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정자 누각 원림

선비들의 墨香! 洛東江邊에 그윽하다

초암 정만순 2018. 1. 25. 10:43



선비들의 墨香! 洛東江邊에 그윽하다

 


2017년 11월 고을학교는 <달성고을>
11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49강은 지금은 대구광역시에 포함되었지만 경상좌도 고을로 명성이 자자했던 현풍고을을 품고 있는 달성에서 조선시대 큰 족적을 남긴 사육신 박팽년, 한훤당 김굉필, 홍의장군 곽재우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입구에는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가, 서원 앞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준다.ⓒ달성군


고을학교 제49강은 2017년 11월 26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9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코스는 서울-다사·하빈(육신사/삼가헌/하목정)-화원·옥포·논공(남평문씨본리세거지/마비정벽화마을)-현풍·구지·유가(현풍현감선정비군/현풍향교/사직단/원호루/점심식사 겸 뒤풀이/예연서원/이노정/현풍곽씨12정려각/도동서원)-서울의 순입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달성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49강 답사지인 <달성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달성의 진산 비슬산 

달성(達城)의 지형(地形)은 남동쪽의 비슬산(琵瑟山)과 서쪽의 낙동강(洛東江)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비슬산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산지(南部山地)와 낙동강의 연안의 서부저지(西部低地)로 나누어지는데, 서부는 낙동강 연안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길게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고 곳곳에 구릉성 산지가 분포해 있으며 동부는 화산암 지대로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비슬산(琵瑟山 1,083.6m)은 달성군의 진산(鎭山)으로, 북쪽의 팔공산(八公山)과 함께 남쪽에서 대구를 둘러싸고 있어 대구의 남산 또는 앞산의 역할을 합니다. 경산, 청도 및 경남 창녕과 경계를 이루면서 달성군의 가창, 화원, 옥포, 논공, 현풍, 유가 등 6개 읍면에 걸쳐 뻗어 있고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을 중심으로 대견봉, 월광봉, 팔봉, 석검봉, 수도봉을 비롯한 많은 산봉우리들이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산자락에는 용연사(龍淵寺), 유가사(瑜伽寺), 대견사(大見寺) 등 유서 깊은 사찰과 문화유적들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봄에는 참꽃 군락지로 대평원을 붉게 물들이고 가을이면 드넓은 억새밭에 물결치는 억새의 모습이 장관을 이룹니다.

산 정상에 있는 초곡산성(草谷山城)은 총길이는 1.7km, 높이 6~7m, 폭 3m 내외로, 형태상으로는 꼭대기가 평탄하며 절벽인 자연지형을 이용한 퇴뫼식 산성입니다. 성 내부에는 성문, 망루 등의 흔적뿐만 아니라 기와, 우물, 고분군 등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축성 시기는 산성 안에 삼국시대 고분군이 있고, 이곳이 삼국시대 주요한 접경지대였으며 성내에 수지(水池)가 없고 평평한 할석(割石)으로 쌓은 고식(古式)의 축성수법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에 초축(初築)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풍 읍치구역의 거점성(據點城)으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신라가 낙동강 서안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면서부터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낙동강(洛東江)은 태백시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예천, 안동, 상주, 선산, 고령 고을을 적셔주고 현풍에 이르러 비슬산을 감싸고 돌면서, 비슬산 자락에서 발원한 현풍천, 유곡천, 차천을 차례로 받아 안고 창녕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마침내 남해로 숨어듭니다.

▲인흥사 절터에 세워진 문익점 후손인 남평문씨 세거지ⓒ달성군


사문진, 피아노가 최초로 유입된 곳 

사문진(沙門津)은 낙동강변의 옛 포구로 대구를 관통하여 흘러온 금호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곳에 위치합니다. 낙동강 건너 북쪽 고령고을과 맞닿아 있는데 과거 대구 지역 일원에 낙동강 하류로부터 유입되는 물산을 공급하고 다른 지역으로의 물산 운송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낙동강의 대표적인 나루터로서, 옛날 보부상들이 부산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대구로 오는 뱃길로 이용되었으며, 1900년 3월 26일 미국선교사 사이드 보탐에 의해 그 당시 ‘귀신통’이라 불린 한국 최초의 피아노가 유입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기도 합니다.

