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정자 누각 원림

淸道 三足臺

초암 정만순 2018. 3. 5. 10:48




淸道 三足臺 

    

여러 차례 불운 이겨내고 마침내 꿈꾸던 청복 노리다

     

삼족대 전경

삼족대 암벽아래 우연(愚淵). 비온 뒤 더욱 서슬이 퍼래진 동창강물이 날을 세운 채 바위벽에 부딪히며 흐르고 있다.
큰 물줄기는 고요히 흐른다더니 운문천과 동곡천, 관하천을 품에 안아 더욱 몸피가 넓어진 동창강은 운문산 산그림자를 담거나 성하의 작렬하는 태양을 그대로 받으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경주 산내면에서 시작해 운문댐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 강물은 운문산 자락에 누정하나 세울 자리를 마련해두고 밀양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합류한 뒤 부산 앞바다와 몸을 섞으면서 강으로서의 생명을 마감한다.

동창강이 운문산 자락에 마련한 누정 자리, 청도군 매전면 운문산 자락 언덕위에 삼족대가 들어섰다.

삼족대는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가 1519년(중종 14)가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정자다.

김대유는 증조부인 김극일, 숙부인 김일손과 함께 ‘청도 삼현’으로 불린다. 또 김해김씨 삼현공파의 파조이다


삼족대 현판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다.
정자를 둘러싼 사방에 토담을 쌓았고 토담 아래에는 바람구멍을 두 군데나 내 강바람이 정자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토담의 서쪽과 동쪽에 각각 일각문을 설치했는데 서쪽 문은 운문산으로 오르는 통로로, 동쪽 문은 동창강으로 내려가는 통로로 이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건물은 남향이다. 방 두칸과 우물마루를 ‘ㄱ’자 형태로 배치한 소박한 구조다. 강을 끼고 산의 품에 안겨 있으니 ‘요산요수’의 이상적 은거지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삼족대는 동창강의 주인격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동창강의 이름이 바로 정자를 지은 김대유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김대유는 1520년 이웃 신지리에 있는 소요당 박하담과 함께 사창(社倉)건립을 건의해 뜻을 이뤘는데 사창이 들어선 곳이 당시 청도 관아 동쪽이었다. 청도관아의 동쪽에 있는 창고, 그 창고가 있는 마을, 동창마을이 그대로 강의 이름으로 굳어 동창천이 됐다. 실제로 삼족대는 운문산자락을 깔고 앉아 운문면에서 흘러들어와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긴 강물을 내려다보며 강과 들판을 관조하며 흐름을 지휘하는 듯하여 이 강과 들판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강물이 바위벽에 부딪히며 흐르다 삼족대 앞 암벽이 끝나는 곳에서 휘감아 돌며 들판과 만나는 곳은 소를 이루며 물이 깊어지는데 여기가 우연이다. 김대유는 연못에 어리석을 ‘우’자를 쓰며 자신을 한 껏 낮췄다.

절친 박하담이 있는 자신이 있는 정자 아래 연못을 어눌할 ‘눌’자를 써 눌연으로 지은 것에 대한 화답이다.


어눌한 못(눌연·訥淵)이 어리석은 못(우연·愚淵)에 다다른다.
옛 성인도 어리석은 듯 어눌하려 했다 하네
낚시하며 이곳을 내왕하길 십년
이젠 인간사에 어리석고 언사도 어눌해졌네

- 김대유의 시 ‘흥을 붙이다(寓興)’


삼족당 김대유 신도비와 삼족대

삼족대로 올라가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잘 정돈돼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7월 하순의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몸은 물먹은 수건처럼 금방 땀에 젖었다. 정자 안에 들어서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강물은 눈이 시리도록 파랬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숨이 턱턱 막혀왔다. 토담 아래 바람구멍으로 고개를 들이밀었으나 더위를 식힐 실날 같은 바람도 불어오지 않았다. 500년 전이라고 사정이 나았겠는가. 어떻게 이 찜통 같은 정자에서 여름을 났을까. 정자 안에는 ‘삼족대’ 현판과 누정기와 중수기가 있을 뿐 시문 같은 현판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호 삼족당은 여러 차례 불운을 겪은 뒤 말년에 얻은 안분지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삼족’은 ‘예기’에 나온다. ‘물고기 잡을 수 있고 漁, 땔감 충분하고 樵, 양식 구할 밭 耕이 있으니 세가지가 족하다’는 말이다. 김대유는 이를 본 따 ‘나이 육십을 넘었으니 수(壽)가 이미 족하고, 가문이 화를 입었으나 사마에 합격하고 벼슬을 지냈으니 영예가 족하고, 아침과 저녁밥에 고기반찬이 끊이지 않으니 식(食) 또한 족하다’며 삼족당을 자처했다.

