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정자 누각 원림

청도 삼족대

초암 정만순 2018. 2. 3. 07:24

삼족대 

 

 

 경북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901

 

 

     

청도 삼족대(淸道 三足臺)   경북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901  

 

  이 정자는 조선 중종14년(1519)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1479~1552)가 후진을 교육하기 위하여 처음 건립하였고, 그의 호를 따라 삼족대라 불렀다.

  김대유는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2년(1507)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한 이후 정언(正言), 철원 현감 등을 지낸 인물이다. 1519년 기묘사화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사방에 토담을 쌓고 일각문을 두어 그 안에 정자를 배치하였는데 방 두칸과 부엌, 우물마루가 'ㄱ'자로 배열되어 있다.

  1519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후대에 여러차례의 중수를 거치는 동안 조선 후기 건축양식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러나 동창천의 암벽 위 솔밭 속에 놓여 있는 삼족대는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한국적인 정자의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그 밑에는 1973년에 세운 김대유의 신도비가 있고, 참봉 김용희(金容禧)의 중수기문이 있다.

 

 

 

김대유(金大有)       1479(성종 10)∼1551(명종 6)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김해(金海).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三足堂). 극일(克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의(執義) 맹(孟)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준손(駿孫)이며, 어머니는 사도시정(司寺正) 고태익(高台翼)의 딸이다.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다. 조광조(趙光祖)·조식(曺植)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19년 현량문과에 3등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정언·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제(科第)를 삭탈당하였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면서 전적에 재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향리로 돌아와 죽었다.

그는 현량과 천목(薦目)에서“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계서원(紫溪書院)·선암서원(仙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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