達城 霞鶩亭
達城 霞鶩亭
문화재지정 | 시도유형문화재 제3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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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대구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10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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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옥은 성주대교가 바라다 보이는 곳의 마을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
선조 37년(1604)에 세운 정자로, 안채와 사당을 갖춘 사대부집의 규모다.
‘하목정’이라는 정자형 사랑채의 이름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서 잠깐 머물렀던 인조(재위 1623∼1649)가 나중에 이종문
선생의 첫째 아들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주었다는 현판으로, 이 편액은 지금도 정자에 당당히 걸려 있다.
하목정은 낙동강이 정자 아래로 흐르는 아침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면서 따오기가 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지어진 이름이라지만, 현재는 낙동강 물길이 바뀌고 대구와 성주를 잇는 30번 국도의 다리인 성주대교로 인하여 편액의 의미와 같은 옛 풍경은 느낄 수 없다.
하목정의 사당은 안채의 지붕선보다 매우 높게 자리하여 마을 앞에서 보면 안채 위에 사당이 올라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당 앞의 배롱나무는 수백 년 세월의 표현인지 가지가 바닥을 기어가면서 사방으로 뻗어 사당 앞마당이 배롱나무에 의해 공간을 만든 것처럼 느껴지는데 여름에는 빨간 꽃들이 사당을 온통 뒤덮어 감싸고 있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없는 배롱나무의 멋들어진 어울림을 느낄 수 있다.
또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낙동강 쪽을 보노라면 이 집 주인이 강가의 물을 산보다 더 좋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는 정자 한 켠에 연지를 조성하였는데 이상하게도 물이 한 점도 없다.
이는 이 곳 지반이 모래라서 물이 고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양반집 사랑채에는 무조건 연지가 있어야 된다는 무지가 낳은 문화재 복원의 실패 사례다.
종손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하목정에는 물이 나지 않으며, 예전부터 마을 아래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사랑채로 사용하는 하목정은 전면 네 칸에 측면 두 칸 규모이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모양은 동서쪽인 낙동강을 바라보는 ‘ㅜ’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전체적인 건물이 높아 마루에 올라가려면 두 개의 섬돌을 거쳐야 하며, 일반적인 가옥의 대청마루보다 높아 시원스러운 맛이 있다.
또 일반 백성들의 주택에는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인 부연을 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인조가 왕명으로 이 집에는 부연을 달도록 허락해 줌으로서 겹처마 구조로 되어 있다.
기와지붕을 한 하목정 처마 끝을 초가집에서나 봄직한 방구매기한 모양으로, 처마 끝을 부채 모양으로 곡선 처리하여 귀솟음의 날카로움을 없앤 것이 이 집의 멋 가운데 하나다.
현재 사랑 도리와 보에는 김명석, 남용익 등 많은 선비들이 하목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현판들이 걸려 있다.
특히 기둥은 관아 건물이나 사찰 건물에서나 사용했음직한 굵은 원기둥이 듬직하며 나뭇결이 잘 표현되고 튼튼한 느티나무 기둥을 전면에 세워 나무 목질의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고 있다.
또 팔작지붕에서 천장가구 구조로 많이 사용하는 가구법인 눈썹반자를 아름답게 표현해 선자연 서까래와 종도리가 만나는 부분을 슬기롭게 표현하였다.
여기에 건물의 전체 기둥이 한 아름 크기의 원주로 되어 있어 튼튼하고 우람한 동시에 천정을 높게 하여 날렵한 느낌도 살렸다.
이 가옥은 한국전쟁 때 하목정인 사랑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현재 있는 ‘一’자형 안채만 최근에 복원해 놓았다. 안채 앞에 행랑채 곳간채 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빈 공터만 남아 있다.
하목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정자다. 인조가 능양군시절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 유숙했던 곳이다. |
하목정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에 있다.
하목정의 ‘하’와 적산 마을의 ‘산’을 땄다.
하목정이 이 마을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정자의 서쪽으로 낙동강이 길게 흐르고 뒤로는 동산을 빼곡이 채운 대숲이 아름답다. 정자에서의 첫 인상은 ‘소쇄’하다는 느낌, 맑고 깨끗했다. 정자에 앉으면 서쪽 들창문 사이로 멀리 낙동강물이 보인다. 강물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을 등에 업고 멀리서도 눈부시다. 정자 담장 밖으로는 낙동강을 끼고 달리는 자전거족들이 한 폭의 풍경이다. 정자의 병풍 노릇을 하는 대숲은 더러 바람을 쏟아냈는데 숨을 크게 들이 쉬며 바람을 받아들였다. 바람은 오장 육부에 이어 영혼에 낀 먼지까지 털어내 갔다. 기분 좋은 털림이다. 정자 뜰에는 목백일홍이 여러 그루 있다. 백일홍이 꽃을 활짝 피운 여름 풍경도 참 아름다운 곳이다.
