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족대 전경 |
淸道 三足臺
여러 차례 불운 이겨내고 마침내 꿈꾸던 청복 노리다
동창강이 운문산 자락에 마련한 누정 자리, 청도군 매전면 운문산 자락 언덕위에 삼족대가 들어섰다.
삼족대는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가 1519년(중종 14)가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정자다.
김대유는 증조부인 김극일, 숙부인 김일손과 함께 ‘청도 삼현’으로 불린다. 또 김해김씨 삼현공파의 파조이다
삼족대 현판 |
삼족대는 동창강의 주인격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동창강의 이름이 바로 정자를 지은 김대유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김대유는 1520년 이웃 신지리에 있는 소요당 박하담과 함께 사창(社倉)건립을 건의해 뜻을 이뤘는데 사창이 들어선 곳이 당시 청도 관아 동쪽이었다. 청도관아의 동쪽에 있는 창고, 그 창고가 있는 마을, 동창마을이 그대로 강의 이름으로 굳어 동창천이 됐다. 실제로 삼족대는 운문산자락을 깔고 앉아 운문면에서 흘러들어와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긴 강물을 내려다보며 강과 들판을 관조하며 흐름을 지휘하는 듯하여 이 강과 들판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강물이 바위벽에 부딪히며 흐르다 삼족대 앞 암벽이 끝나는 곳에서 휘감아 돌며 들판과 만나는 곳은 소를 이루며 물이 깊어지는데 여기가 우연이다. 김대유는 연못에 어리석을 ‘우’자를 쓰며 자신을 한 껏 낮췄다.
절친 박하담이 있는 자신이 있는 정자 아래 연못을 어눌할 ‘눌’자를 써 눌연으로 지은 것에 대한 화답이다.
어눌한 못(눌연·訥淵)이 어리석은 못(우연·愚淵)에 다다른다.
옛 성인도 어리석은 듯 어눌하려 했다 하네
낚시하며 이곳을 내왕하길 십년
이젠 인간사에 어리석고 언사도 어눌해졌네
- 김대유의 시 ‘흥을 붙이다(寓興)’
삼족당 김대유 신도비와 삼족대 |
그의 호 삼족당은 여러 차례 불운을 겪은 뒤 말년에 얻은 안분지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삼족’은 ‘예기’에 나온다. ‘물고기 잡을 수 있고 漁, 땔감 충분하고 樵, 양식 구할 밭 耕이 있으니 세가지가 족하다’는 말이다. 김대유는 이를 본 따 ‘나이 육십을 넘었으니 수(壽)가 이미 족하고, 가문이 화를 입었으나 사마에 합격하고 벼슬을 지냈으니 영예가 족하고, 아침과 저녁밥에 고기반찬이 끊이지 않으니 식(食) 또한 족하다’며 삼족당을 자처했다.
김대유는 16세기 조선 선비의 불운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또 그 불운의 그림자를 지혜롭게 벗어던지고 나름대로 청복을 누린 선비다. 16세기 조선은 사림파와 훈구파가 대립하면서 피의 숙청을 부른 ‘사화의 시기’다. 김대유는 그 사화의 시기에 무오사화와 기묘사화의 직격탄을 두 차례나 맞았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삽입하면서 비롯됐다. 사화의 발단이 된 김일손이 김대유의 숙부였다. 김일손은 능치처참 돼 길거리에 시체가 버려졌고 19살의 김대유는 아버지 김준손과 함께 남원으로 유배당했다가 8년 만에 풀려났다.
삼족대 안에서 본 동창강 |
김대유는 엄청난 충격 속에 고향 청도로 돌아왔다. 그는 남은 삶을 ‘처사형 사림’으로 살아가기로 했던 모양이다. 현실 정치에서 좌절을 겪은 지식인들이 시골로 돌아가 학문활동을 하거나 후학을 양성하는 형태이다. 그는 출사를 포기하고 삼족대에 은거하며 당대의 처사형 사림은 물론 내로라는 학자들과 교유했다. 남명 조식, 소요당 박하담, 신재 주세붕, 율곡 이이 같은 이들과 교유하며 유유자적 청복의 삶을 누렸다.
조식과는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의 거봉으로 일컬어지는 조식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였다. 조식은 틈이 날 때마다 삼족당에 들러 강학을 논하면서 김대유의 학문세계나 인품에 대한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삼족당에서 부침’, ‘삼족당에게 드림’ ‘삼족당에게 쓰다’ 같은 시를 보내왔고 김대유가 죽자 묘갈명까지 썼다.
세상사 풍운과 더불어 변하고
강물은 세월과 함께 흘러간다
고금의 영웅들이 품었던 웅대한 뜻도
도무지 한 빈 배에 부쳤네
- 조식의 시 ‘삼족당에 부침’
삼족대 정면, 동창강이 보이는 남향이다 |
▲ 김동완 자유기고가 |