달성(達城)의 지명은 선사시대부터 달구화->달구벌->달불->달성으로 그 이름이 바뀌어 왔습니다. 신라시대는 757년(경덕왕 16) 대구현이었고 고려시대는 1018년(현종9년) 대구현(달성), 팔거현(칠곡), 하빈현(다사,성서,하빈), 화원현(월배,화원,옥포)이 경산부(성주)로 이속 되었으며 1143년(인종 21) 현령관으로 승격하여 하빈현, 화원현을 영(營)안에 포함하였습니다.

조선시대는 1419년(세종 1) 군으로 승격한 후 하빈, 수성, 해안현을 직할하였고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에 속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달성군이라 하여 16개 면을 관할하였습니다. 달성군의 행정구역은 경상북도에 속해 있었으나 1995년에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으며 현재 3읍 6면을 관할하고 있습니다.  

달성 읍치구역은 현풍 

달성의 읍치구역은 현풍에 있었는데 원호루, 현풍향교, 사직단, 석빙고, 현감선정비가 위치는 바뀌었지만 중요한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원호루(遠湖樓)는 1897년(고종 34) 현풍 현령 홍필주(洪弼周)가 인근 현령들과 정사를 의논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현풍면 상리 현재의 면사무소 자리에 옛 건축양식으로 상층부분만 개조하여 남아 있던 중 면사무소 증축으로 해체되었다가 1996년 현풍면 상리동산에 이전 복원하였습니다. 

현풍향교(玄風鄕校)는 조선 초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1598년(선조 31) 옛 교동에 중건되었던 것을 1758년(영조 34)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습니다. 강학공간이 앞에, 배향공간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태입니다.

현풍사직단(玄風社稷壇)은 1469년(세조 14)경 당시 현풍현감인 채석견(蔡石堅)이 현서(縣西), 지금의 달성군 현풍면 성하리에 설치하였으나 1908년(순종 2) 일본의 강압에 의해 폐허가 되고 그 자리에 신사(神社)를 지었던 것을 1945년 애국지사들이 신사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현재의 사직단은 옛 현풍사직단 터에 충혼탑이 세워져 원래의 자리에 복원하지 못하고 1996년 1월 현 위치인 상리체육공원 내에 사직단을 1차 복원하였고, 2010년 6월에는 지역유림의 주선(周旋)으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 옛 문헌(文獻)의 고증(考證)과 관련 자료의 검토를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 복원하였습니다. 

현풍사직단(玄風社稷壇)은 토지(土地)를 주관하는 사신(社神)과 오곡(五穀)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에게 고을의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풍요(豊饒)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매년 중춘과 중추에 사직제를 지내고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후기 석빙고, 현풍석빙고 

현풍석빙고(玄風石氷庫)는 조선시대의 석축 얼음창고로 현풍천변(玄風川邊) 북쪽에 있습니다. 석빙고의 입구는 개울이 흐르는 반대편인 능선 쪽으로 향하도록 하였고 외기를 막기 위해 옹벽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천정과 벽에는 4개의 잘 다듬어진 화강석을 사용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蜺)를 틀어 올리고 바닥에는 돌을 깔고 여름에 얼음이 녹지 않도록 통풍과 배수가 잘 되도록 하였습니다.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1982년 보수공사 때 '崇禎紀元後二庚戌十一月(숭정기원후2경술11월)'이라고 쓰인 건성비가 발견되어 1730년(영조 6)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경주석빙고(1738년), 안동석빙고(1737∼1740), 창녕석빙고(1742)보다 축조연대가 앞선 것으로 조선후기 석빙고의 규범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풍현감선정비군(玄風縣監善政碑群)은 달성군민체육관 옆에 있습니다. 1977년 구마고속도로 공사 때 성하리 '구쌍산' 일대에 남아 있던 비석들과 옛 관아 입구인 현풍면사무소 도로변 속칭 '비석걸이'에 남아있던 비석들 총 38기를 속칭 '공들고개'라 불리는 달성군민체육관 옆으로 옮겨놓은 것을 1997년도에 연대별, 관직별로 1군(순찰사, 관찰사비), 2군(현감비), 3군(군수비), 4군(기타비), 5군(현감비)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한훤당 김굉필 모신 도동서원  