정자 서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뜰에는 목백일홍이 여러그루 서 있다. |
하목정 뒤에 있는 전양군 이익필의 불천위 사당과 400백년된 목백일홍. |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이었으나 방으로 사용하는 정면의 동쪽 한 칸은 측면 4칸으로 만들어 전체적으로는 ‘T’자형 구조를 이뤘다.
‘ㅡ’자형 정면 3칸, 측면 2칸 마루에 정면 1칸 측면 4칸짜리 ‘l’형 방을 덧대어 붙여놓은 형태다.
‘ㅡ‘자형 마루는 팔작지붕으로 ’l’형방은 맛배지붕으로 세워 한 건물인데도 블록으로 짜 맞춘 듯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목정은 1604년(선조 37년) 전의 이씨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 1566~ 미상)이 지었다. 1588년(선조 21) 생원에 합격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사원, 손처눌등과 함께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서면 대장(西面大將)으로 활약했다. 초유사 김성일의 표창을 받고 추천으로 세 고을의 수령이 됐다. 정유재란 때도 팔을 걷고 나섰다.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산성을 지켜 원종공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됐다.
노후에 하목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하목정 이름은 초당사걸로 오언절구에 뛰어났던 당나라 시인 왕발의 ‘등왕각서 滕王閣序’ 중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아가고(落霞與孤鶩齊飛)/ 가을 물은 먼 하늘색과 한 빛이네(秋水共長天一 色)’라는 시구에서 따왔다. ‘붉게 물든 노을 속으로 검은 점으로 날아가는 따오기’,정자 이름에서 한 폭의 수채화를본다.
인조가 친필로 쓴 하목정 편액. |
현판 글씨는 인조의 어필이다.
인조는 왜 화목정 현판 글씨를 썼을까? 인조가 능양군 시절 때 일이다. 왕은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 광해군이었다. 광해는 미쳐가고 있었다. 동생 능창군이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광해군에게 죽었다. 아버지 정원군도 이 일 때문에 홧병으로 죽었다. 분노와 치욕, 불안이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암울한 시기였다. 광해군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일까. 능양군은 경상도로 발걸음을 했다. 한양과 경상도를 잇는 영남대로는 세 갈래다. 좌도는 울산 경주 영천 의성 안동 죽령 단양을 잇는 보름길이었다. 중도는 부산 밀양 청도 대구 안동 선산 상주 조령 이천 광주 등을 지나 한양에 이르는 열나흘 길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도는 김해 현풍 성주 금천 추풍령 영동 청주 죽산 양재를 지나 한양에 이르는 열엿새 길이었다.
능양군은 중도로 길을 잡았던 모양이다. 상주에서 배를 타고 하목정 나루터에 내렸는데 하목정의 아름다운 풍광에 눈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석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지고 해질 녘 낙동강에 내려 앉거나 강에서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철새가 장관인 곳이다. 하목정에서 그 광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능양군은 아름다운 정자에서 유숙했다. 하루라는 말도 있고 제법 머물렀다는 말도 있다. 선조의 손자이기는 하지만 절대 권력자, 광해의 눈총을 받고 있는 왕손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조는 그때 일이 오래 가슴에 남았을까?
인조의 명으로 만든 부연. 처마에서 덧대어 서까래다. |
인조가 ‘하목정의 추억’을 떠올린 것은 이종문의 아들 수월당(水月堂) 지영(之英)이 벼슬자리에 올라 경연관으로 대궐에 나타났을 때였다. 인조가 지영을 알아보고 옛일을 회상하며 물었다.
“너의 집 하목정은 풍광이 아름다운 정자인데 왜 부연 달지 않았느냐?”
지영은 “사서인(士庶人)의 사가(私家)에는 부연을 달 수 없도록 돼 있습니다.”
인조는 “이 같은 강산경치가 좋은 정자는 사가(私家)와는 다르니 지붕을 고치고 부연을 다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저 황송하기만 한 지영이 “ 부연을 달겠지만 임금이 유숙하던 곳이니 앞으로는 출입을 금하고 사사로이 거처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엎드려 말했다.
인조가 말했다. “그럴 것 까지는 없고 내가 유숙했다는 표적을 남기면 되지 않겠느냐”며 친필로 하목정 편액을 내려줬다. 부연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은 내탕금에서 은 200냥을 내렸다. 하목정 창수전말 기록을 재구성했다.
