왕조 파라오의 피라밋 벽화에도 석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기원 전 4세기에는 지중해에서 유럽 남부지역까지 전해 졌으며 알렉산더왕의 동양진출로 인도로 전해 졌고, 이어 동남아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다. 1492년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석류는 아메리카 대륙에도 전해졌다.

한(漢)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이 서역 정벌에 나섰다가 귀국할 때 함께 가져온 과일나무이다. 페르시아(安石國·安息國)에서 가져온 과일이라 하여 석류라고 했다.

원산지에서는 포플러가 자라는 땅에 함께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유(榴)는 버드나무(柳) 밭(田)에 함께 자란다는 뜻이다. 지금도 서역의 관문인 투르판 교외에는 대규모 석류나무 과수원이 있다. 옛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은 지금의 서안(西安)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곳 서안 교외에도 대규모 석류나무 과수원 단지가 조성돼 식용으로 또는 약용으로 중국 전역에 팔려나가고 있다.

현재는 중국을 비롯하여 인도, 서아시아,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에서 재배한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산악지대에서 많고, 유럽의 경우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이베리아 반도에서 널리 재배한다. 특히 스페인에서는 석류꽃을 나라꽃으로 지정 온 국민이 사랑하고 있다. 메세타 고원 산지에 약 50만㎢에 이르는 대규모 석류나무 과수원 단지를 조성 국가적 특산물로 가꾸고 있다.

중국 남부 지방에서는 음력 오월에 피는 석류를 '오월의 꽃(五月花)'이라 하고, 석류꽃이 피는 오월을 '석류달(榴月)'이라 한다. 치아가 곱고 아리따운 입술을 가진 미인을 일컬어 석류교(石榴嬌)라고 하듯이 보석 같은 과일이다. 석류는 꽃을 즐기는 원예식물인 동시에 과일을 먹는 과수이다. 한자로는 안식류(安息榴), 서안류(西安榴), 수류(樹榴), 약류(若榴), 단약(丹若), 금앵(金罌), 금방(金龐), 해석류(海石榴)라고도 한다. 석류의 학명은 Punica granatum이다. 속명 Punica는 라틴어로 카르타고를 뜻하는 punicus에서 따온 말이다. 석류를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원산으로 본 때문이다. 종소명 granatum은 씨가 입상(粒狀)으로 갈라졌다는 granatus에서 유래되었다. 즉, 석류는 카르타고 원산으로 열매가 낱낱이 갈라지는 나무라고 할 수 있다.

《본초도경(本草圖經)》에는 "안석류(安石榴) 꽃에는 황색과 적색 두 가지가 있고 열매도 단 것과 신 것이 있다. 단 것은 식용으로 하고 신 것은 약으로 쓴다. 또 산석류라 하여 열매 모양은 같으나 아주 작다. 꿀에 졸여 정과를 만드는데 맛이 달다." 고 했다.

《본초연의(本草衍義)》에는 안석류(安石榴)는 산미(酸味)와 담미(淡味) 두 가지가 있다. 홑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는데 속에 든 씨는 붉은 색이다. 종자가 수정처럼 희고 광택이 있으며 맛이 달콤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수정석류(水晶石榴)이다. 또 산석류(酸石榴)는 설사를 멈추는 약으로 쓴다. 고목에 달리는 것이나 오래된 것이 좋다."고 했다. 진(晋)의《박물지(博物志)》에 따르면 "서한(西漢)의 장건(長騫)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가지고 왔다. 안석국(安石國)에서 자라는 나무이기에 안실류(安實榴) 또는 석류(石榴)라 한다."고 했다.

《격물총화(格物叢話)》에서 "유화(榴花)가 본디 안석국(安石國)에서 들어왔기에 안석류(安石榴)라 한다. 또 바다 건너 신라국에서 들어온 것을 해류(海榴)라 한다. 꽃받침이 진홍빛이고 꽃잎이 조알처럼 빽빽하다. 겹꽃(千葉)과 노란색이 있고 홍화백록(紅花白綠)과 백화홍록(白花紅綠)이 있으니 꽃 중에서 가장 기이하다"고 적고 있다. 해류는 애기석류를 말한다. 신라에서 수입한다고 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애기석류의 원산지가 밝혀진 바 없다.

《격물론(格物論)》에는 "석류는 담홍색 씨가 사람의 치아처럼 빽빽한데 맛이 달다. 투명한 호박(琥珀)럼 반짝인다. 또 푸르고 흰 옥 같은 것도 있다."고 했다. 비교적 따뜻한 기후에서 자라는 석류가 명대에는 중국 북부까지 전파돼 널리 심었던 것 같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7월 3일자에는 조선 사신 일행이 오랜 장마로 길이 막혀 숙소에 있을 때 그 집 뜰에 가득한 석류꽃을 기롯하고 있다. "석류꽃이 땅에 가득 떨어져 붉은 진흙에 섞였다.(榴花滿地 銷作紅泥)" 명대(明代)에 발달한 본초학(本草學)이 청(靑)의 중원 장악으로 북부지방까지 전파되고 추위에 강한 품종을 중심으로 일반인에게까지 퍼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때는 선비들의 사랑채 뜰에 즐겨 심어진 나무였다. 김안로(金安老)는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서 화분에서 가꾼 석류를 이렇게 적었다. "우리 집에 화분에 심은 안석류(安石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한 그루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렸다. 마치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서 돌아보는 것 같았다. 머리와 얼굴, 꼬리와 목덜미, 갈기와 네 발톱까지 있어 부인들이 수놓은 사자와 같았는데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은 그보다 나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열매의 기이한 모양이 사자처럼 보였던가 보다.