선비들의 묵향이 짙은 달성에는 유명한 서원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조선 5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을 향사한 서원입니다. 1568년(선조 1) 비슬산 동쪽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불렀는데 창건 5년 뒤인 1573년(선조 6)에 같은 이름으로 사액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습니다. 

그 후 1604년(선조 37) 지방의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여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 하였고 1610년(광해군 2)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사액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는데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전국 650개 서원 중 철폐되지 않은 47개 서원의 하나입니다.  

서원은 중심축을 따라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는데, 통로와 계단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해줍니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말한 추뉴(樞紐), 즉 만물의 축(軸)과 중심성(中心性)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며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법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전체적인 건축 구성과 배치 형식은 불필요한 장식을 삼가고 간소하게 지어진 조선시대 서원건축으로서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이며, 건축물들의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 구성 및 서원을 둘러싼 담과 석물(石物)들도 그 기법이 매우 우수합니다.

도동서원의 수문장 구실을 하고 있는 은행나무는 도동서원으로 사액된 1607년(선조 40) 당시 안동부사로 재직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외증손이며 퇴계 선생의 고제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사액 기념으로 식수한 것이라 전하며, 수령은 약 400년이고 나무의 둘레는 무려 8.7m나 되며 높이는 25m로 보기 드문 거목입니다.

김굉필신도비는 도동서원 좌측 편에 있으며 사우당(四友堂) 김대진(金大鎭)의 후손과 경남감사 이민구(李敏求)의 협력으로 세운 비석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지었고 사헌부 감찰인 배홍우가 썼습니다.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의 후손 집성촌인 삼가헌 고택ⓒ달성군


곽재우의 충절 기리는 예연서원 

예연서원(禮淵書院)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郭再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1618년(광해군 10)에 ‘충현사’로 처음 세웠고 1674년(현종 15)에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1677년(숙종 3) 나라로부터 ‘예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77년과 1984년에 걸쳐 복원하였습니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과 제물을 준비하여 두던 고사, 숙소로 사용되던 동재, 서재 등이 있고, 사당에는 곽재우와 곽재우의 재종숙으로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곽준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으며, 서원 앞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신도비가 있습니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하여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의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박팽년의 낙빈서원 

낙빈서원(洛濱書院)은 본래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위패를 봉안한 하빈사(河濱祠)에 후손들이 향사를 지내왔는데 어느 해인가 공의 현손(玄孫)인 박계창(朴繼昌)이 사육신 여섯 분이 함께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깨달은 바가 있어 다섯 분의 신위를 더 설치해 함께 제향하게 되었습니다.  

1691년(숙종 17)에는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별묘(別廟)와 강당(講堂)을 건립하여 낙빈서원을 창건하였으며 3년 후인 1694년(숙종 20)에 유생들의 소청으로 사액을 받았습니다.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으나, 1924년 문중에서 원래 터보다 위쪽인 현 위치에 강당 건물만 중건하여 서원이라기보다는 문중의 재사(齋舍)와 유사한 모습이 되었는데 1974년에는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묘골의 구 종가(宗家)터 뒷산에 육신사(六臣祠)가 건립되면서 그곳으로 사육신의 위패를 옮겨 봉안하고 매년 춘추절에 향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임란 때 일본인 귀화장군 김충선 

녹동서원(鹿洞書院)은 임진왜란 때 귀화한 삼란 공신 모하당 김충선(일본명 사야가)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정조 13)에 건립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84년에 훼철되었다가 1914년에 중건하였으며 1971년에 원래의 장소에서 100m가량 떨어진 현 위치로 옮겨 증축하였습니다.  