부연은 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를 말하는데 왕궁에서나 할 수 있는 건축 기법이다. 하목정은 조선의 내로라는 시인묵객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체제공, 현종 때 문인인 정두경과 남용익, 이덕형 등의 시판 14개가 걸려 있다.
강 물줄기와 산세가 길게 뻗었는데
멀리 펼쳐진 들판의 아름다움 그리기도 어렵구나
새벽안개와 연기와 섞여 물가에 잠겨 있고
저녁 석양빛은 강물 위에 출렁이네
서산의 가랑비에 주렴 안도 시원하고
남포 노을은 새 등에 반짝이네
애석하구나 황자안이 아무 말 남기지 않았으니
좋은 경치 감상하며 술과 벗하네
- 한음 이덕형의 시 ‘하목정’
하목정을 그린 시는 18수다.
이 가운데 10수는 이종문 일가의 문집인 ’전성세고‘ 중 이종문의 문집인 ’낙포집‘에 수록돼 있다.
그런데 체재공의 ’하목정 원운‘시판이 이곳에 걸려 있는 점이 석연치 않다.
채제공은 1782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파면돼 한동안 마포에 있는 김씨 정자에서 우거 했는데 이 정자 이름이 ‘하목정’이다.
따라서 달성 하목정에 있는 체제공의 시 하목정은 마포의 하목정을 보고 지은 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의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가운데가 하목정 오른쪽이 안채, 맨 뒤의 높은 곳이 사당이다. |
이종문이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뒤 자손들이 잘 풀렸다.
첫째 아들 수월당 지영은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 여헌 장현광 등에게서 공부를 한 뒤 문과 병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 직강 예조좌랑을 거쳤으며 광해군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오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이첨의 전횡이 극에 달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울진현령을 맡았다. 미수 허목은 이지영의 묘갈명에 “광해군 말년에 조정의 정치가 극도로 혼란하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하빈(河濱)으로 돌아가 강위에 노닐며 세상일을 잊고 지낸 지가 5년이었다.(중략) 공이 관직을 맡아 백성을 잘 보살폈는데, 과거에 급제를 한 지 30년에 벼슬이 현령에 지나지 않았다. 공은 평생 명예와 형세를 피하였고 구차한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서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떠나가 시골에 탁락(拓落)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름이 드날려지지는 않았으나 행실은 더욱 완전하였다.”라고 썼다.
둘째 다포(茶圃) 지화(之華 )는 형 지영과 함께 서사원에게서 수학했다. 광해군때 증광문과에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
급제한 뒤 세자시강원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인조 반정 이후 호조정랑 군수 목사를 거쳐 병의 참의에 이르렀다. 정묘재란 때에는 의병장 여헌 장현광의 막하에 들어가 군량미 조달에 힘썼고 병자호란때는 호소사의 종사관으로 의병을 지휘했다.
하목정 뒤에 있는 사당은 지영의 증손인 전양군 익필을 제향하는 곳이다.
무인이었던 익필은 영조 4년(1728년)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 오명항과 토벌에 나서 분무 3등공신이 됐다. 나라에서 불천위로 정했다. 사당에 영정을 모시고 영원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사당 앞 뜰에는 400년 된 목백일홍 5그루가 있는데 여름에 장관을 이룬다.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1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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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낙포 이종문(李宗文: 1566∼1638) 현감이 조선 선조 37년(1604)에 세운 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 곳에 머문 적이 있어 그 후 이종문의 장자인 이지영(李之英)에게『하목정』이라는 정호(亭號)를 써 주었으며, 또한 사가(私家)에서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달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나 인조의 명으로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출처 : 관광지식정보시스템]
* 성주대교를 건너기 직전, 시군 경계 부근에 하목정이 있습니다.
* 멀리서 촬영한 하목정(사진에서 왼쪽 건물)입니다.
* 성주대교입니다.
* 하목정으로 들어가는 정문인데, 평소에는 잠겨 있습니다.
* 위 사진 오른편에 문이 있는데, 그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출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면 기와집이 있는데, 이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 사진 맨 오른쪽 건물은 화장실입니다.
* 사진 맨 왼쪽에 보이는 문을 통과하면 하목정이 있습니다.
* 사진에서 보이는 문이 조금 전에 제가 들어온 문입니다.
* 평소에는 저 문을 이용해서 하목정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 평소에는 닫혀있는 하목정 정문.
* 하목정 뒤뜰 모습입니다.