기독교 성서 속에도 석류는 신성한 과일로 등장한다. 새빨간 열매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표현되고 가장 풍요로운 땅을 맛깔스런 석류나무 정원이라 했다. 신성한 나무라고 믿었던 까닭에 성전의 원기둥 장식에 석류나무를 조각했다.

꽃잎은 기사의 꽃무늬 장식에 들어있고, 왕관 모양의 이 꽃이야말로 지혜로운 솔로몬의 왕관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히브리어로 석류를 림몬(limmon)이라 한다. 이스라엘의 림몬에는 지금도 사도 바울이 6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쉬었다는 큰 석류나무가 자라고 있다. 낙원에서 이브가 아담에게 따 준 금단의 열매는 사과가 아니요, 무화과도 아닌 바로 석류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성서의 무대인 소아시아 지방에 넓게 분포하는 식물인 까닭이다.

우리 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8세기 경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유입되었고 바다 건너 일본까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양으로 나타난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암막새가 처음이다. 암막새의 석류당초문(石榴唐草紋)을 통해 이미 석류가 번영과 풍요의 상징으로 생활 속에 뿌리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가(道家)에서는 가을에 벌어진 석류 열매가 서리를 맞고 저절로 떨어지면 삼시주(三尸酒)라 하여 귀한 약으로 생각했다. 자연 발효된 이것을 먹고 삼시(三尸)가 취하게 되는데 인체 내의 세 가지 해충인 삼시를 몰아내면 장수한다고 믿어왔다.

석류는 버릴 것이 없다. 껍질을 말려 약으로 쓴다. 씨를 감싸고 있는 과육은 날로 먹는다. 석류알을 붉은 오미자 물에 넣고 잣과 꿀을 타 마시는 석류화채는 여름음료 중의 백미이다. 새콤달콤한 그 맛이 수입산 열대과일에 밀려 사라지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도 빛을 잃어가고 있다.



석류에 얽힌 전설
<비단 주머니 속에 든 새빨간 보석>


옛날 인도의 어느 마을에 어린이를 잡아가는 마귀할멈이 있었다. 마귀할멈은 남의 어린이들을 잡아다 보석과 바꿔 가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여러 날 계속되는 마귀할멈의 어린이 납치가 알려지면서 마을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어린이들은 절대 혼자 밖에 나가 놀지도 못했다. 반드시 어른들의 손을 잡고 외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어린이들은 어린이끼리 만날 수도 없었고 어른은 어른대로 반드시 어린이와 함께 있어야 하므로 많은 불편이 따랐다.

마을 사람들이 부처님께 찾아가 대책을 세워 달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마귀할멈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그녀의 딸 하나를 감춰 버렸다.

마귀할멈은 자식을 천 명이나 두었지만 한 명의 자식이 없어졌기 때문에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마귀할멈은 더욱 난폭해져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자식 못 봤느냐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다녔다.

부처님께서는 마귀할멈을 향해 말했다.

"너의 아이 천 명 중에서 겨우 한 명을 잃었는데 그처럼 슬퍼하느냐?"

마귀할멈은 부처님이 원망스럽다는 듯

"당신은 자비의 화신이라 들었는데 어째서 남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하십니까?"

마귀할멈은 부처님도 다 소용없다며 물러가라고 화를 냈다.

부처님은 다시 말했다.

"내가 너에게 루비를 마음껏 가져가게 할 테니 어린이들을 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느냐? 그렇게 하면 너의 자식도 내가 찾아 주마."

마귀할멈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아무리 악한 마귀할멈이라도 여느 부모와 같은가 보다.

부처님께서는 빨간 루비가 산더미처럼 쌓인 창고로 마귀할멈을 데려갔다. 그리고 커다란 자루를 주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만큼 담아 가라고 했다.

마귀할멈이 루비를 자루 가득 담았더니 너무나 무거워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막내가 어머니를 찾아왔다. 기쁨도 잠시 뿐 보석을 갖고 가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자식도 안중에 없었다.

겨우 자루를 메고 창고 밖으로 나왔으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무거운 자루를 지고 비틀거리다 그 무게에 눌려 쓰러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할멈을 흔들어 깨웠지만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죽은 마귀할멈의 손에는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그 열쇠로 어린이들이 갇혀 있는 방문을 열었다. 많은 어린이들의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다.

몇 해가 지났을까? 할멈이 쓰러진 자리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자랐다. 그 나무에서 달린 열매는 붉은 비단 주머니 같았다. 잘 익은 열매 껍질이 저절로 갈라지면서 루비처럼 반짝이는 씨가 드러났다. 사람들은 그 열매가 할멈의 루비 주머니라고 생각했다.

석류꽃은 끈으로 동여맨 주머니 같은 모양이다. 서양에서는 꽃받침이 왕관 모양이라 하여 부귀를 상징하는 과일로 여긴다. 꽃 색도 흰색과 붉은 색이 있고 겹꽃과 홑꽃 등 품종이 다양하다.

소아시아 원산의 석류나무는 기원 전 한나라 때 동양에 전해진 과일이다. 두꺼운 껍질이 터지면 루비처럼 반짝이는 과육을 가진 씨가 드러난다. 맛은 새콤하면서도 달다.

석류의 과피는 말려서 약재로 쓴다. 또 물에 삶아서 황색 염료를 우려 낼 수 있다. 비교적 온난하고 건조한 사막 기후에 잘 견딘다. 우리 나라에서는 중부 이남지역에서 정원수로 많이 재배한다.

애기석류는 꽃을 감상하기 위해 가꾼다고 하여 꽃석류, 해석류(海石榴)라고 하여 바닷가에서 자란다고 알려져 있으나 바다와는 관련이 없고 소아시아 내륙 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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