김충선(金忠善)은 일본 장수인 우선봉장 사야가로, 임진왜란 때 조선의 침략을 깊이 뉘우치고 조선에 귀하한 후 조선의 자주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총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하는 등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적을 남겼고 1571년 태어나서 1643년 별세 후 병조판서로 추증 받았으며 현종 10년 묘비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그의 묘는 낙동서원 뒤편 20분 거리인 삼정산에 있습니다. 

이강서원(伊江書院)은 낙재(樂齊) 서사원(徐思遠)을 봉안한 서원입니다. 1639년(인조 17)에 창건하였으며 19세기 중엽에 중건하였습니다. 산기슭 경사진 곳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으며 경내에는 강당인 완락당(琓樂堂), 동경재 등이 있습니다. 

낙제의 본관은 달성이며 한강 정구에게서 글을 배우고 장현광(張顯光), 정경세(鄭經世) 등과 도의의 교분을 가졌으며 1589년(선조 17) 익위(翊衛)를 거쳐 호조정랑에 올랐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임진왜란 중에 청안현감에 임명되어 문교를 진흥하고 구봉서원을 세웠습니다.  

용호서원(龍湖書院)은 1708년(숙종 34)에 건립하였으며, 도성유, 도여유, 도신수 3현을 향사하고 있습니다. 도성유(都聖兪)는 본관이 성주이고 호는 양직당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서사원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모았고, 오경체용합일도(五經體用合一圖)와 체용각분도(體用各分圖)를 만들었습니다.  

도여유는 성유의 종제로 일찍이 한강 정구와 낙제 서사원(徐思遠)에게 수학하였으며 1623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향병을 모집하여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과 함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도신수는 도여유의 장남으로 1626년(인조 4)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부사를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올려 왕으로부터 내구마(內廏馬)를 하사받았습니다.

금암서원(琴巖書院)은 1764년(영조 40) 창건되어 동래정씨의 임하 정사철과 그의 아들 정광천을 함께 향사했는데, 1871년(고종 8)에 훼철되고 지금은 그 유지(遺趾) 위에 임하의 유허비만 남아있습니다. 

임하 정사철는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한강 정구와 친교하며 오로지 성리학에만 전념하며 후진 강학에만 힘썼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정광천은 학행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교전중인 곽재우 장군을 도와 전공을 세웠습니다. 

한천서원(寒泉書院)은 고려개국공신 충렬공 전이갑과 충강공 전의갑 형제를 배향하는 서원입니다. 양 공은 918년에 신숭겸장군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였고 927년 견훤의 침공을 받은 신라를 돕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전하여 견훤군과 팔공산 동수에서 만나 대혼전 중에 왕건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미복으로 탈출케 하고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인흥서원(仁興書院)은 비슬산 지맥인 본리마을 앞산 기슭에 있는데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추계 추씨의 시조인 노당(露堂) 추적(秋適)을 모신 서원입니다. 노당은 당대의 석학인 안향(安珦)의 제자로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를 지내고 직사관, 민부상서,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이양서원(尼陽書院)은 세조 때 청백리인 곽안방(郭安邦)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1707년(숙종 33)에 사당인 청백사(淸白祠)를 건립한 뒤 서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1945년에 사당을 복원하였고 1982년에는 동재, 서재를 건립하였으며 청백사(淸白祠)에는 곽안방을 으뜸으로 곽지운(郭之雲), 곽규(郭赳), 곽황(郭趪) 등 네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송담서원(松潭書院)은 임진왜란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대암(大菴) 박성(朴惺)을 배향하는데, 1700년(인조 18) 사림 75명이 모여 신도비를 건립하였으며 한일합병 시 친일파의 방화로 서원과 비각이 소실되었던 것을 후손들이 복원하였습니다.  