* 하목정 뒤로 가면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도중에 하목정 후면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 단청의 모양으로 봐서 사당인 것 같은데, 관련 자료는 찾을 수 없네요.
* 사당으로 들어오는 문과, 하목정 지붕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하목정 뒤뜰 모습입니다.
하목정(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6호)
하목정의 배롱나무군락
전양군 이익필 사당
덧서까래(부연)
인조의 친필 하목당
하목정 벽에 걸린 시판
전의인 낙포 이종문선생과 하목정 배롱나무
7월 하순과 8월 초순은 배롱나무 즉 백일홍(百日紅)의 계절이다. 꽃이 귀한 이즈음 검붉게 피는 꽃이 산하를 물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조경수로 많이 심기고 있지만 옛날에는 매우 귀한 나무였다.
고건축과는 너무나 잘 어울려 담양의 명옥헌과 안동의 병산서원은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장관을 이룬다. 대구에서 그런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전양군 사당의 큰 배롱나무를 비롯한 하목정(霞鶩亭,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6호)일대이다. 이정자는 1604년(선조 37)경 전의인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 1566~1638)이 창건했다.
전의 이씨는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이 본향이다. 그곳에서도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지만 대구에서도 많은 그 못지않아 충의로 나라에 공헌하고 학문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한 인사가 배출되었다.
특히, 전의 이문의 낙동강가의 하목정(霞鶩亭)과 금호강가에 부강정은 대구 사림의 사교와 시회를 여는 장소로 강안문학를 꽃피우게 했다.
이들이 처음 대구에 자리 잡은 것은 이필(李?)로부터 비롯되었다. 경기도 부평(현 서울시 구로구, 궁동)에서 태어나 예산현감을 지내고 명종 조 달성군 하빈 하산리로 이거했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분은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었다. 공은 임란 시 망우당 휘하에서 화왕산성을 지킨 아버지 경두(慶斗)와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에 1566년(명종 21)태어났다. 부인은 퇴계 문인 계동 전경창의 따님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임란 시 서사원, 손처눌, 이주 등과 팔공산에서 창의하여 하빈 서면대장으로 활동하여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이후 금화사(禁火司) 별좌를 시작으로 제용감 직장을 거쳐 사헌부 감찰에 올랐으며, 외직으로 1610년(광해군 2) 삼가, 1612년(광해군 4) 비안, 1620(광해군 12) 양성, 이듬해 군위현감을 지냈다.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낙향하여 자연을 벗 삼아 살았다.
1638년(인조 16) 돌아가시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낙포집>이 있다. 맏이 이지영과 둘째 이지화가 대과에 급제해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후손들은 하빈면 하산리, 동곡리, 기곡리,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다사면 부곡리 등 낙동강 좌, 우안에 세거하고 있다.
하목정은 여느 정자와 달리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을 지나다가 머물렀던 곳으로 왕이 숙박을 한 정자로서는 대구에서 유일한 곳이다. 훗날 낙포의 첫째 아들 지영이 출사하여 인조를 접견했을 때 하목정에 머문 이야기를 하면서 덧서까래(附椽)를 달지 않는 까닭을 물자 사가(私家)에서는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자 내탕금(內帑金) 200냥을 주면서 달도록 하고 하목당이라는 글씨도 써 주었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정(丁)자형이다. 정자 내부에는 이덕형, 채제공, 김명석, 남용익 등 이름 난 문사들이 쓴 많은 시문이 걸려있다.
대경대학 조영화, 부산대학 이호열 교수는 ‘조선 중후기 반가(班家)의 객청(客廳)으로 건축기법과 공간구성 및 장식 등에 큰 특징이 있는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북쪽에 하옹(霞翁) 이익필(李益馝, 1674~1751)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 1703년(숙종 29) 무과로 등과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 오명항과 함께 금위우별장(禁衛右別將)에 제수되어 토벌 시 항상 선봉에 나서서 독전하였다.
죽산전투에서는 금위좌별장 이수량과 더불어 용맹하게 싸워 난을 평정하였다. 그 공적으로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奮忠效義炳幾協謨保社功臣) 3등에 녹훈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전라병사를 거쳐 1730년 평안병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은 무과 출신답지 않게 시문에도 능해 하목당 16경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하산에 자리 잡은 전의 이문은 이지영, 이지화 이외에도 길주목사 구(球), 하동현감 현(玹), 자인현감 여주(汝柱) , 사헌부 지평 관후(觀厚), 등 문과 급제자 8명, 전양군 외 무과급제자 13명, 낙포를 비롯해 생원, 진사 급제자 25명을 배출하여 대구지역 명문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