김대유는 16세기 조선 선비의 불운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또 그 불운의 그림자를 지혜롭게 벗어던지고 나름대로 청복을 누린 선비다. 16세기 조선은 사림파와 훈구파가 대립하면서 피의 숙청을 부른 ‘사화의 시기’다. 김대유는 그 사화의 시기에 무오사화와 기묘사화의 직격탄을 두 차례나 맞았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삽입하면서 비롯됐다. 사화의 발단이 된 김일손이 김대유의 숙부였다. 김일손은 능치처참 돼 길거리에 시체가 버려졌고 19살의 김대유는 아버지 김준손과 함께 남원으로 유배당했다가 8년 만에 풀려났다.


삼족대 안에서 본 동창강

이후 1507년 정시에 장원급제 했고 1519년 현량과에 등제해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등에 제수됐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혁파되면서 관직을 삭탈 당했다. 현량과는 조광조가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혁파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에 의해 대책만으로 시험보고 채용하는 제도인데 사림파측 인사가 대거 기용됐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자 훈구파는 현량과 출신 관리들의 관직을 모두 삭탈했다. 김대유의 두 번째 불운이다.

김대유는 엄청난 충격 속에 고향 청도로 돌아왔다. 그는 남은 삶을 ‘처사형 사림’으로 살아가기로 했던 모양이다. 현실 정치에서 좌절을 겪은 지식인들이 시골로 돌아가 학문활동을 하거나 후학을 양성하는 형태이다. 그는 출사를 포기하고 삼족대에 은거하며 당대의 처사형 사림은 물론 내로라는 학자들과 교유했다. 남명 조식, 소요당 박하담, 신재 주세붕, 율곡 이이 같은 이들과 교유하며 유유자적 청복의 삶을 누렸다.

조식과는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의 거봉으로 일컬어지는 조식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였다. 조식은 틈이 날 때마다 삼족당에 들러 강학을 논하면서 김대유의 학문세계나 인품에 대한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삼족당에서 부침’, ‘삼족당에게 드림’ ‘삼족당에게 쓰다’ 같은 시를 보내왔고 김대유가 죽자 묘갈명까지 썼다.

세상사 풍운과 더불어 변하고
강물은 세월과 함께 흘러간다
고금의 영웅들이 품었던 웅대한 뜻도
도무지 한 빈 배에 부쳤네

- 조식의 시 ‘삼족당에 부침’

삼족대 정면, 동창강이 보이는 남향이다

주세붕은 ‘삼족당에게 쓰다’라는 시문과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이이는 ‘삼족당서’라는 글에서 "당은 한 당인데 족함은 세가지네. 주인 선생은 서리속에 선 소나무 같은 지조요. 물에 비친 달 같이 담담한 마음을 가진 분이리라"라고 김대유를 칭송했다.

김동완.jpg
▲ 김동완 자유기고가
김대유는 기개가 호방했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했다.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제자 3천명 중 72명이 육예(예악사어서수)에 능했다고 했고 중국 주나라에서는 육예를 선비의 필수 과목으로 지정해 공부를 시켰다고 했다.
김대유는 학자이면서도 육예를 갖춘 보기 드문 선비이기도 했다.
이 같은 호방한 성격과 무술 능력 때문인지 삼족대에서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삼족대는 거친 물결을 헤치고 나와 높은 곳에 올라 지나온 삶을 관조하는 김대유의 삶의 철학이 잘 반영된 곳이다.
그는 젊은 날의 불운을 딛고 은일의 삶을 즐기며 숙부 김일손의 ‘탁영연보’를 지었다.
뒷날 청도 자계서원, 장수 사동서원 등에 배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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