▲전통담장에 아름다운 벽화를 그려놓은 마비정 벽화마을ⓒ달성군


남평문씨와 순천박씨 집성촌 

달성에는 문익점의 후손인 남평문씨와 박팽년의 후손인 순천박씨 집성촌이 있습니다.

남평문씨(南平文氏) 본리(인흥) 세거지는 남평문씨들이 200년간 세거해 온 곳으로, 문익점(文益漸)의 9대손인 문세근(文世根)이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 경기도 파주 지역에서 대구 지역으로 이거하였고, 이후 1840년(헌종 6)경 문세근의 9세손인 문경호(文敬鎬)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은 이래로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 위치는 옛 인흥사(仁興寺) 절터이며 인흥사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스님이 1264년에 포항 오어사(吾魚寺)에서 옮겨와 중창한 사찰입니다. 임진왜란 때 전부 소실되었는데 19세기 중반 문경호가 지금의 광거당 자리에 용호재를 건립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1910~1940년경에 남평문씨 일가의 살림집과 재실 등이 건립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곳의 대표적 건물로는 광거당과 수봉정사를 들 수 있는데 광거당은 자제들의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학의 장소이고, 마을 전면에 위치한 수봉정사는 손님을 맞이하고 일족이 모임을 갖던 곳입니다. 수봉정사 옆에 자리한 인수문고는 질적, 양적인 면에서 그 유례가 드문 문중문고(門中文庫)로 국내외 2만여 권의 서책과 책판이 거의 변질 없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세거지는 20세기 초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근대화를 지향했던 철학이 엿보이는 곳으로 기존의 전통마을의 풍수지리적 정서와 민속적인 풍습도 간직하고 있으며, 주거유형들은 대부분 평면상 ㅡ자형이고 그 배치는 튼 ㅁ자, 튼 ㄷ자, 튼 곱자와 二자형 배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가헌(三可軒)고택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충정공 박팽년(忠正公 朴彭年)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박씨 집성촌입니다. ‘삼가(三可)‘란 <중용(中庸)>에 나오는,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말하는데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다”라는 뜻으로 박팽년의 11대손인 성수(聖洙)가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 뒤 그의 아들 광석(光錫)이 1783년에 이웃 묘골 마을에서 이곳으로 분가하여 1826년에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습니다. 

별당채인 하엽정(荷葉亭)은 광석의 손자인 규현(奎鉉)이 1874년에 원래 있던 파산서당(巴山書堂)을 약간 앞으로 옮기고 누마루를 달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은 것으로, 안채와 사랑채를 지을 때 흙을 파낸 자리에는 연을 심어 연당으로 가꾸었는데 ’하엽정‘이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삼가헌은 전체적으로 조선후기 영남 내륙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주택으로, 넓은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별당채, 그 외 여러 부속채로 구성되었으며 배치형식은 사대부 가옥의 공간구성과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됩니다.

도곡재(陶谷齋)는 사육신 중 한 분인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묘골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사성을 지낸 서정(西亭) 박문현(朴文鉉)이 주택으로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합니다. 19세기 중엽 도곡(陶谷) 박종우(朴宗佑)가 공부방으로 사용하면서 선생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 부르게 되었는데, 박종우는 인조 때의 문신으로 낙재 서사원을 사사하였고 한강 정구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문장과 행의가 추앙되었다고 합니다.

태고정(太古亭)은 1479년(성종 10)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朴壹珊)이 건립한 것으로, 원래는 종가 안에 붙어있던 별당 건물이었으나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불타고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1614년(광해군 6)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습니다.

풍광 좋은 낙동강가의 정자들 

달성은 낙동강이 감싸며 돌아 흐르는 풍광이 좋은 고을이라서 정자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노정(二老亭)은 성종(成宗) 때 대유학자인 김굉필과 정여창이 무오사화로 화를 당하여 시골로 내려와 지내면서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입니다. ‘이노정(二老亭)’이라는 함은 두 분을 지칭하여 붙인 이름이며 1504년(연산군 10) 처음 건립된 후 1885년(고종 22) 고쳐지었고, 처마 아래 가운데에 ‘이노정’과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앞면의 기둥에는 두 사람이 지은 ‘유악양(遊岳陽)’이란 시가 걸려 있습니다.

하목정(霞牧亭)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 1604년(선조 37)에 세운 것입니다. '하목정' 이라는 이름은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그 인연으로 이종문의 장남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 준 것인데, 당나라 왕발(王勃)이 지은 <등왕각기(騰王閣記)> 서(序)에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아가고, 가을 물은 먼 하늘색과 한 빛이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고 쓴 데서 따온 것입니다.

또한 일반 백성들의 주택에는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인 부연(附椽)을 달지 않은 것이 관례였으나, 인조의 명으로 부연을 달았다고 하며 지붕의 양쪽 추녀를 조금씩 잘라 처마끝을 둥그스름하게 만든 방구매기 수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인데, 건물 내부에는 김명석, 남용익 등 명인들이 남긴 시액(詩額)이 걸려 있습니다. 

관수정(關壽亭)은 1624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사우당(四友堂) 김대진(金大振)이 경상감사 이민구와 지역 사림의 협조로 건립하였으나 1721년 소실된 것을 1866년 그의 후손 김규한이 중건한 건물입니다. 주위 자연환경과 잘 조화되고 건물 각부의 비례구성이 단정하고 안정감을 느끼게 하며 원형을 잘 보존하여 조선후기 정자건축의 흐름을 잘 표현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소계정(小溪亭)은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 힘쓴 소계 석재준을 기리기 위해 1923년에 그의 제자들이 건립한 것으로, 그의 호를 따서 소계정이라 하였고 서건수가 기문을 찬하였으며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둔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정자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공신정(拱辰亭)은 영월엄씨의 재사로, 현풍 입향조는 증통정대부공조참의 엄계입니다. 엄계의 아버지인 엄산수가 성종 때 폐비사건에 연류되어 연산군에 의해 유배될 때 장남인 계는 현풍의 낙동강 수문동에 유배되어 지금의 공신정에 이르게 되었고, 병인년에 사약을 받고 이 자리에서 숨지자 그곳에 후손들이 약 400년 전에 정자를 지었습니다.

육신사(六臣祠)는 세조 때 사육신으로 일컫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입니다. 처음에는 충정공 박팽년 선생만이 후손에 의해서 배향되어 오다가 선생의 현손인 계창공이 선생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어 그로 말미암아 낙빈사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였습니다.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낙빈서원과 함께 훼철된 후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다시 사육신을 이곳에 봉안하게 되었으며, 또 1974년과 1975년 사이에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에 따라 정면 5간,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의 육신사를 건립하게 되었고 1981년에는 외삼문, 삼충각, 숭절당, 관리사, 담장 등을 갖추었습니다.

현풍곽씨(玄風(郭氏) 12정려각은 1598년(선조 31)부터 영조 때까지 현풍곽씨 일문에 포상된 12정려를 한 곳에 모은 정려각입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으로 황석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가족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존재(存齋) 곽준(郭䞭)과 그의 두 아들, 그리고 딸이 일문삼강(一門三綱)으로 정려된 것과, 임진왜란 때 비슬산 자락의 사효자굴에서 병든 부친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곽재훈의 네 아들인 결,청,형,호(潔,淸,泂,浩)가 효자사공(孝子四公)으로 정려된 것을 비롯하여 정려가 내릴 때마다 따로 여각을 세우던 것을 1725년(영조 1) 이후 이들 정려를 현재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고 합니다. 

비슬산 자락에 있는 마비정(馬飛亭) 마을은 60~70년대의 정겨운 농촌의 풍경을 토담과 벽담을 활용하여 벽화로 꾸며져 있으며, 국내 유일의 연리목, 연리지 사랑나무와 국내 최고령 옻나무, 대나무 터널길, 이팝나무 터널길 등 자연과 호흡하며 벽화를 감상할 수 있는 곳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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